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컨버세이션’ 무주산골영화제 한국장편영화경쟁부문 ‘창’ 섹션 초청작 비평 전문
2022-11-09
글 : 박인호 (영화평론가)
말을 가두어 영화가 된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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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중의 두 번째 영화 <컨버세이션>(2021)은 제목에 충실하다. 영화 전체가 2인 이상이 모인 대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누군가의 진솔하고, 실없고, 애틋하고, 어이없는 대화를 듣기 위해 러닝 타임 전부를 할애한다. 전작 <에듀케이션>(2019)에서도 대화는 중요한 도구였지만, 성희(문혜인)와 현목(김준형) 두 사람의 만나질 리 만무한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는 종종 어그러졌다. 이에 비해 <컨버세이션>은 다양한 인원과 대화하는 사람들의 친밀한 관계 여부와 그들의 감정에 넓게 포진함으로써 세밀한 감정 변화에 집중한다. 시간을 공유하고 공동의 경험을 간직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이 영화의 대화는 호기심과 관심과 헤아림을 동반한다. 하지만 조각난 신 구성으로 인해 관객들은 대화를 듣고 있기는 하지만, 온전히 대화에 안착할 수 없다. <컨버세이션>은 대화로 이루어진 영화를 넘어서 영화가 된 대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 영화는 무엇에 도달하고자 하는 걸까, 대화를 전경에 배치함으로써 어떤 영화적 상태에 이르고자 한 것일까, 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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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버세이션>은 스스로 정해놓은 형식을 아주 견고하게 지켜나가는 영화다. 대화 대부분이 원 신, 원 숏으로 촬영되어 있고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는데, 예외적인 상황도 반드시 등장해서 대화의 불가항력적인 측면과 연출상의 난맥을 해결하려는 재치를 은연중 드러낸다. 먼저 원 신, 원 숏이라는 원칙은 <컨버세이션>의 제작 방식과 규모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큰 것 같다. 제작, 각본, 연출, 편집을 맡은 김덕중과 촬영의 오정석, 동시녹음의 전미연 3인으로 만들어진 제작 규모와 조달할 수 있는 만큼의 제작비라는 한계가 오히려 이 영화의 강직한 형식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런데도 이상한 점이 있다. <컨버세이션>은 철저하게 감독의 구상안에 자리 잡고 있지만, 각 신의 말미에 이르면 감독의 통제 하에 이루어지는 대화가 아닌 것 같은 착각을 만들기도 한다. 대화는 뱅글뱅글 돌다가 어느 순간 멈춰서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다가 제자리에 머물고 있기를 반복한다. 이는 거실, 택시, 기차, 극장, 카페처럼 한정된 실내라는 공간 탓도 크다. 하지만 놀이터, 옥상, 길거리와 같은 외부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마지막 산길을 제외하면 이 영화는 폐쇄적인 공간에 놓인 인물들이 밑도 끝도 없이 묻고 대답하고, 생각하고, 상대방의 말을 반박하거나 동조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공간의 제약 뿐 아니라 대화에 할애되는 시간도 붙박여 있기는 마찬가지다. 현재와 과거, 대과거가 섞여 있는 이 영화의 구성은 신과 신 사이를 이어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은 일체화된 블록으로 만들어져 있고, 관객은 그 접합면을 찾아가면서 대화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말의 이어짐과 끊김은 매 신마다 반복되어 스스로 생성되고 문득 사라져버리는 대화의 속성이 곧 구성의 여건을 만들어버린다. 