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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2
2022-11-02
글 : 송형국 (영화평론가)

우리 모두는 하찮으므로 위대하다. 이 글과 이 글이 다룰 영화가 목표 삼은 명제다. 왜 그런지는 차차 쓰기로 하고 우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약칭부터 정리하고 봐야겠다. 제목의 각 어절에서 첫 자음을 딴 <ㅇㅇㅇㅇㅇ>이 어떨까 싶다. ‘ㅇ’은 시작도 끝도 없이 순환하는 모양인 데다 극중 중요한 소품인 베이글 또는 인형 눈알과 닮아 있어 이 영화를 가리키기에 적당해 보인다. 한글에서 유일하게 음가 없는 자음인 ‘ㅇ’은 모든 모음과 어디서든 한번에 만날 수 있어 ‘없음의 쓸모’를 말하는 이 영화의 세계관과 맞닿기도 한다. 어찌 됐건 이 글은 <ㅇㅇㅇㅇㅇ>의 이야기에 영감을 준 동양 사상과 서양 과학의 접점을 야트막하게 들춰보려는 시도이자,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에 대한 기획 지면(<씨네21> 1292호)에 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속편이기도 하다. 특히나 최근 할리우드에서 하나의 흐름이 되어가는 다중우주 서사는, 이전에 만나지 않던 동서양의 세계관을 접붙이며 낯선 자극을 전하고 있어 반갑다.

색즉시공

<ㅇㅇㅇㅇㅇ>의 세계관에 다가서기 위해 이 우주가 비어 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세상 모든 물질은 원자로 되어 있다. 원자는 원자핵과 그 주변의 전자로 구성된다. 원자핵과 전자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원자 단위의 작은 세계를 상상하기에 우리의 직관은 보잘것없기만 하니, 이론물리학자 김상욱 교수의 친절한 비유를 들어보자. “수소 원자핵이 농구공만 하다면 전자는 대략 10km 밖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보면 된다. 전자는 크기가 거의 없을 만큼 작기 때문에, 서울시만 한 공간 안에 농구공 말고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다는 말이다. 우리의 몸도 원자로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 몸은 사실상 텅 비어 있다. 다른 모든 물질도 마찬가지다.” (김상욱, <김상욱의 양자 공부>) 원자핵과 전자가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에 착안해 이들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면 사람도 개미만 하게 줄일 수 있다는 게 <앤트맨>(2015)의 발상이다. 물론 영화는 주인공의 몸이 작아지면 무게도 따라 가벼워지고 몸이 커지면 힘도 세지는 등 최소한의 물리법칙을 무시하며 진행되지만, 과학이 아이디어를 제공해 재미난 이야기가 탄생하는 걸 지켜보는 일은 늘 흐뭇하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가 펼치는 다중우주 서사의 출발점에 <앤트맨>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비어 있다. 잠깐, 세상 만물이 그렇게 물리적으로 비어 있다면 사람을 주먹으로 쳐도 뚫고 들어가게? 양전하를 띤 원자핵과 음전하를 띤 전자 사이에 서로 끌어당기는 전자기력이 있어 뚫을 수 없단다. 음양의 조화가 우리 몸을 몸으로 만들어준다. <앤트맨과 와스프>(2018)에선 “실험 도중 원자의 불안정화가 일어난” 신체를 가진 빌런 고스트(해나 존카먼)가 등장해 벽을 뚫고 다닌다. <ㅇㅇㅇㅇㅇ>에선 세상 모든 입자들의 관계성을 마음껏 조정할 수 있다는 설정의 조부 투파키(스테파니 수)가 상대방에게 쏘아붙인다. “내가 꼭 널 뚫고 들어가야겠어?” 원자의 기초 개념을 알고 쓴 대사다(원자의 전자기력을 무시하려 들면 영화에서 빌런이 된다).

