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가 자기 마음대로 구는 순간을 기다린다
서숙향 작가는 2002년 KBS 극본 공모에 당선되며 드라마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대체로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작가들이 상금으로 작업용 노트북을 마련할 때, 그는 유유히 PC방을 찾았다. 현재 사용 중인 PC 역시 <파스타> 전부터 쓰고 있는 고물이다. 핸드폰도 여기저기 금이 간 지 오래다. 작가는 말한다. “그때 제 안에 묘한 경계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인터넷 자료에 매몰되기 시작하면 제 색깔과 시간을 잃어버릴까봐. 인턴 작가들은 1년 동안 매달 1편씩 단막극을 써야 했는데, 온라인에서 남의 소재를 끌어오지 말고 오직 내 안의 땅굴만 파고 또 파서 1년을 버텨보자는 심정으로 매달렸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렇게 내 안을 쳐다보겠나 하는 심정으로요.”
- 배우 공효진의 생활감 넘치는 연기로 대표되는 일상적 구어, 속사포 같은 말하기가 서숙향표 대화의 특징입니다. 대사 쓰기의 원칙이 있을까요.
= 더이상 뺄 것이 없을 때까지 빼겠다는 생각으로 한 문장, 한 대사를 짧게 쓰다보면 오히려 대사들의 행간이 살아납니다. 한 사람이 툭 던지면, 상대방이 슬쩍 받아내는 대사 사이의 공기를 만들어내는 재미로 써요. 드라마를 20년 이상 쓰면서 대본, 연기, 연출의 3박자가 잘 맞는 순간이 얼마나 행운인지 새삼 감사하게 됩니다. 서로 소통이 잘 안되면 대사의 묘미를 살리기 어려운 경우도 생길 수 있으니까요. 각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이 무엇일지 늘 고민되는 건 사실이에요.
- 만년 구박이나 받는 셰프 지망생 서유경(<파스타>), 온갖 설움과 수모를 견디면서도 아나운서가 되고 싶은 기상 캐스터 표나리(<질투의 화신>)는 공효진의 청춘이었습니다. <별들에게 물어봐>에선 이제 카리스마 넘치는 원정대장으로 변모했죠. 세월을 함께했으니 대본을 쓸 때 그의 목소리와 말투가 자동 재생될 것 같은데요.
= 배우를 미리 상상하며 쓰는 스타일은 못 돼요. 그러지 않으려 노력하기도 하고요. 제가 캐릭터를 독자적으로 구축해놓으면 이후에 배우가 자신의 해석대로 더하고 빼면서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길 바라요. 서로의 영역이 있는 거죠. 공효진 배우는 이제 저와 제작에 필요한 여러 현실적인 여건들까지 함께 논의하는 프로 중의 프로죠. 언제나 변화에 열려 있는 사람이고, 무엇보다 제가 의도한 대본의 행간을 가장 정확하게 구현하는 사람입니다.
- <질투의 화신>에 이어 <기름진 멜로>에서 호흡을 맞춘 이미숙, 박지영 배우 역시 톡톡 튀는 대사들을 스타카토로 경쾌하게 소화해내죠.
= 전 두분을 믿고 그래서 대사를 어마어마하게 써놓는 편입니다. 지문과 설명은 최소화하려는 편인데 가끔 ‘(컷을) 나누지 말고 배우가 한번에 소화하게 해주세요’라고 써놓을 때는 있어요. 혼자 떠드는 장면으로 A4 용지 2장까지 써본 것 같네요. 이게 가능한가? 배우들이 볼멘소리 할라치면 저는 슬쩍 딴 데 봅니다. (웃음) 특히 이 두분은 엄청난 베테랑이라 누가 툭 치면 술술 쏟아져나올 정도로 치열하게 외운다고 하더라고요.
- <드라마시티> 단막극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적>(2002) 이후 20년이 훌쩍 넘게 흘렀습니다. 중간에 그만두고 싶은 적은 없었는지요.
= 제 인생이 제일 재밌을 때가 지금 쓰고 있는 드라마의 캐릭터가 자기 마음대로 굴 때, 뜻대로 신나서 이야기를 끌고 갈 때예요. 그 희열로 살고, 씁니다.