대화 자체가 생명을 지닌 것처럼 모여들다가 흩어지고, 한 사람의 말에 집중하다가도 동시다발적인 말들의 제멋대로인 양상이 복합적으로 제시된다. 거기에 앰비언트 사운드까지 가세하면 대화는 종종 소음에 묻혀버리고, 우리는 왠지 중요한 대화를 놓친 게 아닐까, 라는 조바심을 느끼기도 한다. 무엇보다 대화들이 마지막 신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에 정체되거나 뒤섞어놓은 대화의 단편들 중간에 인물들이 혼자 자신의 시간과 마주한 순간이 배치되어 있지만, 그조차도 지나치게 주도면밀해서 꽉 짜여 있다는 느낌을 만들어낸다. 예외마저 규칙이라면 과장된 표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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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버세이션>은 감독의 의중과 배우들의 놀라운 집중력이 결합된 최상의 결과물이다. 어디부터가 훈련된 연기이고 어디까지가 배우가 태생적으로 지닌 본래 모습인지 구분할 수 없도록 만든다. 배우와 인물간의 높은 일치율이 대화를 지탱하는 근간이기 때문일까. 감독도 흥미진진한 대화에 도취된 것일까. 문자로 된 말들이 제 자리를 지키다가 이탈하고 다시 돌아오고 새로운 가지를 뻗어가는 중에 문득 쓸쓸해지고, 하염없이 우스운 소리를 내뱉다가 불현듯 찾아오는 짧은 침묵의 향연에 만족한 것일까. 경험을 염두에 둔 것 같은 생생한 연기는 김덕중이 배우라는 몸을 입은 대화의 흐름에 개입해서 ‘컷’이라고 주문하는 상황을 꺼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이와 같은 전략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는 것은 관객들이 대화의 장에 동참하고 곱씹어보고 생각하기를 유도하기 위함일까. 속단하기 힘든 대화들의 중간쯤에 슬그머니 일어나는 의심과 믿음, 진짜 같음과 그럴듯한 연기, 의아심과 질문, 즉흥과 계산의 교착을 시치미 떼기 위함일까. 일관된 형식은 감독의 의지일 테지만, 이상하게도 이 영화는 감독의 흔적을 지우려 하거나 아주 희미한 상태로 놓아두려 한다. 숨죽이고 가만히 지켜보던 감독의 존재는 마지막 숏에 가서야 참아왔던 숨을 한껏 뱉어내는 것 같다. 김덕중은 두 시간 가까이 숨겨왔던 자신의 호흡을 그제서야 관객에게 보여준다. 그것도 철저하게 계산된 지점에 이르러서야 다시 첫 신의 대화를 반추하도록 한다. 연대기에서 자유로운 대화의 조각들은 마지막 숏을 보면서 인물들의 전사와 감정의 전후관계를 맞춰볼 여지를 갖게 된다. 말보다 두 육체의 제스처와 거리감에 의지했던 <에듀케이션>과 달리 <컨버세이션>은 배우들의 생생한 표정과 약간 상기된 듯한 목소리의 톤과 그들의 협업이 빚어내는 내밀함과 종종 어색함을 모면하려는 어설픈 분위기와 따끔거릴 만큼 긴장을 유발하는 말의 액션/리액션으로 채워진다. 김덕중의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가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숏을 만들어낸 <에듀케이션>의 카메라는 인물의 움직임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동했다. 특히 앉은 인물과 누운 인물과 서 있는 인물의 높낮이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고, 성희와 현목이라는 두 인물, 그 사이에 위치한 중증장애인 엄마를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프레임 내부와 외부의 긴장이 생겨난 것과 다른 양상이 <컨버세이션>에서 펼쳐진다. 대화의 장에서 도통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는 프레임을 굳건히 유지시키는 역할에 충실하다. 오로지 지금, 여기서 흘러넘치는 말의 자리에 버티고 서겠다는 의지가 느껴지고, 하나의 신 이전과 이후라는 연속성보다 지금 주어진 신에 새겨진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프레임에 주워 담겠다는 선택으로 느껴진다. 