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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탑’, 영화의 건축술과 배우의 변신술
2022-11-16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영화의 시작점에 우리는 ‘탑’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화면을 채운 모습을 보게 된다. ㅌ, ㅏ, ㅂ이 결합한 글자는 마치 상형문자처럼 보인다. 글자 ‘탑’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3층 정도 높이의 건축물과 닮았다. 이것은 같은 발음을 가진 영문자(TOP)로 풀어 적을 때는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은 논문 ‘영화의 원리와 표의문자’(1929)에서 한자어의 축약성에 특히 주목한다. 그는 이미지를 추상화한 상형문자, 두개의 문자를 결합해 다른 의미로 나아가는 표의문자에서 숏과 숏을 결합해 제삼의 지대에 다가가는 영화 몽타주 개념의 실체를 본다. 홍상수의 영화를 표의문자에 빗대면 그 문자는 서로 다른 이미지를 부딪치기보다는 비슷한 이미지를 부딪쳐 미궁을 짓는 편에 속한다. 감독의 영화 사상 최초의 한 글자 영화인 <탑>은 이러한 경향의 정점에 있다.

한층에 하나씩

영화는 화면 바깥에서 음악이 개입하는 순간을 기점으로 총 4개의 장으로 이뤄져 있다. 내용에 따라 각각의 이름을 붙이자면 도착, 재회, 거주, 떠남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4개의 장은 4개의 악장처럼 연속과 변주의 관계에 놓인다. 동일한 인물이 등장하지만, 장이 거듭될수록 캐릭터와 상황은 변한다. 기본적으로 시간의 선형적 흐름을 따르지만, 이것이 하나로 꿰어지는 순간 역시 존재한다. 4개로 분절된 이야기는 달리 말하면 영화의 배경이 되는 건축물과 닮았다. 옥탑과 지하를 각각 반층으로 칠 때, 건물은 대략 4개의 층으로 이뤄졌다고 말할 수 있다. 장이 거듭되면서 중심 장소는 한층씩 위로 올라간다. 1장의 대화 장면은 지하와 1층을 중심으로 드러난다. 외부로 통하는 두개의 출입문이 위치한 1층은 바깥에서 언뜻 보기에는 레스토랑처럼 보이지만, 2장과는 달리 대화에서 이에 관한 언급은 없다. 1층 내부가 드러나는 장면은 병수(권해효)와 정수(박미소)가 김 선생(이혜영)과 함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유일하다. 이들은 다시 김 선생의 작업실인 지하로 자리를 옮겨 와인을 곁들인 대화 자리를 이어간다. 2층은 선희(송선미)의 원테이블 레스토랑으로 2장의 중심 장소다. 1장에서 외국에서 온 커플이 살던 곳으로 소개된 3층은 3장에서 선희와 병수가 함께 사는 공간이 된다. 4층에 해당하는 옥탑은 미술 작가의 작업실과 옥상이 이어진 공간이다. 4장에서 병수와 지영(조윤희)은 옥상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다.

첫장에서 영화는 세 사람이 계단을 오르면서 한층씩 구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층계를 오르는 모습이 현실적인 방식으로 찍힌 데 반해, 이들이 층계를 내려오는 장면은 대부분 생략되었다. 정수는 언제 옥상에서 1층으로 내려온 것일까. 옥상에서 병수와 김 선생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던 카메라는 불현듯 혼자 떨어져 옥상 난간에 기댄 채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는 정수의 뒷모습을 비춘다. 이때 정수에게 무섭지 않냐며 말을 거는 병수의 목소리가 외화면에서 끼어드는데 정수에게는 마치 그의 소리가 가닿지 않는 듯 아무런 반응이 없다. 옥상 시퀀스는 1층 건물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는 쥴(신석호)을 보여주는 숏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담배를 빌리는 목소리가 끼어드는데, 방금 전까지 옥상에 있던 정수다. 정수는 마치 옥상에서 1층으로 단숨에 점프한 것 같다.

