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재호의 대사량이 많다. 그중 상당수가 영어인데.
=영어 대사가 진짜 어려웠다. 배우는 말을 가지고 노는 사람이다. 모국어는 말의 속도를 조절하고 호흡을 넣는 게 어떤 의미인지 또 에너지를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소리를 작게 질러도 파급력이 달라진다는 걸 안다. 말하자면 대사의 뉘앙스로 관객과 심리 싸움을 하는 건데 영어는 그게 안되니까. 내 걸로 소화되지 않고 녹음한 걸 로봇처럼 재생하는 느낌이었다. 정재호의 입장에서 이게 재호 같은지 아닌지 계속 따져봐야 하는데 영어 대사를 할 땐 정재호가 사라지고 황정민이 영어를 어떻게 하냐로 기우는 느낌이라 신경이 많이 쓰였다. 그렇게 고생해놓고 돌아와선 또 <수리남>을 찍긴 했지. (웃음) (<수리남>에서 황정민이 연기한 전요환도 영어 대사가 있다.-편집자)
-대식은 현지 경험이 많은 국정원 요원이다. 그럼에도 재호가 그의 의견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서로 합을 맞춰나가기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 첫 만남에서도 재호가 대식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데, 그 이유에 관해 생각해봤나.
=첫 만남 땐 대식이가 너무 예의 없었다. (웃음) 급한 상황인 건 맞는데 서로 통성명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안 그래도 시간이 부족한데 대식의 말에 귀 기울일 새가 없었다. 게다가 재호는 그런 친구들을 수없이 겪어왔을 거다. 대식이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으로서 재호는 중립을 지키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다 결국 동료로서 서로를 존중하게 된다. 그건 아마 같은 상황에 놓였다는 동질감 때문일 텐데.
=그게 제일 컸을 거고, 아프가니스탄에 계속 머문 대식이에 대한 애잔함도 있었을 거다. 그리고 나는 카심(강기영)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카심이 없었으면 재호랑 대식이가 훨씬 데면데면했을 텐데 둘 사이에서 좋은 연결 고리가 되어줬다.
-배우 강기영, 현빈과 합은 어땠나. 현빈과 친분은 두텁지만 일로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빈이도 기영이도 다 처음이었다. 사석에서 만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설렘이 있다. 뭐랄까, 궁금한 거다. 저 사람이 대식과 카심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정재호는 나 혼자 만드는 게 아니다. 상대의 에너지를 받아 만들어지는 면면이 있고, 또 셋이 모였을 때 발생하는 에너지가 있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과 함께 연기하는 게 굉장히 설렜다. 잘생겨서 설렜다는 건 아니다. (웃음)
-설레는 마음을 안고 현장에서 만나보니 어떻던가.
=기영이도 아프가니스탄의 파슈토어를 새로 배워야 해서 고생을 많이 했다. 영화를 찍다 보면 붕 뜨는 신들이 있지 않나. 이번에도 극중 통역할 때 딜레이되며 발생하는 빈틈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기영이한테 “파슈토어로 애드리브 좀 해봐라” 했다. 그럼 “제가요?” 하며 당황한다. (웃음) 보기보다 위트 있는 매력적인 친구다. 그리고 빈이는 대단히 끓이기 힘든 뚝배기 같은 느낌이 있다. 나는 냄비인데. (웃음) 내가 확 끓어오르는 타입이라면 빈이는 잔잔히 오래가는 타입이다. 티 내지 않고 현장 한쪽에 있다가 제 몫을 딱 해주는 묵직함이 있다. 그래서 나랑 죽이 더 잘 맞은 것도 있다.
-배우 황정민도 살면서 협상을 해본 기억이 있나.
=…협상…. (곰곰이 생각하다) 딱히 없다. 내가 하고 싶은 건 굽힘 없이 다 해본 것 같다. 작품을 택할 때로 경우를 좁혀보자면, 작품을 고르기 전까진 나 자신과 협상하고 타협하는 과정이 반복되긴 한다. 내 인생에서 이 작품을 만나는 건 처음이자 마지막일 테니까 매번 신중하게 타협해나간다.
-뮤지컬과 연극 무대에 꾸준히 오르고 있다. 2018년부턴 <오이디푸스> <리처드 3세> 등의 고전극 중심으로 참여하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 내가 학생이었을 땐 조지 오웰, 사뮈엘 베케트, 에밀 졸라 등의 작품이 대학로에서 수시로 공연됐다.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며 공부가 많이 됐는데 지금 연기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겐 그럴 기회가 없다. 그래서 일부러 택한 게 크다. 동시에 고전극은 재미없다는 편견을 깨고 싶었다. 고전극엔 시적인 대사가 많아 발음과 발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무대에 오르는 배우 입장에서도 배우는 게 많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지만 공연은 배우의 예술이다. 무대에 오르면 “컷!”을 외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2~3시간 동안 호흡을 이어갈 때의 쾌감이 있다. 그리고 오는 관객이 매번 달라서 같은 극을 올려도 매년, 매달, 매회 공기가 다 다르다. 그에 따라 나의 연기도 달라진다. 그런 차이들이 재밌다.
-예고 시절에 직접 친구들과 뮤지컬 공연을 올렸고 대학생 때 무대미술도 했었다. 현재도 작품의 전체 그림을 계속 그려보며 연기한다는 인상이다. 이 정도면 연출에 대한 욕심을 낼 법도 한데.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전혀. 그러면 단명할 거다. 내가 보기보다 꼼꼼해서 하는 나도 힘들고, 같이하는 사람들도 힘들 거다.
-차기작으로 영화 <크로스>와 <서울의 봄>이 예정되어 있다.
=<서울의 봄>도 김성수 감독님과 두 번째로 함께한 작품이다. 어제 후시녹음을 했는데, 영화가 정말 세다. 접근하기 쉽진 않았지만 재밌게 촬영했다. 팝콘 무비 한번 해보자고 해서 시작한 <크로스>도 무사히 촬영을 마쳤다. 구정 전에 <교섭>이 스타트를 잘 끊어준다면 <크로스>와 <서울의 봄>도 차례차례 잘 개봉할 수 있지 않을까. 꼭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