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 알 수 없다. 원조교제 상황극에서 경매까지 능수능란하게 진행하는 냉정함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콩팥을 구하기 위해 쩔쩔매는 효자 극렬(장률)을 가엾게 여기는 연민도 숨기고 있다. 반전 상황의 묘미를 극대화하며 깔끔하게 종결되는 단편영화 <몸 값>과 달리, 시리즈 속 <몸값>은 “사장 다음으로 여기에 가장 오래 있었던 사람이 나”라고 말하는 여자, 주영(전종서)의 사정을 좀더 들여다보고 싶게 만든다. 배우 전종서는 이 무너진 미궁에서 한번쯤 믿어보고 싶은 눈빛의 소유자인 동시에 문득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야생동물이 되어 화면 안팎을 축지법하듯 쌩쌩하게 오간다.
-단편영화 <몸 값>을 시리즈화한 대본에서 어떤 매력에 설득되었나.
=원작 소설이나 단편영화 등 그 포맷, 그 길이 그대로 보존되어야 할 것 같은 작품들이 있다. 사실 나에겐 단편영화 <몸 값>이 그랬다. 처음엔 ‘어떻게 시리즈화될 수 있지?’ 하고 의아해했는데 단편 분량의 내용을 훼손하지 않고 1화에서 그대로 살린 뒤 이후 전혀 예상치 못하게 디스토피아적 장르로 바뀌는 지점이 생소하면서도 설득력 있었다. 전우성 감독님의 시나리오에서 받은 첫인상 중 하나는 블랙코미디적 뉘앙스가 더 강조되었다는 점이었다. 끊임없이 서로 센스 있게 받아치는 대사들이 웃기기도 하고 엉뚱한 매력도 있었다.
-주영이란 인물을 6부 분량으로 새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어떤 해석을 더했나.
=시나리오가 100% 완성되기 전부터 주영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를 여러 번 가졌다. 내 캐릭터가 새롭게 빌드업된다는 게 결국은 그에 맞게 다른 캐릭터들의 대사나 행동, 상황이 조금씩 바뀌는 일이기도 해서 생각보다 대대적인 작업이었다. 일종의 밀실 게임처럼 흘러가는 전개 속에서 주영을 열쇠 같은 역할, 날이 서 있는 인물로 그려내고 싶었다. 관객 입장에서는 ‘쟤를 따라가면 여길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싶은 느낌이 들도록. 그러면서 동시에 입만 열면 거짓말하는 애, 믿을 수 없는 애처럼 캐릭터가 계속 알쏭달쏭하게 다가갔으면 했다.
-붕괴된 건물의 구멍 사이로 추락해 탱크에 빠지거나 비밀 통로를 맨몸으로 기어오르는 등 육체적으로 도전적인 장면이 많아 보인다.
=뒤로 넘어가는 그 장면은 와이어를 달고 실제로 (스튜디오 가리키며) 이곳 높이의 3배 정도 되는 공간에서 떨어졌다. 원래 고소공포증이 심한데, 연기에 몰입하니까 오히려 무섭지 않더라. 감독님이 침대 매트리스에 누워 있듯이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있어야 잘 나온다고 해서 그 지시를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읽을 때까지만 해도 잘 캐치하지 못했던 것이, 이야기 내내 주영이 물에 젖은 상태라는 점이었다. 중간중간 물이 마르면 분장팀이 농업용 분무기를 이용해서 쉴 때마다 계속 배우들을 적셨다. (웃음) 체온 유지가 힘들어 체력 소모가 심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다 할 만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로 커리어를 시작해 호흡이 긴 장면에 일찌감치 익숙해졌을 수도 있겠지만 이번 작업은 특히 액션이 부각되는 세트피스가 많아 새로운 과제였을 것 같다.
=장면이 호흡이 워낙 길기 때문에 한 신을 찍으면 하루가 끝나 있었다. 셋팅과 리허설 과정에 긴 시간이 소요되지만 막상 본 촬영은 깔끔하고 신속하게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모두의 합이 딱 맞게 떨어질 때 오는 쾌감이 있었다. 또 배우들은 연기의 합을 중시하는 데 반해 연출자만 볼 수 있는 전체적인 그림이 따로 있다는 사실도 이번에 더욱 실감했다. 배우들이 느끼기엔 이보다 더 잘할 수는 없다 싶은 테이크도 감독님이 다시 촬영하자고 하셔서 의아한 순간도 있었는데, 완성된 장면을 보고 뒤늦게 배우는 것이 많았다.
-몸을 쓰고 액션이 필요한 연기에 거리낌이 없다는 인상이다.
