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영화제가 끝나고 난 뒤
2022년 6월 6일. 제10회 무주산골영화제 시상식이 끝나고 김종관 감독님께서 핫도그에 맥주 한 잔을 사주셨다. 함께 먹으며 비가 갠 쾌청한 하늘 아래 무주등나무운동장에서 잠시 느껴본 여유. 낮 12시. 가장 많은 도움을 주셨던 이슬비님은 김종관 감독님을 태우고 대전 터미널로 향했다.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나기 전 혼자서 벤치에 앉아 아이들의 캐치볼을 멍하니 봤다. 나를 무주로 초대해주신 조지훈 프로그래머님이 다가오셨고 마지막 인사를 건네시며 커피를 선물로 주셨다. 그렇게 영화제를 뒤로하고 향한 무주 터미널에서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의 김세인 감독님을 우연히 마주쳤고 버스가 오기 전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서울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모든 긴장이 풀리면서 미친 듯이 잠이 쏟아졌다. 영화제의 모든 순간은 꿈처럼, 스크린에 잠시 머물다 흩어지는 영화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대사 하나가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너 왜 자라지를 않아?”
1. 성장
제10회 무주산골영화제 한국장편영화경쟁부문인 ‘창’ 섹션의 10편의 영화를 최대한으로 묶을 수 있는 키워드는 ‘성장’일 것이다. 내가 영화평론가상 후보로 거론했던 영화는 <비밀의 언덕>과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다. 두 작품은 성장에 관한 극과 극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위에서 언급한 대사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에서 용서를 요구하는 딸에게 엄마가 용서 대신 던진 말이다. 영화는 일면 화해와 성장의 불가능성을 논한다. 영화의 강렬함과 더불어 보는 내내 캐릭터들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끝나길 내심 바랐다. 그랬을 때 벌어지는 어떤 처참한 결과를 보고 싶었다. 결국 딸 이정(임지호)은 엄마 수경(양말복)이란 거대한 산을 넘어서질 못한다. 대신에 그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파국의 원인을 서로에게 미루면서 한 치의 양보를 보이질 않는 두 여자의 충돌의 몽타주에 관해 쓸 수 있는 날을 희망하며 말을 줄이겠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와 반대로 <비밀의 언덕>은 글쓰기를 경유해 성장의 가능성을 바라보는 영화다. 영화의 매무새를 보자면 <비밀의 언덕>은 정돈되고 세련된 느낌을 선사한다. 그것은 마치 초등학교 5학년인 명은이(문승아)가 담임 선생님(임선우)을 바라볼 때의 느낌과 같다. 세련된 무언가에 대한 동경. 동경의 대상은 외부에 존재한다. 한 개인은 가닿을 수 없는 동경의 대상과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 동시에 그 동경의 존재가 너무 커져 버리면 자기 자신은 한없이 초라해 보일 수 있는 위험성도 있다. 명은이가 창피하게 생각하는 것은 가족이다. 그래서 명은이는 가족을 비밀에 부친다. 그녀에게 가족은 무엇일까?
<비밀의 언덕>은 1996년이란 시대적 맥락을 하나의 레이어로 깔고 시작한다. 90년대라는 시대에서 영화가 모티브로 삼은 것은 가정환경조사서다. 이 조사서는 학생을 이해하는 데 목적을 둔다.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배경이 전면에 배치되어 또 하나의 얼굴이 되었던 그때 그 시절. 이러한 경향이 과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현재 크게 달라지지 않았거나 오히려 더 강화된 모습을 보일 때를 감안한다면 영화는 노스텔지어를 자극하기보다는 지금의 세태를 읽어낼 수 있는 동시대성을 품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배경은 자신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완전히 지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맨얼굴이란 없다는 뜻이다. 그러한 조건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깨뜨림으로써 자기 얼굴을 만들어 나가는 수밖에 없다. 명은이는 이러한 과정에 놓인 인물이다. 성장은 파괴를 동반한다. 하지만 명은이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기에 이른다.
