영화를 보다 문득 궁금해지더라. 필주는 정말 인규를 친구로 생각한 걸까, 아니면 자신의 복수를 위해 전략적으로 친해진 걸까.
이성민 어떤 면에서 굉장히 예민한 지점이다. 노인이 사적 복수에 어린 친구를 끌어들이는 게 마치 이용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주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그저 운전만 부탁했는데 뜻밖에 인규가 사건 현장에 나타나면서 문제가 시작됐을 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필주 선에서 조용히 정리했겠지.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짜놨는데 이 젊은 친구가 호기심에 찾아오는 바람에 일이 틀어져버렸다. 이 복수는 숙원처럼 오랫동안 간직해온 일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해내려 마음먹었는데, 때마침 의협심 강한 인규가 개입하면서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져버린 것이다. 일이 복잡해질수록 인규는 도망치고 싶었겠지만. (웃음)
남주혁 거스르고 싶었을 거다. 그렇지만 두 인물간의 연결된 설정에서 오는 힘이 있다. 우리가 힘든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함께해온 시절이 있지 않나. 그렇다 보니 할아버지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을 거다. 처음 겪는 일들에 당황해 소리치면서도 할아버지 기침 소리엔 걱정하는 모습이 그렇다. 두 가지 마음이 계속해서 왔다갔다 한다.
이성민 영화가 버디물처럼 보이는 건 두 인물이 나아가는 방향의 균형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둘이 같이 나아가는데, 중간엔 필주가 인규를 끌고 가고 후반엔 오히려 인규가 필주를 끌고 간다. 이렇듯 서로 맞춰가다가 본인들도 모르게 동행의 간격을 갖게 된다.
이일형 감독과 호흡을 맞췄다. 이 감독의 디렉팅 방식은 어땠나.
이성민 나와는 여러 작품을 함께한 경험이 있다. <군도: 민란의 시대>에서 조감독으로 만났다가 <검사외전>에서 합을 맞췄다. 이일형 감독님은 늘 디렉션이 정확하고 명료하다. 여러 수의 계산을 머리에 꿰고 있어 배우가 편하게 작업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싶은 장면을 설명할 때 애매하게 둘러가거나 어렵게 전하지 않는다.
남주혁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주 쉽고 간단명료하게 설명해주신다. 작품을 만들어가는 내내 우리가 같은 선에 서서 다 같이 채워나가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정확히는 함께 있다는 느낌에 가깝다.
이성민 이성민 촬영 초반에 논의도 많이 했다. 사실 촬영 현장에서는 다들 피곤하고 힘든데, 최대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많이 배려해주셨다. 오로지 연기에만 몰두할 수 있게끔 환경을 조성해주셨다.
총격 신, 몸싸움, 생활 액션 등 다양한 액션 신이 등장하는데 그 주인공이 노인이다. 그간 영화에서 보기 어려운 장면이었던 만큼 인상적이다. 느리지만 집요하고, 지략적인 면모도 눈에 띈다. 반면 인규는 성격처럼 시원한 카 체이싱 질주를 선보이고 거친 몸싸움을 치러야 했다.
이성민 필주가 아무래도 나이가 많으니 모든 행동의 템포가 빠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영화에서도 액션이 재빠르거나 역동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다만 인물의 액션 외 다른 요소로 긴박감을 주려 했고 기술적인 보완으로 리듬을 잡아갔다. 처음엔 우려가 컸는데 이러한 장치 덕분에 많이 해소됐다. 또 총 쏘는 장면과 긴장감을 몰아붙이는 장면들이 영화에 초조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필주가 싸우는 인물들은 실제 필주 나이대의 배우들이었는데 체력적으로 많이 힘드셨을 거다. 특히 박병호 선생님은 나와 엘리베이터 안에서 몸싸움을 해야 했다. 깜짝 놀란 게 예전에 액션영화를 많이 찍었다고 하시더라. 그래서인지 액션 자체에 대한 이해도가 무척 깊으셨다. 여기서 때리면 어디서 막아야 하는지, 어떤 지점을 부각해야 날렵하게 보이는지 등 너무 잘 알고 계셨다.
남주혁 카 체이싱 장면을 찍을 땐 솔직히 말하면 무서웠다. 차에 나 혼자 타고 있는 게 아니라 이성민 선배님도 함께 계시다 보니 큰 실수를 하면 안된다는 일념 하나로 초집중했다. 또 액션 신은 체력적으로 조금 힘들어서 엔지를 내지 않으려 엄청 노력했다. 당시 그 신을 함께 촬영한 선배님들도 “한번에 가자!”는 말을 계속 하셨다. 우리가 계산한 대로 흐트러짐 없이 해내려 했다. 그렇다 보니 인규의 마음과 비슷해졌던 것 같다. 살아내자. 살아남아야 한다. (웃음)
이성민 주혁이가 카 체이싱을 할 때 무척 힘들어했다. 스포츠카에서 의자를 최대한 뒤로 밀어도 다리가 길어서 자세 잡기가 어려웠다. 영화에서는 별로 티가 안 나지만 몸 전체를 쭈그린 채 타고 있었다.
영화는 복수를 통한 카타르시스를 전해주지만 이 행동의 옳고 그름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 내리진 않는다.
이성민 <리멤버>는 필주의 행동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을 관객에게 제시하진 않는다. 그건 관객의 몫이니까. 다만 필주의 관점을 따라가 이 복수를 응원하는 관객이 있다면 그 시대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의미일 것 같다. 영화 속 박근형 선생님의 대사 중 이런 말이 있다. 21세기에 무슨 친일파 타령이냐고. 그게 이 영화가 던지는 주된 화두 중 하나다. 간접적이나마 영화를 통해 이런 논의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남주혁 필주라는 인물은 역사의 산증인이다. 관동군에 징집되었다가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이력이 있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한 인물의 이야기로 응축했기 때문에 거기서 묻어나는 손기술이나 전투력 등이 흥미롭게 드러난다. 무엇보다 인규는 필주의 세계를 잘 모르지 않나. 오로지 교과서나 책에서만 접하던 역사를 필주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그 상황에 들어가 공유하게 된다.
이성민 맞는 말이다. 노인의 이야기를 20대 청년이 함께하고, 노인은 알츠하이머라는 병 때문에 기억을 잊지만 그 공백을 청년이 대신 기억해준다. 어느 세대에서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는 것. 그게 중요한 메시지다. 영화는 어떤 점에서 문학적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이 둘이 타고 이동하는 스포츠카는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모든 복수를 빨리 해치워야 한다는 속도의 상징이기도 하다. 한정된 시간이 조급한 필주의 사투를 드러내는 장치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