- 자주 오나요, 그런 순간이.
= 아니죠. 문제는 안 올 때가 대부분이라는 거죠. (웃음) 그리고 방송을 볼 때도 좋아요. 특히 현장에서 대본을 즐겁게 가지고 놀았다는 느낌이 드는 장면을 보면 작가로서는 더없이 기쁩니다. 그래서 지겨울 틈 없이 계속 합니다. 매력과 고난이 하나인 거지요.
- 많은 서사 장르 중 드라마를 쓴다는 것.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 가족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는데 밤 9시 무렵 환자들이 다들 잠들고 나서 혼자 복도로 나왔죠. 적막한 병원 로비 텔레비전에서 <커피 프린스>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제가 위로받게 됐어요. 앞으로 1시간 동안만큼은 드라마가 잠시 내 삶의 고단함을 잊게 해줄 테니까. 그냥 고마웠어요. 드라마의 역할이란 거, 그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요?
선의의 로맨스
서숙향의 로맨스엔 지나치게 피로하거나 위악적인 갈등이 없다. 미운 얼굴은 있어도 악한은 드물다. 작가는 “장점이라기보단 약점인 것 같아 고민된다”고 했다. “저는 여자를 쓸 때만큼 남자를 쓸 때도 애정이 많이 가고 재미있는데 아마도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이 크기 때문인 것 같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대학교에 입학했는데, 귀가해서 보니 창가에 앉은 어머니가 혼자 발톱을 깎다가 울고 계시더군요. 수개월 만에 자기 발톱을 깎은 거예요. 그동안 엄마랑 저는 살면서 직접 발톱을 깎아본 적이 별로 없었던 거지요. 아버지가 그런 분이었어요. 수험생 시절에 잠이 모자라서 딱 1시간만 쪽잠 잔다고 하면 제 발에 실을 묶어 창밖에 떨어뜨려놓고 1시간 뒤 창가에서 실을 잡아당겨 깨우던 분이셨죠. 창밖에서 딸을 놀라게 해줄 무언가를 준비해 서 계셨고요.” 인물들이 서로 냉정히 상처 입히는 장면에서조차 묘한 온기가 감도는 그의 서사는 하루치의 긴장을 이완하는 시간에 드라마를 찾는 시청자들에게 미더운 선택지가 된다.
에필로그
10대 시절, 서숙향 작가는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미대 가면 굶어 죽는다는 그 시절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꿈을 접었다. 고등학교 방송반을 기웃거린 건 반항심의 표출이었다. 그 뒤로 대학 방송부를 거쳐 평생 방송가에 몸담고 있으니 운명은 운명이다. 그는 어디를 가리킬지 모르는 나침반을 가진 사람이지만 한번 꽂히면 깊고 길게 사랑한다. “어느 감독님과 연극을 보러 가는 길에 잠시 시간이 남아 인사동의 달항아리 전시장에 들렀죠. 그 앞에 서는 순간 마치 도공이 제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나중에 정신 차려보니 감독님 혼자 연극을 보고 나와서 다시 전시장에 돌아올 때까지 제가 내내 그 앞에 서 있었대요.” 한번 잡힌 집필 루틴도 변하는 법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씻지도 않고 책상에 앉아 전날 작업을 정리한다. “일어나면 어제 쓴 것에서 ‘덜어낼 감정’부터 떠오릅니다. 그걸 지우고 퇴고하고 나면 오전이 지나가고 점심 땐 열심히 청소를 하죠. 제2의 적성은 집 안 관리가 아닐까 싶기도 해요.” 미니멀하지만 이곳저곳 공들인 흔적이 가득하고 먼지 한톨 없이 깨끗한 그의 작업실은 “방송가에 안착한 30여년간 여의도를 벗어난 법이 거의 없”는 서숙향의 우주이고 정거장이다. “한참 골방에서 외롭게 글을 쓰고 나면 사람의 온기가 절실해지는 순간이 찾아와요. 하지만 마음먹고 한 외출도 결국 여의도 근처죠. (웃음)” 고집스럽게 정주하되 자신이 선 자리에서 가장 먼 곳을 상상한다는 점에서 그는 어떻게든 작가이고 말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