1장에서의 이동을 하강의 점프라 한다면, 2장에는 상승의 점프가 등장한다. 선희의 레스토랑에서 선희와 병수, 그리고 김 선생이 함께 와인을 곁들여 대화를 나눈다. 그러던 중 김 선생이 비틀거리면서 지하로 내려간다. 이 숏은 누군가가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숏이다. 테이블에 남은 선희와 병수는 영화를 사이에 둔 공감대를 바탕으로 호감 어린 대화를 주고받는다. 대화 시퀀스는 의외의 숏으로 마무리된다. 카메라는 건물 바깥에서 건물을 바라보고 있다. 잠시 후 창문을 가린 흰 커튼 뒤에서 창문과 연결된 작고 좁은 발코니로 병수가 나온다. 세팅된 카메라와 인물의 등장은 어쩐지 연극적이다. 그 뒤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비칠 때, 그 사람은 방금까지 병수와 대화를 나누었던 선희일 거라고 짐작하게 된다. 하지만 실제 모습을 보인 사람은 김 선생이다. 김 선생은 1장에 등장했던 기타를 손에 쥔 채 오늘은 꼭 노래를 불러달라고 부탁한다. 앞선 장면에서 취한 듯 비틀거리며 지하로 내려가는 모습이 등장한 이후다. 이것은 상승의 점프이자 선희와 김 선생, 두 인물간의 점프이기도 하다.

3장에서 점프는 공간에서 시간의 층위로 나아간다. 병수와 식사를 마친 선희는 병수의 반대에도 친구 준희를 만나겠다며 갑작스럽게 자리를 비운다. 잠시 후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이번에도 선희가 아니라 김 선생이다. 병수는 선희에게 문자를 보내지만, 선희가 휴대폰을 두고 나갔기 때문에 알림은 바로 뒤에서 울린다. 이것은 어쩐지 선희가 영영 실종되었거나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전조처럼 느껴진다. 병수는 침대에 몸을 던져 웅크린다. 이때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에는 선희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어서 병수의 음성이 들리면 이것이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런데 외화면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통상적인 보이스 오버가 아니라 녹음된 음성을 재생한 것에 가깝다. 눈을 슬며시 뜬 채로 누워 있는 병수는 마치 이 소리를 관객과 함께 듣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그가 꾸는 꿈이 아니다. 녹음된 사운드는 인물이 극 안에서 영화나 텔레비전을 볼 때 들릴 법한 사운드와 유사하다. 병수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마치 영화를 보듯 바라본다. 이것은 소망 혹은 기억의 발현일 수도 있고 아직 재현되지 않은 이후 시간을 혼재한 것일 수도 있다. 대부분 화면과 매끈하게 결합해 별다른 주의를 끌지 않기 마련인 보이스 오버는 질감의 변형을 통해 다른 쓰임을 찾는 듯 보인다. 현장 재생형 보이스 오버는 영화의 현장성 혹은 영화의 연극화라고 말할 수 있다. 대부분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추후에 입혀지며 현장의 배우는 목소리가 개입한다는 사실을 미리 안다고 해도, 그것의 실체나 효과는 편집이 끝난 이후에 체감하게 된다. 녹음된 목소리의 현장 재생의 목적은 배우가 목소리를 함께 듣고 있음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함께 병수가 선희에게 보내는 문자를 소리내어 읽을 때, 그가 지금 관객을 의식하고 있음을 표시한다. <탑>은 프레임 바깥으로 처리되는 것들을 프레임 안으로 끌고 들어오면서 영화 형식의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자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불가능에 가까운 동시적인 소통이라는 측면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거의 연극에 가까운 것이 되어간다.

흰 커튼, 검은 그림자

4장은 공간에 관한 통상적 감각을 교란한다. 병수와 지영이 옥상에 설치된 테이블 위에서 고기를 굽고 소주를 마시는 모습이 담긴 롱테이크숏 이후 카메라는 방 내부에서 닫힌 현관문을 바라보고 있다. 잠시 후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려는 누군가의 실루엣이 반투명 유리 뒤로 보인다. 문이 열리지 않자 그는 내부의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김 선생은 “안에 사람 있는 거 다 알아요. 왜 없는 척해요?”라고 말하는데, 이 장면이 주는 느낌은 기이하다. 프레임 안에는 김 선생 외에는 아무도 없고, 주변의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김 선생의 요청은 오직 카메라, 혹은 카메라 뒤에 위치할 관객을 향한 것처럼 느껴진다. 카메라를 사이에 둔 인물과의 대면은 전작의 유사한 장면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강변호텔> <소설가의 영화> 등 홍상수의 영화에서 창문을 사이에 둔 소통과 단절의 형상이 종종 등장했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등장인물 사이에 존재하는 것일 뿐, 관객을 직접 소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반면 <탑>에서 문 안쪽의 누군가를 소환하는 김 선생의 실루엣은 대면의 감각을 관객에게 제공한다.