관객들은 <컨버세이션>의 대화들이 문득 시작된 것처럼 예상치 못한 순간 마감되기를 되풀이하는 신의 배열을 통해 대화의 생성과 소멸을 목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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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버세이션>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은영(조은지)을 중심으로 한 여성들의 대화, 승진(박종환)을 중심으로 한 남성들의 대화, 은영과 승진의 대화다. 시퀀스로 나누면 여성들-남성들-은영과 승진-은영-승진-은영과 승진으로 구성된다. 15신 16숏으로 이루어진 영화는 여성들의 대화에서 5신 6숏을 제외하면 남성들 5신 5숏, 은영과 승진 2신 2숏, 은영 원신 원숏, 승진 원신 원숏, 은영과 승진 원신 원숏으로 구성된다. 규칙적인 신 구성에 비해 대화의 근간이 되는 감정 연결은 불규칙적이고 시간 흐름 또한 비선형적이다. 명확한 것과 불명확한 것이 나란히 놓여 있고, 규칙에 적응할 즈음 위배되는 것들이 끼어든다. 각 신의 구성도 그들의 현재와 과거가 혼재되어 있다는 규칙성을 보인다. 초반부 여성들의 대화에 등장한 인물인 은영, 명숙(김소이), 다혜(송은지)의 대화를 떠올려보자. 이들은 결혼하고 아이 라온을 낳은 은영의 집에 오랜만에 모여 각자가 겪었던 프랑스 생활과 그들이 겪었던 공통적인 경험과 현재의 생활에 대해 수다를 떤다. 베란다로 난 창에서 한겨울의 따스한 빛이 들어오고 그들은 커피를 마시고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좀 재수 없을지 모를 대화를 나눈다. 먹고 마시고 대화하는 이 신이 두 숏으로 나눠진다. 하지만 우리는 두 개의 숏이 이 영화에서 예외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아직은 모른다. 이어지는 신은 명숙과 다혜가 담배를 피우며 바람이 쌩쌩 부는 계단에서 나누는 대화다. 복도로 들어가는 문이 잠긴 탓에 이들은 계단을 내려간다. 다음 신은 프랑스로 떠나기 전날, 택시 안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은영과 핸드폰으로 촬영을 하다가 전화기를 떨어트리는 은영, 택시운전사와의 긴 대화로 이어진다. 카메라는 은영의 얼굴을 비추고 택시 운전사는 프레임 바깥에서 목소리만 들려온다. 그래도 이들의 대화는 신기할 정도로 생동감 있으며 은영의 현재와 과거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의 카페에서 만난 은영과 명숙의 대화,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프랑스 남자가 잠시 다가와 짧은 대화를 나눈다. 이어지는 신은 다시 은영의 집이다. 술의 힘을 빌려 프랑스어로 대화를 나누는 이 신의 말미에 은영이 아기에게 다가가면 카메라가 패닝해서 그녀의 움직임을 쫒는다. 이 신은 숏을 쪼개지 않고 패닝으로 그날 하루의 긴 대화 시간과 아기 엄마라는 은영의 상황과 명숙, 다혜의 현재에 대한 불안과 미래에 대한 다짐을 뒤섞는다.

두 번째 시퀀스 남성들의 대화는 놀이터에서 만난 승진과 필재(곽민규)의 현재부터 시작한다. 두 사람은 친밀해보이지만 뭔가 모르게 서로에 대한 감정적 앙금이 남은 것처럼도 보인다. 카메라는 원형 산책로를 따라 유모차를 밀면서 왼쪽으로 다시 오른쪽으로 움직여 다니는 두 사람을 팔로우한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의 대화는 반가움보다 티격태격하는 말의 액션/리액션이 두드러진다. 필재가 프레임 안에 들어있는 것에 비해 승진은 유모차를 놓고 담배를 피우러 프레임 아웃/인을 되풀이한다. 우리가(아직은 알 수 없는) 둘의 관계와 둘의 과거와 둘의 시간은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승진의 변심을 예상하게 하고 아직까지 승진에 대한 미련이 남은 듯한 필재의 투박한 반응을 통해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이 만남의 미묘한 분위기는 원형의 움직임과 겉도는 대화의 다소 신경질적인 뉘앙스를 만들어낸다. 이어지는 신은 대명(곽진무)의 집이다. 