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김은숙 월드의 주민들이 ‘더 글로리’를 본다면
2023-01-12
글 : 유선주 (칼럼니스트)
문동은과 함께한 모든 날이 좋았다

김은숙 월드의 주민들이 모여 전에 없이 서늘한 복수극 <더 글로리>를 이야기하는 날. 저마다 가장 좋은 자리에 앉겠다고 작은 소란이 일었다. <파리의 연인> 한기주는 시청률 순으로 앉아야 한다, <도깨비> 김신은 나이 순이 옳다 다투던 중, 가마에서 내린 <미스터 션샤인>의 고애신이 정해진 자리를 찾아가듯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아 소란은 일단락. 진행을 맡은 <파리의 연인> 강태영이 일어서서 리모컨으로 넷플릭스를 켜며 말한다. “<시크릿 가든> 김주원씨는 갑자기 트라우마가 도졌다고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올라오는 중이라 조금 늦으신다네요.” “어이, 거기 ‘핑크’는 좀 앉지.” 화면을 가린다는 한기주의 불평에 참석자들이 다시 술렁였다. “학교 폭력 가해자 전재준 콤플렉스잖아.” “이 자리에 있었으면 개싸움이 났겠네.” 마침 김주원이 도착해 가쁜 호흡을 고르며 불평을 터뜨린다. “여기 대체 몇층이야.” “오셨네. 사회 지도층. 자 이제 시작해볼까요?”

<더글로리>안에 <파리의 연인>있다

<파리의 연인> 강태영 그거 아세요? 문동은이 회고하는 가장 끔찍했던 시절의 시작 ‘2004년 여름’은 6월부터 8월까지 <파리의 연인>이 방영되던 즈음이었어요. 저의 세상이 예상 밖의 로맨스로 가득했던 그때, 동은이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지독한 학교 폭력 피해자가 되어 고등학교를 자퇴해야 했어요. 처음엔 우연인가 했어요. 그런데 가해자 무리 중 한명인 이사라가 “파리에서 <파리의 연인> 봤다”고 해서….

<태양의 후예> 강모연 학폭 주동자 박연진이 남편이 사준 세명시 고급 주택을 “낮엔 되게 비싸 보이고 밤엔 겁나 비싸 보여”라고 하는데 저도 소름이 끼쳤어요. 유시진 대위가 제게 했던 말과 비슷해서요.

강태영 뭐라고 했었죠?

강모연 “오전엔 되게 예쁘고 오후엔 겁나 예쁘”다고요.

강태영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를 쭉 지켜봤는데 이전 작품의 인용이 꽤 많아요. 새 드라마가 나올 때마다 세계는 연결되고 확장되죠. 그래서 저는 제 시간과 문동은의 시간을 겹쳐 보게 되고요.

<미스터 션샤인> 고애신 내가 살았던 조선은 격변의 시대, 또 낭만의 시대이기도 했소. 개화한 이들이 가배와 불란서 양장을 즐기기도 했지. 나도 변복과 차별을 두려고 평상시엔 장신구를 하는 편이오만, 작금은 소비의 시대인가 보오. 따라잡기 어렵겠소. 샤넬, 구찌, 디올, 펜디… 어찌 그리 입고 두르고 신는 것마다 이름을 따지는지.

<미스터 션샤인> 유진 초이 그런 것 치고는 참 많이도 알고 있소.

고애신 오해요. 아무것도 모르오.

넷플릭스가 아니었다면?

<시크릿 가든> 김주원 나도 브랜드명을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있었다면 매번 “이태리에서 40년 동안 트레이닝복만 만든 장인이 한땀 한땀 수놓은 작품”이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강모연 웹드라마라 브랜드명 언급도 자유롭고 넷플릭스 제작으로 간접광고 부담이 없는 건 꽤 부러워요. 저는 술을 잔뜩 마신 다음날 해장으로 ‘그’ 샌드위치를 먹었다고요. <더 글로리>가 지상파나 케이블 방영이었다면 문동은도 은박지 김밥 대신 로고 찍힌 샌드위치를 먹었을걸요.