이 장면의 의미는 다음 상황으로 인해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다. 소환 대상이 된 실제 인물인 병수가 뒤늦게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이 때문에 이전에 관객이 느낀 대면의 감각은 빠르게 퇴색된다. 동시에 다른 의문이 고개를 든다. 병수의 출현은 관객의 착각을 깨고 다시 영화의 리얼리티를 회복하는 움직임으로 인식될 수 있겠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병수의 몸짓은 도리어 더 큰 허구의 맥락을 껴안는다. 방금까지 병수는 옥상에서 지영과 함께 있었다. 뒤늦게 김 선생이 문을 두드리며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동했다면 그가 이동하는 소리가 필연적으로 동반되어야 한다. 두 상황 사이에 단절이 있다는 추론도 통하지 않는다. 카메라가 다시 옥상으로 돌아왔을 때 지영은 앞선 상황을 듣고 있던 것처럼 건물쪽으로 고개를 기울인 채 기다리고 있다. 김 선생의 방문 이후 병수는 다시 옥상의 지영에게로 돌아가고 그의 손에는 김 선생이 건넨 우편물이 들려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병수는 바로 문을 열지 않고 대기하고 있다가 문을 열었다. 김 선생의 말처럼 그가 일부러 없는 척하려고 기척을 내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적인 인과관계를 꿰맞출 수 있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병수가 카메라의 시야에 일부러 비켜나 있다가 나중에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다.

프레임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온 병수의 동작은 약속된 움직임이며, 그가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배우임을 인식하게 한다. 배우를 배우라고 인식하는 일은 이야기의 몰입을 방해하거나 캐릭터의 정체성을 교란하는 것일 수 있다. 반면 여기에서 배우를 인식하는 일은 병수라는 캐릭터의 정체성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가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병수라는 캐릭터를 새삼스럽게 허구나 가짜로 인식하도록 만들지 않는다. 프레임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온 순간의 병수를 연기자-캐릭터라고 말한다면, 그 존재는 관객이 온전한 배우 혹은 온전한 캐릭터 중 한쪽을 선택해 인식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든다. 여기에 인물들이 나누던 대화에서 등장한 안과 바깥, 진짜와 가짜에 관한 이야기를 적용해보자. 정수는 감독이자 아버지인 병수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사람들은 모를 거라고 말한다. 이에 김 선생은 바깥에서의 병수가 진짜 병수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안과 밖은 집의 안과 밖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생략된 말을 ‘프레임’으로 바꾸어보자. 그렇다면 프레임의 안보다 바깥이 더 진짜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것은 통념을 뒤집는 말이 아니라 통념을 반복하는 말이 된다. 대부분은 ‘프레임’이 의미하는 카메라 안쪽에서보다 카메라 바깥의 모습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아가 영화에서 프레임 바깥이란 엄밀히 말해 존재할 수 없다. 프레임 바깥을 보여주는 이상 영화는 이전과 다른 것이 된다. 가령 영화는 종종 카메라 밖의 현장 스탭을 노출하면서 프레임 바깥을 보여주지만, 이것의 실제 효과나 기능은 대개 모호하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자기 반영성이라는 무의미한 말만을 반복하게 만들 뿐 그 자체로 보이는 것 이상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영화의 틀을 깨지 않고 프레임의 밖을 인식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보이스 오버 같은 사운드를 통해 외부를 자극하거나, 프레임 안에서 밖으로 시차를 둔 이동을 새기는 방법 정도가 가능하다. 이를 통해 단절된 것이 연결되고, 연결된 것은 잠깐의 시차를 통한 간격이 생성된다. <소설가의 영화>는 홈비디오 혹은 푸티지에 가까운 영상을 영화의 형식 안에 포함하면서 프레임 바깥을 자극했다. <탑>은 건물의 구조 속에서 프레임의 안과 밖을 교란할 움직임을 발견한다.

