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뉴스]
바벳 슈로더 감독의 스릴러 <머더 바이 넘버> [1]
2002-06-04
글 : 옥혜령 (LA 통신원)

은밀한우정,살인교본을 실행하고 자멸하다

관광객으로 북적대는 맨해튼 타임스퀘어의 AMC 극장, 프렌치 뉴웨이브의 산증인이기도 한 바벳 슈로더의 새 영화를 보기에는 어딘지 마뜩하지 않은 장소인 듯싶었다. 그러나 한편 샌드라 불럭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팝콘과 샌드위치를 하나씩 받아들고 참석한 시사회장의 풍경도 낯설지 않았다. 지난 3월 말, 해외 기자들을 상대로 첫선을 보인 바벳 슈로더 감독, 샌드라 불럭 주연, 제작의 심리스릴러, <머더 바이 넘버>는 그렇게 약간은 기묘한 조합으로 다가왔다. 이 ‘기묘함’은 어쩌면 두 스타급 배우와 감독의 이름에서 오는 선입견 탓인지도 모르지만, 시사회와 정킷 내내 영화사의 기억들과 또 다른 가닥으로 꼬여서 나타났다. 바벳 슈로더 감독은 22살에 파리에 영화사를 설립한 이래, 장 뤽 고다르, 자크 리베트, 에릭 로메르, 빔 벤더스 등 거장들의 영화를 제작했을 뿐 아니라, 27살에 감독 데뷔한 이후 3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도발적인 문제작들을 만들어왔다. 에릭 로메르의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 빔 벤더스의 <미국 친구> 등 등장인물들간의 심리적인 긴장과 갈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바벳 슈로더표’ 영화들이다.

히치콕식 스릴러와 할리우드 범죄영화의 조우

그러나 한편 바벳 슈로더의 필모그래피에는 그를 1990년 아카데미상 감독상 후보에 올린 <행운의 반전>을 비롯해서 당대 유수의 여배우들이 출연한 할리우드산 영화도 반 이상을 차지한다. <머더 바이 넘버> 제작을 위해 슈로더 감독은 30년간 함께 작업해온 제작자 수잔 호프먼, 촬영감독 루치아노 토볼리 등 <행운의 반전> 팀을 한자리에 다시 모았다. 미칼란젤로 안토니오니작 <패신저>의 7분 롱테이크 엔딩신으로 유명한 루치아노 토볼리를 비롯한 이 백전 노장팀에 할리우드의 스타, 샌드라 불럭이 실무 제작자로 동참했으니 이들의 조합이 잠시 어색해 보인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머더 바이 넘버>는 정작 뚜껑을 열자 예상치 못한 또 하나의 신선한 조합을 선사했다. 말 그대로 혜성처럼 나타난 할리우드의 기대주, 리처드 고슬링과 마이클 피트의 앙상블 연기가 바로 그것이다. 영화의 제목 ‘머더 바이 넘버’는 굳이 말하자면 교과서식 살인, ABC에 따라 저질러진 형식적인 살인을 의미한다. 여기 그림 같은 풍경과 스페인풍 집들이 어우러진 남부 캘리포니아의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마을, 부모들의 재력으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지만 자신들만의 폐쇄적인 세계를 살아가는 두 고등학생이 있다.

유들유들하고 냉소적인, 그러면서도 자신의 매력을 철저히 이용할 줄 아는 악동 리처드 헤이우드(라이언 고슬링)와 내성적인 천재형의 저스틴 팬들튼(마이클 피트)은 제목처럼 아무 이유 없는 완벽한 살인을 꿈꾼다. 영화는 살인으로 표현되고야마는 두 사람의 비밀스런 우정과 살인사건을 둘러싸고 강력반 여형사(샌드라 불럭)가 벌이는 두뇌싸움을 반쯤은 히치콕식 스릴러로, 반쯤은 할리우드 범죄영화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억압된 동성애의 욕망이 낳은 역사 속 살인사실 파멸로 이르는 동성끼리의 폐쇄적인 우정은 영화사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소재다.

1924년 전 미국을 경악시킨 레오폴드와 롭 살인사건은 히치콕의 <로프> 이후 래리 클락의 최근작 <불리>에 이르기까지 변주를 거듭해서 영화화되어왔다. 부유하고 똑똑한 두 은 남자가 아무 이유 없이 완벽한 살인을 계획한 사건의 이면에는 실상 억압된 동성애의 욕망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 히치콕의 해석이자, 오늘날까지 이 사건을 흥미있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표면적으로 동성애적인 요소가 드러나지는 않지만 결핍의 궁지에 다다른 두 영혼이 서로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는 이 어려운 관계를 라이언 고슬링과 마이클 피트는 섬뜩하게 연기해낸다.정반대인 캐릭터의 성격만큼이나, 서로 다른 지점에서 출발한 그들의 성장 배경만큼이나 그렇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두 젊은 배우는 기자회견장에서 단연 화제의 초점이었다.