2. 내부/거짓말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소설 <데미안>의 유명한 구절과는 반대로 명은이는 학교라는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서 세계를 만든다. 재료는 거짓말이다. 명은이의 세계는 언젠가 들통 날지도 모르는 스릴을 품고 있는 셈이다. 기존의 성장 서사에선 주인공이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를 향해서 내부의 압력을 높여 자신의 알을 깨고 세계로 한 걸음 다가선다. <비밀의 언덕>에서 세계는 분리된 형태로 구성되어있지 않다. 세계는 명은이의 시선으로 품은 하나의 돔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 세계의 중심에 바로 명은이가 있는 것이다. 그녀의 시선이 뻗는 거리만큼이 그녀의 세계이며 인식의 지평이다. 지평은 한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녀의 시선의 끝엔 동경에 대상이 존재한다. 반면에 내부에 존재하는 가족은 등잔 밑이 어둡듯이 명은이의 시선이 닿지 않는다.
<비밀의 언덕>은 명은이가 담임 선생님께 드릴 선물을 고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장식용 스티커의 색깔 때문에 집에 오자마자 다시 문방구를 향해 달려간다. 그녀의 이러한 적극성과 상대를 위하는 마음은 아직 가족에겐 뻗히지 않는다. 그날 밤 명은이네 가족은 저녁으로 게를 삶아 먹는다. 마침 TV에선 불우이웃돕기 성금 모금 방송이 한다. 명은이는 우리도 전화해보자고 말한다. 아빠(강길우)는 ‘지랄’이라 말하며 단칼에 거절한다. 여기에 엄마(장선)도 한 소리 거든다. 이때 젓갈 장사로 인해 붉게 물든 엄마의 손을 클로즈업된 이미지로 보여준다. 명은이는 가족을 위해 애쓰는 엄마의 고됨을 알기엔 아직 어렸다. 명은이의 온 신경은 자신의 내부인 가족보다 외부에 존재하는 학교, 그중에서도 담임 선생님의 관심에 집중되어있다.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이 선생님 책상에서 공공연하게 진행될 때 명은이는 카이저 소제처럼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보고 순간적으로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한다. 종이를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아버지, 아주 평범한 가정주부이신 어머니란 캐릭터를 창조한다. 오빠는 같은 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기에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영악하게도 볼 수 있지만 영화는 명은이를 마냥 밉게 그리지 않으며 적절한 선을 유지하며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들어낸다. 이때 멈췄다면 안전했을 명은이의 세계는 반장 선거를 나감으로써 위태로운 상태가 되어간다. 엄마의 말대로 반장보다 반장 엄마가 더 바쁜데 명은이는 그것까진 미처 알지 못했다. 그래서 돌아가신 할머니를 살려내는 기적의 거짓말까지 선생님께 하게 된다. 할머니 병간호로 엄마가 학교에 올 수 없다고 말이다. 계속 쌓여가는 거짓말은 자신이 만든 세계를 균열이 나게끔 취약하게 만들고 있었다.
균열은 시선의 교차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체면이 깎이는 민망한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하나는 반장이 되고 나서 신나서 엄마의 젓갈 가게로 명은이가 갔을 때다. 젓갈을 손으로 집어 맛본 손님은 엄마 외투에 양념 묻은 손을 몰래 비비며 닦는다. 엄마는 알면서 모르는 척 그냥 넘어가는데 그 모습을 명은이가 바라본다. 무안했는지 엄마는 집에 가서 방이나 치우고 주제 파악이나 하라며 잔소리를 퍼붓고 명은이는 자리를 뜬다. 다른 하나는 ‘교내 환경보전 글짓기 대회’에서 우수상을 받고 기념으로 고깃집에 갔을 때다. 하필 그곳에서 서점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던 회장 엄마를 보게 된다. 회장 엄마는 자신의 엄마와 다르게 지적이고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명은이는 고개를 숙이며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 다음 날 회장 경수가 명은이에게 어제 왜 엄마를 아는 척을 안 했냐고 물어본다. 대꾸 없는 명은이에게 경수는 시장에서 부모님이 일하시지 않느냐고 물어본다. 명은이는 지기 싫어서 아니면 어쩔 거냐고 되받아친다.