연속하는 불연속

초반을 제외하고는 드러나지 않는 계단은 가장 낮은 층부터 가장 높은 층까지 연속해서 이어진 사물이지만, 영화가 계단의 연속성을 보여주기란 불가능하다. 가능한 방식은 계단을 오르는 사람을 팔로숏으로 찍거나 카메라가 한명의 캐릭터가 되어 계단을 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숏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홍상수의 카메라는 인물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대부분 고정된 채 찍는다. 공간이 좁기 때문에 카메라는 계단을 마주 보는 곳에 미리 세팅돼 있다. 카메라는 지하와 2층으로 연결된 1층 계단을 마주하고 놓여 있다. 닫힌 문을 열고 인물들이 한명씩 모습을 나타내고 잠시 계단에 머문 뒤 층계를 오르며 사라진다. 카메라 세팅과 인물의 등장 사이에는 간격이 존재하며 인물을 놓치고 다시 찾는 순간이 필수적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카메라는 인물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인물들이 먼저 장소에 도착해야 옳다. 연속성을 위해 다음 층에서는 미리 도착한 인물을 보여주는 것으로 족하다. 하지만 다음 숏에서 카메라는 먼저 도착해 있고 인물들은 나중에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는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머문 뒤, 다시 다른 층계에서 소리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다. 다음 층계에 도착하기까지 몇번의 회전을 거쳐야 하는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사라진 몸을 다시 찾기까지의 시간의 간격은 실제의 움직임보다 깊은 우물처럼 체감된다.

이같은 방식으로 연속된 동작을 단절된 것으로 체감하게 하는 동시에 연속성이 요구되지 않는 순간을 연결한다. 클로징 시퀀스에서 병수는 지영과의 계획이 틀어지면서 건물 앞에서 홀로 담배를 피운다. 이때 1장에 등장했던 병수의 자동차가 화면을 가로지르며 등장한다. 운전석에서 내린 쥴은 손님의 주차 문제로 잠시 자동차를 옮긴 뒤 다시 가져다놓았다고 말한다. 그 장소에 놓였던 유일한 다른 차는 3장에서 선희의 자동차였으므로, 펼쳐진 시간이 인물의 대사를 통해 다시 축약되는 셈이다. 자동차는 일종의 프레임 속 프레임처럼 건물 바깥에 다른 바깥이자 다른 내부를 만든다. 병수는 자동차에 잠시 타서 시동을 켰다가 다시 끄고는 차에서 내린다. 그러자 시간과 함께 인물이 회귀한 것처럼 1장 이후에 사라졌던 정수가 와인을 사기 위해 사라진 언덕을 다시 거슬러 올라오면서 1장에서 끊어진 동작을 마주 잇는다.

이러한 방식의 시간의 혼재는 오늘날 블록버스터영화에서 기본 개념처럼 탑재된 멀티버스의 가장 미니멀한 적용 정도로 풀이될 수 있다. 반면 영화에서 느껴지는 연극성은 멀티버스라는 용어 이전에 존재했을 기원에 대한 생각으로 이끈다. 이를테면 관객의 자리가 고정된 연극에서는 하나의 장소 안에 소품과 의상과 인물의 변화에 의해 수많은 장소와 시간이 혼재하게 마련이다. 때로는 한 인물이 분장을 바꾸며 다양한 인물을 연기하고, 반대로 서로 다른 인물들이 하나의 캐릭터를 연기하기도 한다. 그로 인한 모든 혼란을 관객은 즐겁게 받아들인다. 연극을 본다는 것은 관객과 배우 혹은 제작진 사이에 즉흥적으로 맺어지는 약속과 같은 것이었다. <탑>에서 카메라가 놓인 곳에 배우가 나타나 연기를 하는 방식이 자극하는 연극성은 어쩌면 관객과 새로운 약속을 맺기 위한 다중의 신호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지금 관객에게 무언가에 대한 용인과 참여를 갈구하고 있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관객을 필요로 하는 영화는 희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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