승진과 필재는 이 날 처음 만났는데, 하필이면 대명의 집 전등이 고장 나 필재가 고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대명과 필재만 있을 때의 편안한 분위기는 승진이 방문하면서 조금씩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미세한 균열을 탁월하게 표현한 건 박종환의 신경질적 반응과 어이없는 농담과 유쾌함이 범벅이 된 연기와 곽진무, 곽민규의 리액션에서 비롯된다. 여성들의 대화가 감정의 일치와 어긋남이 미세하게 자리를 바꿔 등장한다면, 남성들의 우스꽝스럽고 치기어린 반응은 불협화음이라기보다 조화롭게 표현된다. 후경으로 아파트가 빙 둘러쳐진 옥상은 옥상이라기보다 남의 자리에 떡 하고 자리 잡아 침범한 것을 시침 떼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움푹 팬 웅덩이 같은 곳에서 세 사람은 정치 성향, 어떻게 알게 되었냐, 뭐하고 사냐 등등 대화를 나누는데, 이들의 감정은 평균치를 넘어서는 과장된 방식으로 드러난다. 다음 신은 이 영화에서 가장 고요하고 나른하면서도 애틋한 감정을 자아내는 길거리 버스킹 공연을 보고 있는 승진과 필재의 모습이다. 노래를 듣다가 승진이 벌렁 뒤로 눕고 필재는 승진의 허벅지를 만진다. 승진과 필재 사이에 우리에게 정보를 주거나 두 사람의 관계를 드러내는 대화는 없다. 대신 비루하거나 우습거나 유머러스하거나 애잔한 시선이 웃음과 긴장 사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마지막 신은 주차하기 위해 운전자를 기다리는 동안 승진과 전화 통화를 하는 필재의 모습이다. 어두운 밤, 답답하게 막힌 프레임 곳곳을 서성거리는 필재의 발걸음과 혼자 있어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를 원하는 듯한 머뭇거림이 감정의 여지를 남긴다. 여성들의 대화와 남성들의 대화 시퀀스는 각각 44분, 34분 동안 이어지면서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엿볼 수 있도록 만든다. 하지만 김덕중은 딱 우리에게 거기까지만 허용하고 서둘러 남녀의 관계로 들어선다. 세 번 째부터 마지막 시퀀스까지는 은영과 승진의 관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 전 날부터 알게 된 은영과 승진이 카페에서 우연히 만나는 신과 우연히 극장에서 두 사람이 만나는 신인데, 두 시퀀스를 통해서 우리는 은영과 승진이 거짓말 게임을 하고 “우연치곤 너무 인위적”인 만남을 보게 된다. 두 사람 외에 관객이 없는 극장 스크린에서는 오정석의 <여름날>(2019)이 상영되고 있지만 이들에게 영화는 뒷전이고 서로에 대한 호감과 의심이 뒤섞인 대화를 나눈다. 친구들과 함께 있는 모습에서 두 사람의 연기는 대화의 장에서 서로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가, 현재와 과거 사이의 간극과 변하지 않는 감정 상태를 어떻게 유지시킬 것인가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은영과 승진의 캐릭터는 사뭇 상반되는 언행을 보인다. 은영과 친구들의 대화보다 승진과 친구들의 대화는 응집력과 집중도에 미치지 못하고 산만하기 그지없다. 우왕좌왕하다가 장난치다가 서로의 이미지에 대해 농담을 하며 대화가 이어지기 때문에 남성들의 대화에서 말은 옥상 고기 불판의 연기처럼 휙 사라질 성질의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이들은 제스처를 통해 말로 드러내지 않거나 말할 수 없는 현재의 혼란스런 감정을 넌지시 드러내보이는 방식을 취한다. 두 집단에서 대표적인 인물인 은영과 승진의 관계는 상반된 감정이 대립되고 아무렇지 않은 듯 눙치는 승진의 느물거리는 반응과 은영의 새침하면서도 날카로운 현실 인식 사이를 오간다.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시퀀스가 마지막 산길이다. 이 시퀀스의 카메라 동선은 이전까지 꽉 짜여 있던(물리적으로도 이들은 갇혀 있다.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프레임 안에 있는 창문과 커튼, 반사되는 얼굴, 벽과 같은 프레임 안에, 떠도는 대화 안에, 변동하는 감정 안에,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가 무화된 시간 안에서 그렇다.) 