명은이는 자신이 만든 가짜 가족이 진짜임을 입증해야 하는 모순된 순간에 봉착한다. 처음으로 세계의 균열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명은이는 이를 봉합하기 위해서 숙제를 핑계로 한 회사원을 인터뷰하고 같이 사진을 찍는다. 오랜만에 놀러 간 친구네서 친구 엄마의 사진을 찍는다. 명은이는 이 사진들을 가족의 증거로 친구들에게 선보인다. 이렇게 물적 증거를 마련함으로써 명은이의 세계는 다시금 봉합된다. 통제되지 않는 세계에서 명은이가 통제할 수 있던 것은 공약으로 내세웠던 ‘비밀 우체통’ 뿐이었다. 이 우체통은 학우들의 말 못 할 고민을 해결해준다는 명목으로 설치됐다. 방과 후 명은이는 선생님과 단둘이 자물쇠를 열어 학우들의 쪽지를 읽어본다. 쪽지의 내용을 바탕으로 명은이는 재치를 발휘해 반 분위기를 사랑과 평화로 가득 차게 만든다. 하지만 그 쪽지들은 모두 명은이가 글씨체를 달리하여 쓴 것이었다. 그녀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세계가 작동되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명은이의 세계가 거짓으로 가득 찰 때쯤 외부에서 누군가가 들어온다.
3. 외부/솔직함
서울에서 학교로 한 쌍둥이가 전학을 온다. 혜진, 하얀이란 이름을 가진 쌍둥이 중 혜진이 명은이네 반으로 온다. 쌍둥이는 순도 100%에 가까운 솔직함을 장착하고 있었다. 혜진은 수업 때 아빠는 없고 엄마는 아가씨 골목에서 사장님을 하신다고 치부라고 불릴만한 것들을 가감 없이 이야기한다. 이러한 솔직한 화법은 작법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쌍둥이는 명은이가 부러워하는 대상이 된다. 명은이는 이들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쌍둥이는 운동장에서 점심을 먹고 도서관에서 같이 책을 본다. 명은이의 세계에 통제할 수 없는 이들이 온 것이다. 명은이가 사수했던 비밀 우체통마저 위기에 처한다. 우체통에 자신의 쪽지가 아닌 것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명은이는 자신조차 생각도 못 한 아이디어를 보고서 얼른 주머니에 쪽지를 숨긴다. 그 쪽지는 혜진의 것으로 그녀는 선생님과 명은이 앞에서 쪽지를 넣었는데 왜 없냐며 의문을 제기한다. 그렇게 명은이가 사수하던 세계마저 서서히 균열이 나기 시작한다.
‘교내 평화 글짓기 대회’에서 명은이의 세계는 균열을 넘어서 붕괴 직전으로 향한다. 명은이는 이 글짓기 대회에서도 동일한 작법을 선보인다. 그 결과 전과 동일한 우수상에 그치며 명은이는 크게 실망한다. 왜냐하면 쌍둥이가 최우수상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명은이는 여러 권의 책을 읽고 정리하고 통일 전망대까지 찾아가는 노력을 보였다. 그렇게 그녀가 쓴 글은 친구들에게 제법 버겁게 느껴질 만한 거대담론인 한반도 통일에 관한 것이었다. 반면에 쌍둥이는 달랐다. 전학을 다니면서 느꼈던 자신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자신들만의 평화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이는 외부 현상에 대해 면밀한 분석을 기반으로 한 글과 자신의 내부에서 길어 올린 내밀하고 솔직한 글의 차이다. 세상은 후자에서 손을 들어 준 것이다. 영화는 이 둘 중 어느 쪽도 손을 들어주지 않고 명은이를 이 스펙트럼 사이에 놓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가게 둔다. 이런 와중에 오빠 민규(최현진)가 가짜 가족사진을 발견하고 동생을 혼낸다. 오빠는 고깃집에서 도망친 거 엄마, 아빠가 모를 것 같냐고 명은이에게 묻는다. 그날로 명은이는 자신에게 잘 해주는 엄마와 피 한 방울 안 섞인 외할아버지네로 짐을 챙겨 가버린다.