원자핵 주변을 도는 전자는 각각의 궤도를 갖는데, 다른 궤도로 이동할 때는 직선으로 이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마치 어두운 밤 가로등 밑을 지나는 물체처럼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단다.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싶지만 192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닐스 보어가 밝힌 이론이다. 물리학에선 이를 ‘양자 도약’(quantum jump)이라 부른다. 세계적인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이렇게 썼다. “전자는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할 때에만 존재한다. 다른 무언가와 충돌할 때에 어떤 장소에서 물질화된다.”(카를로 로벨리,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이쯤 되면 <ㅇㅇㅇㅇㅇ>의 아이디어에 조금 다가선 듯한 기분이 든다. 타임머신 같은 걸 타고 날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이 우주에서 저 우주로 한순간(at once)에 도약한다는 설정. 입자들의 궤도를 조정할 줄 알면 인물이 ‘점프’할 수 있다. 관계를 바꾸면 존재는 따라 바뀐다.

억겁의 연

당신은 누군가의 자녀인 동시에 어떤 이의 동료다. 누군가에게 당신은 세심한 사람이고 어떤 이에겐 소심한 사람이다. 당신의 성격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만 소심하거나 세심하다. 불가의 연기론(緣起論)에서 하는 얘기다. 우리는 연(緣)에 의해 생겨나는(起) 존재다.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들이 각각 홀로 존재한다면 심장에 털이 나거나 손가락에 눈알이 달릴지도 모른다. 세포들은 다른 세포들과의 연관 속에서 우리 몸 안에 자리를 잡는다. 에블린(양자경)은 아버지와 대화할 때는 광둥어를, 남편이나 딸과 말할 때는 만다린어와 영어를 섞어 쓴다. 태어나 자란 주변 처지와 조건 속에서 내가 규정된다. 입자들의 관계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조부 투파키는 총탄에 맞아 터져나오는 피도 유기농 케첩으로 바꿀 수 있다. 말도 안되지만 현실에서도 탄소 분자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다이아몬드도 되고 숯덩이도 되고 잿더미도 된다. 애초에 세상 만물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고, 저명한 과학자가 말했다. “인간은 우주 전체 중 96%는 모르고 지금은 4%를 알고 있는데 그 4%의 90%가 수소와 헬륨 원자핵입니다. 나머지 별들이나 태양계, 인간은 우주 전체로 봤을 때 수소가 타고 남은 재에 불과한 거죠. 우리는 타고 남은 찌꺼기에서 생긴 그 무엇들인 겁니다.”(박문호, <뇌, 생각의 출현>)

아주 작은 세계를 얘기했으니 아주 큰 쪽을 보자. 현대 과학이 추산하는 우주 전체 별의 수는 10²³개다. 은하마다 평균 약 1천억(10¹¹)개의 별이 있고, 그런 은하가 우주에는 1조(10¹²)개 정도 있어 이를 곱한 결과다. 여기에다 각각의 별들은 최소한 지구 같은 행성 1개 이상씩을 거느리고 있을 것이며 그 행성 주변에는 달과 같은 위성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나 많은 별과 행성과 기타 등등이 들어차 있는 우주의 밀도는 얼마나 될까. 우주는 지금도 팽창하고 있어서 인간의 능력으로는 제대로 알기 어렵다. 논문마다 결과 값도 다르다. 스윈번 공과대학에서 운영하는 SAO 천체백과사전 온라인판에 따르면 우주는 1㎥의 상자 안에 수소 원자가 10개 들어 있는 정도의 밀도를 갖는다고 한다. 이게 얼마나 텅 빈 것인지 감이라도 잡으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제아무리 상자를 말끔히 비워놓아도 그 안에는 질소와 이산화탄소, 산소 등의 공기로 가득 차 있을 테니 우주의 밀도만큼 비울 수 없다. 저렇게나 많은 별을 다 품고도 밀도가 0에 가까울 만큼 우주는 아주 넓다. 우주는 사실상 비어 있다.