<도깨비> 김신 나도 파리에서 가정 폭력으로 가출하려던 한 소년을 학교로 보내면서 도시락으로 그 샌드위치를 건넸지.

강태영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복수에 몰두하는 동은이 빵과 소스를 고르고 채소 뭐 빼주세요 하고 있으면 그건 캐릭터 붕괴 아닐까요?

강모연 <태양의 후예>에서 서대영 상사가 사람 목숨보다 다이아몬드부터 찾겠다는 놈에게 욕설 한번 했다가 지상파에 부적합하다고 난리가 난 적이 있어요. <더 글로리>는 넷플릭스라 그런지 욕설도 거침없어요. 이사라가 문동은에게 “대가리에 국영수 좀 채웠다고 아주 ××년이 됐네”라고 하던데 문동은이 “먼저 일어날게. ××년이 다음 일정이 있어서”라고 가볍게 받아쳐서 속이 다 시원했어요.

고애신 상스러운 언동에 귀하가 후련할 건 또 뭐요. 용모가 닮아 그렇소?

강모연 유시진씨가 왜 의사가 되었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저도 “국영수를 잘해서요. 특히 수학.”

고애신 나도 “잉글리시를 영 모르지는 않네.” 직물 공장에서 숙식하며 틈틈이 익히던 종이 묶음에 적힌 단어 중에 ‘glory’가 있더군. 내가 처음 배웠던 단어일세. “건, 글로리, 새드 엔딩.” 참,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네. 새로 얻은 집 벽에 원수의 사진을 붙이던데, 손에 들고 있는 은색 물건은 신식 총인가? 타앙 타앙 하는 소리가 총소리 같아서 하는 말일세.

유진 초이 자동으로 못 박는 기계요. 편하오.

<더글로리>에서 뒤집힌로맨스

강태영 우리 <더 글로리> 명장면을 뽑아보기로 해요.

고애신 벚꽃이 흩날리는 봄밤. 사모님과 이모님, 죽음을 공모한 두 여인이 동지가 되는 그 밤이었소.

<파리의 연인> 한기주 문동은은 강현남이 눈치가 빠른데 인내심까지 있는 걸 알아봤고, 강현남은 문동은의 뭘 해도 할 것 같은 성실함을 평가하지. “이용하는 거야. 비즈니스 차원으로.”

김주원 “확실해요?”

한기주 “내가 서툴러서 이렇게밖에 말을 못해.”

강태영 저 사람이 도덕 시간에 졸았대요. 현남 이모님이 문동은에게 포스트잇으로 메모를 남기고,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모습이 저랑 닮지 않았나요? 명랑한 점도 그래요. 동은이에게 이모님은 방심하고 웃게 하는 사람. 너무 가까워질까 두렵기도 한 사람이잖아요. 로맨스 분위기가 폴폴 나요.

강모연 둘의 관계에 그런 뉘앙스가 있는 건 맞아요. 반대로 이전의 김은숙 작가 드라마에서 로맨스의 맥락 안에 있던 행동들, 상대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신체 접촉 모두 지독한 폭력으로 다시 쓰였어요.

강태영 맞아요. 전재준에게 손목을 잡힌 동은이가 화장실에서 구토를 했죠.

<프라하의 연인> 윤재희 카메라 다루는 게 서툴던 이모님이 플래시를 터트리자 문동은씨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장면 기억해요? 저도 예전에 플래시로 최상현 형사를 놀래킨 적이 있어요. 그때 이렇게 말했죠. “사랑은 카메라 플래시처럼 한순간에 팡 터진다고. 마음의 준비를 했든 안 했든 아주 잠깐은 눈앞이 캄캄하다고.”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뭐든 사랑의 징조로 해석하게 돼요. 하지만 같은 상황이 아주 다른 맥락 안에서는 무서운 기억을 떠올리는 트리거가 될 수도 있는 거였어요.