물리적으로 자신의 내부인 가족이란 세계에서 빠져나온 명은이는 이제야 자신과 가족을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한다. 또한 그 가족에 대해서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가정의 달 기념 성원시 어린이 글짓기 공모전’에 명은이는 두 편의 글을 제출한다. 하나는 늘 하던 방식대로 썼고, 다른 하나는 쌍둥이의 작법을 빌려와 솔직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후자는 학교에 알리지 않고 몰래 제출한다. 제목은 <손녀로부터 온 편지>. 이 글에서 명은이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비밀을 밝힌다. 거짓말을 한 것을 솔직히 고백하며 시작하는 이 글은 가족에 대한 명은이의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녀의 시선에서 가족의 창피한 점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하지만 영화는 편지 내용을 따라서 장면을 구성하지 않는다. 명은이가 보지 못하는 가족들의 이면을 담아낸다. 명은이의 시선으로만 묘사됐던 세계는 이 편지 신에서 명은이가 파악하지 못하는 세계의 이면을 입체적으로 관객에게 제시하며 감동을 선사한다. 하지만 여전히 명은이는 자신의 가족을 숨기고 싶어 한다. 명은이가 구축한 세계는 외할아버지와 삼촌의 도움으로 여전히 봉합되고 있었다.
<손녀로부터 온 편지>가 공모전에서 대상을 거두면서 명은이는 봉합하려고 애썼던 자신의 세계가 파괴될 수 있다고 체감한다. 지금까지 자신이 공개되는 것에 꺼리지 않았던 명은이는 소극적으로 변하고 담임선생님에게 대상을 받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정당한 이유가 없이는 상을 무를 수는 없다고 선생님이 말한다. 명은이는 공개적으로 제출한 글로 입선만 받겠다고 말한다. 이 둘은 실랑이 끝에 차분히 다시 면담을 이어간다. 명은이는 비밀 우체통을 가져와 자신의 이야기를 쪽지에 적어 통에 넣는다. “제 솔직한 마음 때문에 가족이 상처받을까 봐 겁나요.” 선생님도 쪽지를 적어 우체통에 넣는다. “명은이는 가족을 정말 사랑하는구나!” 이에 고개를 젓는 명은이에게 선생님은 “억지로 솔직해질 필요 없어. 솔직한 게 꼭 좋은 건만도 아냐”라고 말해준다. 이어서 선생님은 중요한 것은 거짓말을 하더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이라고 따뜻한 이야기를 건넨다.
영화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담임선생님의 말에 모두 담겨있다. 명은이가 아무리 똑똑해도 한계는 존재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나이가 어려서도 아니다. 영화는 함께 사는 세상을 그리고 있다. 함께 살기 위해서 서로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영화는 폭력적인 면모가 존재했던 90년대의 시대상을 재현하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이보다 한 차원 넘어서 믿음의 회복을 희망하고 있다. 영화는 명은이가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부분과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을 나눈다. 이 둘을 잇는 것으로 어른이 존재한다. 담임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은 명은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대상을 받지 않기로 결정한다.