가만, 시골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면 쏟아질 듯 빽빽한데? 과학자들이 계산 잘못한 거 아닌가. 우리가 보는 천체 가운데 금성은 빛의 속도로 약 2분 거리에, 북극성은 약 400광년, 안드로메다 운하는 250만광년 거리에 떨어져 있다. 우주에서 가장 빠른 게 빛인데, 그래봐야 1초에 299,792km밖에 날아가지 못한다. 우리는 2분 전에 빛난 금성과 400년 전에 빛났던 북극성 같은 것들을 한꺼번에 쳐다보면서 별들이 쏟아질 것 같다고 느낄 뿐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ㅇㅇㅇㅇㅇ>에 나오는 인물들의 인연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불가에서 억겁의 연을 말할 때 1겁은 거대한 바위를 비단으로 쓸어 그 바위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의 시간에 비유하곤 한다. 억겁은 돼야 만나는 인연이라니, 과장이 심한 것 아닌가. 잠시 눈을 감아보자. 비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우주의 한 귀퉁이, 1천억×1조개의 별들이 거느린 행성 중에서, 138억년의 시간 속 생명체로 진화한 고사리와 소나무와 아메바와 두루미와 코뿔소 등등을 이루는 세포들 가운데, 지금까지 살았거나 살고 있는 수천억명의 호모 사피엔스 중 단 한명의 남성이 갖고 있던 수십억 마리의 정자 속 한 마리가 단 하나의 난자와 만나 태어난 그 무엇이, 재능을 살리거나 취향을 외면하거나 소질을 발휘하거나 특기를 무시하거나 자질에 주목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부모 말을 거역하고 무엇을 먹을지 어떻게 입을지 매 순간 취사와 선택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 바로 우리라는 얘기를 <ㅇㅇㅇㅇㅇ>은 하고 있다. 영화를 본 이라면 공감하리라. 우리 모두는 ‘우연한 조건들이 겹친 독창적인 결과물’이다. 이렇게 만난 인연이라면, 당신과 내가 바위로 다시 태어나 지동설을 논할 확률도 0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제행무상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이렇게 썼다. “지구의 자연환경이 인류에게 훌륭한 조건을 제공하는 것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모든 생물들이 지상에서 태어나 바로 그곳에서 오랫동안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초기 생물들 중에서 지구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한 종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다행히 잘 적응할 수 있었던 유기물의 후손이다. 우리와 다른 세상에서 진화하고 적응해 살아남은 물질들은 또한 자기네 환경을 극찬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손가락이 핫도그로 진화한 다른 우주에서도 그곳 사람들은 각자의 조건에 적응하며 아름다운 환경과 억겁의 연 속에 다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음을, <ㅇㅇㅇㅇㅇ>은 전하고 있다. 그런 우리가 “한줌의 시간이라도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을까.

여기서 문제가 있다. 이 우주에 결정된 것은 그 무엇도 없다는 거다. 원자 단위의 세계에서는 빛이 비추는 것만으로도 대상이 교란되기 때문에 불변의 상태로 관측도 예측도 불가능하다는 게 양자역학의 논리라고 한다.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움직이는 것은 항상 같을 수 없다. 빛이 무슨 수로 물질을 교란해? 뉴턴 물리학에 인식이 갇혀 있는 나로서는 믿기지 않지만 1932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란다(여전히 동의하지 않는 물리학자도 있다). 양자역학에서는 모든 걸 정확히 관측할 수 없으므로 확률에 기대야 하며, 모든 사건의 결과도 확률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이 불편한 진리를 일찌감치 알아버린 조부 투파키는 “통계적 필연”을 말한다. 허무에 빠진 능력자는, 타노스든 투파키든 왠지 확실하고 관측 가능해 보이는 ‘죽음’에 끌린다. 사실 제아무리 과학이 발전한다 해도 이 우주에 빛보다 빠른 것은 없으니 우리는 138억년 전 빅뱅 이래 빛이 이동한 만큼만 볼 수 있다. 어디선가 빛이 날아오는 사이 그곳은 이미 변해 있을 것이고 우주는 지금도 팽창 중이며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인간은 알 수 없다. 모든 걸 입자 단위에서 통제할 수 있는 투파키가 허무에 빠질 만도 하다. 천체물리학계의 석학 아메데오 발비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빛이 우주가 시작된 때부터 현재까지 이동할 수 있었던 곳까지만 관측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우주에 ‘지평선’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동그란 정보의 거품 속에 갇혀 그 지평선 너머는 볼 수 없다. 거품 밖에 또 다른 우주가 있을 거라 추정되지만, 관측할 수가 없다.” (아메데오 발비, <마지막 지평선>) 그러면 어떠랴. 영화의 상상력은 “거품에서 뛰쳐나와 점프”할 수 있는데. <ㅇㅇㅇㅇㅇ>의 중국어 제목은 ‘천마행공’(天馬行空). ‘거침없고 자유로운 상상’을 뜻하는 관용구다. 이 의미를 담는 말에 ‘행’과 ‘공’이 들어간다니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야말로 색즉시공의 세계에서 모든 것은 제행무상하니 상상력이 우리를 진리에 이르게 한다는 뜻이 담긴 듯하다.