김은숙월드의 편지,쪽지,문자

강태영 이전과 다른 맥락으로 쓰이는 것으로 ‘편지’도 있어요. 편지는 문동은이 박연진에게 다가가는 동안의 기록이고, 수신인이 정해져 있어서 아직 보내지 않았어도 언젠가 날아가 박힐 칼날 같아요.

<미스터 션샤인> 김희성 “글에는 힘이 있소. 누군가는 기록해야 하오. 애국도, 매국도, 모두 기록해야 하오.” 학교 폭력도, 복수도 모두 기록해야 하오.

고애신 오늘 모임의 기록을 맡으셨으니 계속 적으시오. 나는 총포로 할 것이오.

유진 초이 우리의 편지는 유서이자 연서였소.

김주원 사회 지도층인 내가 소외된 이웃 길라임씨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썼던 편지도 그랬지.

김신 나 역시. 그리고 도깨비 신부 은탁이에게 ‘시간 날 때 검 좀 뽑아달라’고 쪽지도 숱하게 썼지.

윤재희 정도가 지나치면 문제가 되죠. 상현씨가 덕수궁 돌담길에 전세계 각국의 언어로 사랑한다는 말을 적은 쪽지를 붙여서 청혼했다가 물의를….

강태영 편지나 쪽지는 쓰는 사람의 시간과 받을 사람에게 도착하는 시점의 어긋남 때문에 절절해지기도 해요. 보내면 바로 확인하는 핸드폰 메시지는 그런 맛이 부족하죠.

강모연 그 어려운 걸 해낸 사람이 있어요. 유 대위가 작전 중 사망했다는 소식과 유서를 받고도 전 가끔씩 핸드폰에 문자 메시지를 보냈어요. 그러다 그 사람 기일에 읽지 않음이었던 메시지가 읽음으로 바뀌길래,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죠. 문동은에게 바둑을 가르쳐준 주여정 선배도 7~8년 동안 문자를 보내다 느닷없이 답장을 받고 얼마나 놀랐을지.

김주원 그 답장이 ‘시알리스’ 사진이라니. 정말 어메이징한 여자야.

고애신 시알리스? “시 유 어게인” 같은 인사말인가 보오.

김희성 누군가는 기록을, 모두 기록해야….

고애신 멈추시오. 지우시오.

문동은이라는 사람

강태영 열여덟의 문동은이 서른여섯이 되어 박연진 앞에 나타나 말하죠. “여기까지 오는데 우연은 단 한줄도 없었”다고. 다들 알다시피 김은숙 월드에는 참 잦은 우연과 운명이 닥치잖아요? 현남 이모님이나 여정 선배와의 만남은 분명 우연에 속할 텐데도 문동은의 저 말은 하나도 오만하게 들리지 않았어요.

윤재희 계획적이고 성실하고 우연도 설계하는 사람이라서?

김신 신이 없는지 있는 척하는지, 신이 나를 돕는지 아닌지에 관해 계속 말하는데 그는 신에게 의지하거나 원망하는 이가 아니더군. 그저 신이 있다면 a, 신이 없다면 b라는 옵션을 둘 뿐.

고애신 살피며 준비하는 그 길이 얼마나 고단했겠소.

유진 초이 오래전 스승을 찾아가 선생님이 되었다고 하던 모습이 생각나오. 그자는 네가 대학에 갔느냐고 놀라더군. 노비의 자식인 내가 미국인이 되어 조선에 돌아와 부모의 원수를 찾아갔던 그날 받았던 눈빛이었소.

김신 우리 은탁이를 차별하던 담임선생이 생각나더군. 졸업식 날 삼신이 은탁이에겐 목화 꽃다발을 건네고, 그 담임에게는 이렇게 말했지. “아가, 더 나은 스승일 수는 없었니, 더 빛나는 스승일 수는 없었어?”라고. 적어도 문동은 그 아이는 제가 겪은 스승보다 낫고, 빛나는 스승이 되지 않을까 하는데.

고애신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그를 지켜볼 작정이오. 이젠 정말로 인사를 고하오. 나머지 이야기를 만나는 3월에 시 유 어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