4. 언덕 너머에
명은이는 대상을 포기하고 무엇을 얻었을까? 그것을 생각하기 전에 명은이는 맨얼굴과 같은 자신의 원고를 회수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시청에 찾아가 원고를 건네받고 동네 뒷산으로 향한다. 언덕에 앉아 복잡한 심경의 표정으로 명은이는 석양을 바라본다.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원고를 땅에 묻는다. 비밀의 언덕이 된 이 신 이후로 영화는 명은이의 두 개의 얼굴을 교차하며 희망의 이미지를 그려낸다. 첫 번째 얼굴은 시상식 기념사진을 찍을 때 등장한다. 사진사는 입선한 사람은 미안하지만, 옆으로 이동하라고 말한다. 양옆으로 사람이 몰리며 가려진 명은이는 앞 사람을 피해 자신의 얼굴을 드러낼 공간을 찾다가 이내 포기한다. 얼굴에 그림자가 진 명은이는 이제야 편한 듯 활짝 웃는다. 명은이는 이제까지 설령 그게 거짓이더라도 뻔뻔하게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며 자기 세계를 지켜내 왔다. <손녀로부터 온 편지>를 쓰면서 명은이는 가족을 창피하게 생각한 자신의 못난 마음을 보게 된 것 같다. 그래서인지 6학년으로 올라갈 때 명은이는 가정환경조사서가 요구하는 모든 사항에 거짓 없이 적어 내려간다. 내부 분열에 가까웠던 명은이와 가족과의 관계는 다시 결합된다.
이렇게 영화가 마무리되었어도 성숙한 엔딩이지만 영화는 마지막에 한 번 뒤집는다. 여기서 두 번째 얼굴이 나온다. 6학년 담임 선생님(이한주)은 “나는 개인적으로 너희들 가정환경은 별로 궁금하지 않아. 다만 너희들이 궁금한 거지”라고 말한다. 그는 학생들이 책상 위로 꺼낸 가정환경조사서를 뒤집으라고 말한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가정환경조사서의 이면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이든 자유롭게 써보라고 담임 선생님은 말한다. 거창하게 표현하면 선생님의 전복적인 시도를 통해 빈 페이지가 학생들에게 주어진 셈이다. 명은이는 서랍에서 색연필을 꺼내 빈 페이지에 무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영화는 이를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는 명은이의 신난 표정을 통해 그 내용을 가늠할 뿐이다.
<비밀의 언덕>은 명은이를 통해 희망의 이미지를 그려낸다. 영화에서 희망은 그것을 품은 인물의 얼굴을 통해 드러난다. 대개 높은 곳을 올라가 태양이나 풍경을 바라보며 내일을 꿈꾸는 식의 클리셰가 존재한다. 이 영화에선 그것이 백지를 바라보며 이뤄진다. 마치 흰 스크린 위에 영화가 영사되듯이, 명은이는 가정환경조사서 이면에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야 명은이의 얼굴이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한 조건으로서 선생님의 역할이 마지막에 짧지만 강렬하게 다가온다.
<비밀의 언덕>은 포스터에 담긴 문구처럼 솔직한 게 항상 최선은 아님을 이야기한다. 동시에 솔직하게 털어놓을 곳이 반드시 필요함을 이야기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명은이가 비밀을 터놓는 상대는 가족도, 친구도 아닌 선생님이었다. 5학년 담임 선생님은 명은이의 비밀을 들어주었고, 6학년 담임 선생님은 가정환경조사서를 뒤집어버렸다. 명은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한계에 부닥쳤을 때 손을 뻗어 준 사람들은 담임 선생님들이었다. 이지은 감독은 <비밀의 언덕>을 통해서 앞으로 펼쳐질 명은이의 6학년 생활을 응원하는 것만큼이나 그것이 가능한 조건, 즉 서로에 대한 믿음이 회복되고 연결되는 세계를 희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에필로그
송경원 평론가는 “영화는 인연이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영화와 나의 관계가 바뀐다”라고 말했다. 시사회가 아니라 영화제에서 봤기 때문에 이 영화가 남다르게 다가온 것은 분명했다. 태권관 스크린에 영사된 <비밀의 언덕>에 신인 평론가인 나의 처지가 중첩되어 보였던 것 같다. 이제는 영화와 헤어질 시간이 됐다. 평론가로서 좀처럼 자라지 않는 느낌을 받았을 무렵 찾아간 제10회 무주산골영화제. 그곳에서 뵀던 많은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