성전환 로커의 아픔을 그린 <헤드윅과 앵그리 인치>의 토미 그노시스, 마약과 섹스 그리고 살인까지 대책없이 즐기는 <불리>의 생각없는 10대, 저스틴의 병적인 수줍음까지 마이클 피트가 맡은 역할들은 뉴저지 출신의 이 수줍은 배우와 그대로 닮아 있었다. 난독증과 우울증으로 간신히 헤쳐나온 고등학교 시절, 잘하는 건 연기뿐이라 빈손으로 뉴욕에 상경한 마이클 피트는 한때 차이나타운의 닭장 같은 노동자 아파트에서 기거하며 연극무대를 기웃거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오디션용 대본을 읽지 못해 그대로 외워서 혹은 느낌으로 연기를 할 수밖에 없어서 오히려 천재소리를 듣던 일화가 말해주듯, 우물거리는 외면 속에 불붙은 다이너마이트를 감춘 자의 모습을 한 마이클 피트를 보고 슈로더 감독은 다른 배우를 져스틴 역에 생각할 수 없었다고 했다. 어딘가 길 잃은, 그러나 생각 많은 10대의 모습이 딱 어울리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라이언 고슬링은 천상 리처드의 모습이었다.

연극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출발한 마이클 피트와 달리 라이언 고슬링은 일찌감치 연예계에 발을 디딘 아역스타 출신이다. 12살 때 브리트니 스피어스, 엔싱크의 멤버들과 함께 ‘미키 마우스 클럽’으로 시작해서 몇몇 TV 시리즈에도 모습을 드러낸 경력자답게 세련된 화술과 말끔한 매너로 기자회견장을 압도했다. 그러나 그가 반짝스타로 사라지는 아역스타에 머물지 않았음은 <빌리버>로 2001년 선댄스영화제 그랜드 쥬어리상을 수상한 경력이 입증한다.신들린 듯한 10대 유대인 나치 역으로 런던비평가협회, IFP 스피릿 남우주연상까지 석권한 라이언 고슬링은 <머더 바이 넘버>에 이르기까지 유독 복잡하고 어려운 인물만을 골라 연기해왔다.

슈로더 감독이나 마이클 피트가 두 소년 사이의 동성애적인 관계를 부정한 것과 대조적으로 동성애적인 정서가 이 절망적인 주인공들의 우정에 잠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든지, 영화의 초점은 정작 살인을 저지른 뒤에 발생하는 실제적인 휴유증이라든지, 인디영화 할 때와는 다르게 집중력은 좀 떨어지지만 좀더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게 스튜디오영화의 장점이라든지 모든 질문에 일목요연하게 유머까지 곁들여 대답하는 태도가 샌드라 불럭의 말처럼 노회한 베테랑이다.어두운 이면을 지닌 여형사, 샌드라 불럭두 젊은 배우들의 신선한 조합이 노장들의 손끝에서 재탄생한 <머더 바이 넘버>의 마지막 열쇠를 쥔 주인공은 샌드라 불럭이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샌드라 불럭은 전작 <미스 에이전트>를 거쳐 5번째로 제작에 참여했다. 잠시도 쉴새없이 상담치료의 사회적 유효성이라든가 한참 가십에 오른 휴 그랜트와의 염문설에 대해 능수능란한 말솜씨로 좌중을 압도하던 제작자 샌드라 불럭은 개성있는 여주인공 캐릭터를 영화의 묘미로 쳤다. 제작진이 인정하듯이 <머더 바이 넘버>의 기묘한 마지막 가닥은 여주인공 캐릭터와 얽혀 있다.어두운 과거사를 가진 형사가 자신도 모르게 사건에 말려 들어가는 험프리 보가트식 누아르 캐릭터는 전적으로 남성들의 몫이었다. 항상 여주인공 역할을 비중있게 그려온 슈로더 감독은 40년대 누아르영화에 등장하던 팜므 파탈의 이미지와 끝내 미워할 수 없는 암울한 형사의 이미지를 결합시켰고, 샌드라 불럭은 이 복잡한 여형사 역할을 환영했다. 그리하여 <스피드>의 여주인공은 첨단 범죄수사학과 어두운 과거로 무장한 변종 여형사가 되어 젊은 얼굴로 부활한 고전적인 살인 미스터리와 마주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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