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서는 더이상 해결이 안 난다
<김과장> 때는 “힘들어도 사람답게 살면서 버티자”였다면 <열혈사제> 때는 “왜 여러분은 성당에 와서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요? 자신들이 잘못한 사람들한테 가서 용서부터 받고 오세요”라며 강한 어조로 세상을 질타합니다. 급기야 <빈센조>에서는 “악마가 악마를 괴롭힌다”는 기조로 타락한 것들을 향해 칼날을 들이밀어요. 주인공의 행동이 통쾌할수록 점점 비관적으로 보이는 건 착각일까요.
= 결국 글은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대한 화답입니다. 세상이 점점 나빠지고 있으니 내 리액션도 거기에 맞춰서 커진 거죠. <김과장> 때는 그래도 일말의 낙관이 있었다면 <빈센조>를 쓸 때 즈음엔 회의적이랄까, 비관론에서 벗어나기 힘든 상황이 됐어요. 계기를 고백한다면 노회찬 의원(전 정의당 국회의원)이 돌아가셨을 때 크게 바뀐 것 같아요. 마피아라는 일종의 장르적 판타지를 택한 건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반작용인 셈이죠. “과정의 올바름을 믿다가 놓쳐 버린 것이 너무 많아. 이제 너희를 응원하지 않을 거야”라는 나름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제 햄릿형의 성장형 주인공은 더이상 그리고 싶지 않아요. 답답하니까요. 어쩌면 <빈센조>의 과격한 판타지는 작가로서 내가 느낀 낙담의 끝이기도 합니다. 나쁜 놈들은 너무 강하고 이제는 웬만큼 성장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거든요. 그 절망의 끝자락에 빈센조라는 마지막 답변이 나왔습니다. <빈센조>를 마치고 난 뒤엔 더 강한 저항이 가능할지, 의미가 있을지 고민 중입니다. 그래서 준비 중인 차기작은 (<열혈사제2>를 제외하고) SF예요. 지금 현재에서는 더이상 해결이 안 나니까 할 이야기가 없더라고요. 준비 중인 작품은 2058년이 배경인데, 미래에 민주주의, 법치주의가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상상해보는 중입니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어느 쪽이든 지금 현실의 그림자가 투영될 건 분명합니다. 지금 현실에 필요한 이야기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더 선명하게 하고 싶어서 택한 SF니까요.
에필로그
박재범 작가의 작품은 쉽고 재미있다. 긴 인터뷰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재미있는 내용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 단단한 시선과 오랜 고민, 묵직한 깊이가 필요하다는 진실 말이다. 인터뷰 말미 좋은 이야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투박한 질문을 던지자 그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극본”이라고 명확한 답을 내놓았다. “이야기는 식빵에 잼을 골고루 바르는 작업이다. 어디를 먹어도 그 잼을 먹을 수 있게 잘 펴 바르는 게 상업예술이라면, 순수예술은 특정 부위에 발라서 사람들이 그 부위를 발견하도록 이끈다. 우열의 문제는 아니지만 나는 누가 봐도 즐겁고 재미난 글을 쓰고 싶다.” 즐거움과 대중성에 대한 박재범 작가의 확고한 태도는 역설적으로 그가 누구보다도 단단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다시, 좋은 이야기가 무엇인가. 정의 내리긴 쉽지 않다. 다만 분명한 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야기는 예외 없이 시대와 호흡한다는 사실이다. 박재범 작가의 작품이 그렇다. “시대의 가려운 곳을 확실히 긁어주는 효자손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그의 마지막 말이 유난히 미더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