쓸모없음의 쓸모(無用之用)

다중우주론은 ‘거품’ 밖과 ‘지평선’ 너머에 대한 탐구 속에서 나온 가설이다. 물론 학계에 정리된 이론은 아니지만 후회를 밥 먹듯 하는 우리 인간에게 또 다른 우주가 있다는 가정은 몹시도 유혹적인 이야깃거리다. 발비 교수는 이에 대해 “간단히 말하자면 ‘발생 가능한 모든 일이 일어난다’는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조금 더 간략하게 말하면, 지난 몇년 동안 우주론의 기초에 관한 논쟁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키워드, 즉 ‘다중우주’(Multiverse)를 말할 수 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다중우주론을) 덮어놓고 반대하는 건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상상력 부족은 가설을 선택하는 데 좋은 기준이 아니다”라며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그는 국제천문연맹·기초질문연구소·국제우주학회 상임위의 정회원이다). 이를 채택한 영화 <ㅇㅇㅇㅇㅇ>에선 매우 괴상한 행동을 할 때 거품 밖으로 점프할 수 있다. 얼마나 괴상해야 하냐면 모든 우주에서 단 하나뿐일 만큼 괴상해야 한다. 심각한 얘기 하다 말고 춤추는 정도로는 턱도 없다. 올해의 세무조사관상 트로피를 항문에 쑤셔넣는 정도는 돼야 점프가 가능하다. 앞서 ‘우연한 조건들의 독창적인 결과’로서 우리의 존재를 말한 바 있다. 인위적으로 독창성을 만들어내려니 개연성이라곤 없이 하찮아야만 한다.

이를 가장 잘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액션 스타도 가수도 주방장도 아닌 ‘세탁소 에블린’이란 점은 다중우주 여행을 떠나온 우리를 뭉클하게 한다. 잠재력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무수한 기회를 놓쳐버린 “최악의 에블린”은 그만큼 무한한 가능성이 남아 있는 존재다. 이에 대해선 <인디와이어>의 글쟁이 데이비드 얼리치(칸영화제에서 <기생충>을 본 직후 ‘봉준호는 그 자신이 장르가 되었다’고 처음 공언한 필자)가 쓴 문구가 절묘하다. “에블린은 ‘더 원’이 아니다. ‘더 제로’다.”(Evelyn isn’ t the One, she’s the Zero) 하나 이전의 출발점, 어떤 기원, 새로운 시작, 도가 사상에서 ‘무’에 해당하는 순수한 없음으로서의 0.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 둥그런 그릇에 담기면 둥그렇게 되고 네모난 그릇에 들어가면 네모난 모양이 되는 물처럼, 에블린은 적당히 하찮지만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우리 모두에게 포옹을 제안하며 말한다. “쓰레기든 뭐든 난 너와 여기에 있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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