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휘와 보영, 두 남자가 가장 가깝던 시절 함께 보내는 공간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아휘의 아파트다. 이곳은 침대 하나, 소파 하나, 이구아수폭포가 그려진 전등이 전부인 작은 공간이다. 장숙평 미술감독과 이 공간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어떤 고민을 했는지 궁금하다.
= 낸 골딘이 찍은 사진을 보았다. 그녀는 행복하지 않은 관계를 담은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나는 그 사진을 아주 잘 찍었다고 생각했다. 장숙평 미술감독에게 “이렇게 영화를 시작하고 싶어”라고 말하며 그 사진들을 주었다. “러브신으로 영화를 시작하자. 두 남자가 사랑을 나누는 곳이 이 방이었으면 좋겠어. 침대와 소파가 있을 거야. 조명은 적게 쓰고.” 이 말을 들은 장숙평 미술감독은 “더 많은 디테일이 필요해”라고 요구했지만 나는 “디테일은 없어. 지금 방을 바로 만들어야 해. 나는 양조위가 이 영화를 감당할 수 있을지 아니면 관둘 건지 알아야 하거든”이라고 대답했다. 아휘와 보영이 가장 친밀한 순간을 이 방에서 담고 싶었고, 그 뒤로는 두 사람 사이가 점점 멀어지기 때문에 양조위가 그 과정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지 확신을 얻고 싶었던 것 같다.
- <해피 투게더>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이구아수폭포 등 아르헨티나의 많은 곳을 돌아다니는 로드무비인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공간은 어디인가.
= 우리는 미국 국경에서 출발해 팬아메리칸 하이웨이를 따라 아르헨티나 최남단까지 따라 내려가는 동선을 계획했었다. 그 동선에 있는 모든 장소를 체크했다. 후후이나 멘도사 같은 북쪽 지역도 갔고. 마침내 우수아이아라는 곳을 발견했는데 아주 멋졌다. 그곳은 세상의 끝이었다. 세상의 끝에서 이 영화를 끝내면 되겠다고 생각했고, 우리는 그곳에서 촬영을 마치기로 결정했다. 우수아이아는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 끝 마지막 카페, 세상 끝 마지막 호텔 같은 세상 끝 여러 공간을 찾을 수 있는 관광도시다. 도시 중심가에는 세상의 끝에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 수 있는 전화 부스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척 로맨틱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장소들 말고는 남극으로 가는 일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카지노도 하나 있었는데 마카오에 있는 카지노와 달랐다. 10달러를 베팅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카지노였다. 밤이 되면 으스스한 느낌과 함께 유령의 집과 같은 황량한 곳으로 변했다.
돌아갈 홍콩은 이제 없다
- 영화는 아휘와 보영의 이야기로 전개되다가 중반부부터는 장(장첸)의 사연이 등장한다. 장첸이 연기한 장은 대만에서 아르헨티나로 여행 왔다가 돈이 떨어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국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다가 아휘를 만나는 인물이다. 장첸의 어떤 점 때문에 캐스팅해야겠다고 생각했나.
= 당시 장첸은 경험이 많지 않지만 장 역할을 소화할 에너지와 신선함이 있었다. 장첸은 에드워드 양 감독의 <마작>(1996)에서 바람둥이 역할을 맡았는데 그때 그를 처음 봤다. 실제로 그는 수줍음이 많은 배우인데 그 수줍음을 이 영화에 담고 싶었다.
- <해피 투게더>의 중국어 제목은 <춘광사설>(春光乍洩)이다. ‘봄 햇살이 살며시 드러난다’는 뜻인데 이 제목으로 짓게 된 사연이 있나. <춘광사설>은 홍콩 가수 황요명이 1995년 낸 앨범 《愈夜愈美麗》(유야유미려)의 수록곡이기도 하다.
= ‘춘광사설’은 어떤 은밀하고 로맨틱한 것이 살며시 드러난다는 뜻이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욕망>(1966)의 중국 개봉 제목이기도 하다. <욕망>의 원래 제목인 <Blow Up>을 의미하는 말이 아닌데도 나는 춘광사설이라는 제목을 좋아한다. 이처럼 춘광사설이 <해피 투게더>에 관능적인 면을 더해줬다고 생각한다.
- 크리스토퍼 도일 촬영감독이 카메라에 담아낸 이구아수폭포는 굉장히 웅장하고 거대해서 모든 걸 집어삼킬 것 같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영화는 이구아수폭포로 끝나는데.
= 눈앞에서 이구아수폭포를 보았을 때 완전히 압도됐다. 중국에서 폭포는 모든 게 모인다는 뜻을 상징한다. 영화 제목을 <해피 투게더>로 정한 것도 당시로선 중국 반환 이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일종의 질문을 던진 셈인데 분명한 건 1997년 이전의 홍콩은 이제 없다는 사실이다. 아휘가 홍콩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그래서다.
<해피 투게더 리마스터링> O.S.T
“탱고에 관한 영화를 찍기 위해 아르헨티나에 간” 만큼 <해피 투게더>의 음악 역시 탱고에 기반한다. <Prologue> <Milonga For Three> <Finale> 등 O.S.T에 수록된 세곡은 탱고의 거장인 아스토르 피아졸라가 작곡한 탱고곡이다. 특히 록음악의 대부 프랭크 자파의 <I Have Been In You>가 이 탱고곡들과 함께 귀에 들어온다. 이 음악들은 거대한 아르헨티나를 방황하는 두 남자의 상반된 풍경과 정서에 쓸쓸함을 더한다. 영화 주제곡인 <Happy Together>는 1967년 미국 록밴드 더 터틀스의 히트곡으로, 왕가위 감독은 홍콩 출신 가수 대니 청이 부른 버전을 영화에 사용했다.
다큐멘터리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
<해피 투게더>의 메이킹 필름이자 또 다른 이야기. <해피 투게더>의 촬영 현장, 왕가위 감독과 제작진의 인터뷰를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제로 디그리’(영도지대·zero degree)는 동쪽도 서쪽도 아닌, 밤도 낮도 아닌,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곳에서 발현되는 영구 망명을 뜻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