=운동은 10대 때부터 정말 꾸준히 해 왔다. 운동하는 걸 너무 좋아하고, 땀 흘리는 순간이 좋다. 구기종목에 좀 약하긴 하지만 대체로 운동이라면 가리지 않고 다 한다. 그래서 연기를 할 때도 본능적으로 몸을 쓸 쑤 있을 때 스스로도 충족감을 느끼는 것 같다.
-현장에서의 직관과 몰입을 중시하는 배우로 알려져 있다. <몸값>은 배우들과의 합, 세트 블로킹, 긴 호흡으로 외워야 할 대사 등 롱테이크를 위한 규칙이 중요한 프로덕션이었는데, 어떻게 자기 리듬을 찾아갔나.
=사실 <버닝>을 시작으로 그동안 감사하게도 카메라가 나를 따라와주는 현장에 있었다. 그런데 <몸값>은 동선도 대사도 철저히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컷이 불발되고 마는 현장이라 ‘동물적으로 놀고 싶은데 그게 가능할까’ 싶어 개인적으로 막연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예상과는 또 다르더라. 오히려 호흡이 길기 때문에 실제 상황 같은 사실적인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준비 과정에서 진선규 선배님과 스타일이 너무 다르긴 했다. (웃음) 선배님은 리딩 때 이미 100% 완벽하게 대사를 암기한 상태로 오신다. 약간 과장하면 나는 리딩 때 0%에 가깝다. 자주 생각하고 상상하는 동안 서서히 머릿속에 채워넣고, 촬영 직전에 마지막으로 토씨나 디테일들을 점검하는 식이다. 이렇게나 다른 두 사람이었지만 회차를 거듭할수록 서로에게 스며들었고 그게 작품에서도 보이는 것 같다.
-미리 만들어두지 않고 당도한 순간에 충실해 연기하다보면, 종종 스스로도 놀라게 되는 몰입의 순간 같은 게 찾아오나.
=무당처럼? 찰영장에 도착해서 장소, 미술 세팅, 소품, 나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이 입을 옷, 그리고 그 날의 공기 같은 것들로부터 훅 하고 들어오는 게 있다. 이 때 동물적으로 순간의 감정을 최대치로 파고들려고 한다.
-현장에 집중하는 시기에 자신을 장작처럼 태워가며 일하는 것에 대한 고충을 지난해 부산 액터스하우스 토크에서 이야기한 적 있다. 촬영장에선 단 커피를 계속 마시면서 에너지 충전을 하고 집에 돌아가면 그제야 소나기밥을 먹은 다음, 카페인 효과 때문에 피곤해도 잠들지 못한다고.
=촬영하면 일상의 리듬이 다 깨지는데, 그렇게 깨져버려도 상관없다는 쪽이다. 그냥 쏟아붓는 편이 편하다. (조금 걱정스럽고 수줍은 얼굴로) 아직은 그렇게 첨벙첨벙 스타일로 일한다. 진선규 선배님은 아침마다 러닝을 하고 촬영장에 오셨다. 내게는 결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하, 같이 뛰자고 하시면 어떡하지 걱정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장률 배우가 같이 러닝을 하더라.
-<콜> <모나리자 앤 더 블러드 문> <몸값>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등 사회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마냥 유순하지 않은 여성들, 야생적이고 해방감을 안기는 인물들을 연기해왔다. 어떤 인물들에 끌리나.
=조금은 모나고 못난 모습에서 인간적인 것을 느낀다. 미숙해 보여도 자기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들에게 끌린다고 할까. 하루에 한편은 꼭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편인데, 언제나 좋아하게 되는 역할이 있다면 상황을 완전히 파괴하는 빌런들이다. 대중문화에서 재현되는 캐릭터가 더 파격적이고 다양해졌으면 한다.
-어제 영덕에서 이충현 감독의 신작 <발레리나>가 크랭크업했다.
=인물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그 과정의 설득력이 필요한 인물인데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연기를 해 봤다.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주실지 궁금하다. 잔인하면서도 슬프고 순수하고, 어떤 면에서는 힙한 느낌도 있는 그런 영화다. 감독님, 촬영감독님 등 여러 멤버가 <콜> 때 함께했던 분들이라 서로 그냥 끄덕이기만 해도 통하는 것이 있었다.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때 유지태 선배님이 영화를 찍다보면 ‘매직 모먼트’같은 게 찾아온다고 말씀하신 적 있다. <발레리나>는 정말 마법같은 순간들을 여러번 경험한 영화라 내가 느낀 그것이 영화에도 그대로 생생하게 담겼을지 무척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