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에 20회, 편당 500원의 가격으로 에세이를 보내주는 메일링 서비스 <일간 이슬아>로 스타덤에 올랐을 때, 이슬아가 가장 먼저 계획한 것은 친구 코너를 만드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한번, 이슬아의 에세이를 대신해서 그 주변 창작가 친구들이 구독자에게 작품을 알렸다. 이슬아는 딱 하루만 연재 부담을 덜고 싶다고 설명했지만, 이 결정은 그의 많은 것을 대변한다. 혼자만 잘되지 않을 거란 의지, 자신이 가진 것을 주변인과 나누는 다정함, 더 나은 창작 사회를 꿈꾸는 열망. 이토록 봄볕 같은 그의 성정은 겨울 바다처럼 눈부신 그의 모부(‘부모’의 글자 순서를 바꾸어 말한 단어) 복희와 웅이에게서 비롯한다. 이것은 소설 <가녀장의 시대>가 견고한 가부장제를 균열내기 위해 격렬한 싸움이나 언쟁보다, 명랑함과 천진난만함을 무기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출간 열흘 만에 1만부 판매. 압도적인 숫자 앞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암묵적으로 새로운 가장을 기다려왔는지 알 수 있다. 단언컨대 이슬아의 세계관이 열렸다.
-가녀장 이전에 ‘소녀 가장’이 있다. 그럼에도 ‘가녀장’이라는 새로운 말을 대중에게 제시하고 싶었던 이유는.
=소녀 가장이나 K장녀 등 이미 비슷한 단어가 있지만 그 안에는 서글프고 안쓰럽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자신이 주도적으로 선택했다기보다 어쩔 수 없이 상황을 받아들인 느낌도 강하다. 게다가 한 가정을 책임지는데 어떻게 소(少)녀 가장일 수 있나. 이들은 그렇게 작은 존재가 아니다. 그동안 사회가 소녀 가장과 K장녀에 부여하지 않았던 위풍당당함을 가녀장이 내비칠 수 있길 바랐다. 내 주변에도 언어만 없었을 뿐 가장으로 역할하는 이들이 많았기에 그들의 명랑한 모습을 따라 더 능동적이고 늠름해 보이는 언어를 만들고 싶었다. 어느 날 인터넷에 ‘가부장’에 아비 부(父) 대신 계집 녀(女)를 넣어 검색해보니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작가로서 이 말을 선점하고 싶기도 했다.
-가부장 사회를 비트는 세계관을 만들고 싶었던 계기는 무엇인가.
=2년 전 즈음 김소영 감독과 변영주 촬영감독이 함께 제작한 영화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를 우연히 보게 됐다. 1990년에 나온 작품인데 당시 가부장의 행실을 고발하는 내용으로 여성주의적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거기서 가부장 역할로 나오는 남자배우를 보는데 내가 하는 행동과 비슷하더라. (웃음) 그때 가부장의 행실을 성별 전환으로 바꿔보고 싶었다. 마냥 유토피아적 이야기는 아닐 거라는 직감이 들었지만 일단 쓰고 싶었다.
-소설 <가녀장의 시대>의 등장인물은 에세이 <일간 이슬아>의 인물들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 일화들이 마냥 가상으로만 느껴지진 않는다. 실제로 많은 독자가 모두 실화라고 오해하기도 하는데.
=내 글쓰기가 현실에 원형을 두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가녀장의 시대>가 소설인 이유는 극화해 지어낸 이야기의 비중이 훨씬 커졌기 때문이다. 에세이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인물을 소설로 데려가서 실제로 겪지 않은 일과 대사를 덧붙여봤는데 너무 재미있더라. 물론 <일간 이슬아>를 먼저 접한 독자들은 <가녀장의 시대>도 실제 일화처럼 보일 것 같다. 하지만 그 경계를 모호하고 헷갈리게 열어두는 게 좋다. (웃음) 에세이 작가가 소설을 쓰니 모두 진실된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예상치 못한, 재미있는 현상이다.
-소설 속 ‘슬아’가 가부장제를 가녀장제로 역전시킨 것은 단연 집 명의의 주인이 되면서부터다. ‘장이 되는 것’에 경제력이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나.
=일단 딸이 가세를 일으키는 이야기라는 것만으로 고무적이다. 사실 모든 딸들은 열심히 돈을 번다. 가족들을 위해 명절이나 각종 기념일도 열심히 챙기고. 이렇게 딸들이 경제에 이바지한 바가 큰데도 가정 내 통치권을 쥐었다는 이야기는 접해보지 못했다. 그때 생각했다. 그래! 명예를 확 줘버리자! 물론 어떤 집단의 수장이란 돈만 있어서 되는 건 아니다. 좋은 미덕을 갖춰야 하고 리더십도 필요하다. 소설에 슬아가 그 면모를 체득해가는 과정을 담았다.
-생각해보면 조금 억울하다. 경제력이나 도덕적 면모를 갖추지 않아도 그 자체로 가장인 이들이 있는데, 다른 가족 구성원이 가부장 자리를 쟁취하려면 경제력과 도덕적 지위까지 갖춰야 한다.
=발전된 모델을 제시해야만 겨우 그 자리에 올라설 설득력이 생기는 듯한 느낌이 들 수 있다. 하지만 권력의 자리에 있으면 누구든 실수한다. 가부장은 실수를 만회하고 다시 배울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반면, 여성들은 권력을 쥐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그걸 제대로 부리는 법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슬아가 가녀장으로서 이런저런 실수를 하며 앞으로 나아갈 계기를 주고 싶었다. 이건 아버지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기도 하다. 딸이 진정한 힘을 배우는 동안, 아버지는 가부장제가 만든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난다. 고정된 남성성과 여성성을 열어버리면서 웅이에게 '당신! 집안일에 굉장히 재능이 있을 수 있어! 그걸 하는 당신의 모습이 무척 아름다울 수 있어!’라고 북돋는 것이다.
-그런데 권위적인 아버지 손에 자란 아들 웅이가 가부장적이지 않은 설정은 의외다. 게다가 그는 무려 장남이다.
=이 질문을 들으니 뜨끔하다. 그걸 잘 녹이지 못했던 것 같다. (웃음) 웅이가 가부장적이지 않은 이유는 그가 문청(文靑)이었던 과거와 관련이 깊다. 물론 한때 문청이었던 모든 아저씨가 가부장적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웅이는 그만큼 섬세하고 사랑을 담아 연애편지 쓰길 즐겼다. 이런 면모는 그 당시의 남성 사회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복희가 동창을 만나는 장면에서도 웅이는 “쟤가 뭐가 남자다웠냐? 쟨 항상 책상 뒤에서 연애편지나 썼지. 책이나 읽고”라는 말을 듣는데 결국 마초 사회에서 탈락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지점이 현대의 관점에서 얼마나 좋은 미덕인지 보여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