움직임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인물들을 따라간다. 마지막 신은 서 있다 은영의 옆에 앉는 승진 두 사람의 미디엄 숏에서 시작되어 주저앉아 있는 승진 옆에 쪼그려 앉는 은영의 익스트림 롱 숏으로 끝나는데 은영은 승진의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되지 않는 말들과 진짜인지 가짜인지 파악하기 힘든 감정에 있는 힘껏 반응하다가 마침내 승진을 발로 걷어차 버린다. 카메라는 이들을 뒤따르다가 어느 순간 멈춰 서서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하필이면 카메라가 멈췄을 때 승진은 은영을 안으려고 시도하고 덜 묶인 등산화 끈을 묶어주려다 은영에게 발길질을 당하고 주저앉는다. 공교롭게 승진은 눈에 뭐가 들어갔다고 비비면서 투덜거리고 은영은 투닥거리다가도 “눈 떠봐! 아무 것도 없어.”라고 말한다. 승진이 겸연쩍은 듯 미적거리며 눈을 비비며 “뭐 있는데…”라고 말할 때 카메라는 지체 없이 전원 버튼을 꺼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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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버세이션>은 마지막 신에 이르기 전까지는 눈으로 본다는 행위보다 말하고 듣는다는 행위를 우선시하는 영화처럼 보였다. 폭포처럼 쏟아지던 말이 조금씩 잦아들면서 급기야 숲에서는 말보다 제스처가 중요해진 것 같다. 여기에 카메라의 움직임까지 가세하면 지금까지 영화를 지탱해오던 말이 수그러지는 그 지점의 끝에 가만히 지켜보는 눈길이 있음을 확언하는 것처럼보인다. 감독은 이 신을 위해 지금까지 의중을 숨겨둔 것 같다. 우리가 <컨버세이션>을 보는 동안 들었던 그 많은 말들은 대화이기도 했고, 동문서답하는 장난이기도 했고, 상대방을 떠보는 듯한 말이기도 했고, 간혹 장난을 가장한 진심이기도 했다. 말의 진위 여부를 떠나 우리가 들어왔던 그 많은 말들이 이제 다 어디로 쓸려갔을까, 란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처음으로 막힘없이 탁 트인 숲이 등장했고, 이곳엔 바람소리와 새소리와 사박거리는 발걸음 소리만 들려온다. 속내를 아는 게 중요하다는 은영과 꼭 알아야 하냐고, 속내가 추하고 이상하다고 말하는 승진의 대화는 감정이 서서히 고조되기 시작한다. 승진의 장난에 화가 난 은영이 배낭을 메고 일어서면 승진이 엉거주춤 따라가고, 카메라도 두 사람의 뒤를 쫓아간다. 사람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참과 거짓만 있는 게 아니다, 라는 승진과 사람과 사랑과 행복은 단순하다고 항변하는 은영이 멈춰서 대화하자 카메라도 가만히 멈춘다. 강직하게 고정되어 있던 카메라가 대화의 내용을 세밀하게 기록하기를 멈추고 멀찍이 물러서서 이들을 바라볼 때, 신기하게도 <컨버세이션>을 가로막는 장면이 생겨난다. 이 영화는 지금까지 프레임의 네 면과 프레임 뒤쪽이 막혀 있었고 대화는 카메라의 존재를 잊은 것처럼 생성되고 소멸되었다. 하지만 마지막 신의 움직임이 멈추는 순간에 이르면 대화는 프레임의 앞쪽까지 막아선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컨버세이션>은 일견 열려 있는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장 강고한 형식으로 말들을 가두고 막아선 영화이자, 감독의 존재가 휘발된 것처럼 보였지만 지독할 정도로 감독의 시선이 계산된 영화이다. 그렇기에 이 장면을 접하면서 시쳇말로 영화가 끝난 후 인물들의 사정이 어떠할 것인지 하나도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산길 어딘가에 표류한 것처럼 보이고 앞으로 빠져나갈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 감독의 엄중한 시선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컨버세이션>에서 말들의 블록은 영화라는 육면체 안에 영원히 갇혀 떠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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