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셰린의 밴시>에는 그냥 지나치기 수상한 구석이 있다. 이곳의 인간들은 종종 너무 과격하다. 그렇지 않은가. 기어이 피를 보겠다는 남자와 지지 않고 응수하는 남자라니. 처음에는 마틴 맥도나 감독 특유의 우화적이고 연극적인 연출이라 여기고 넘어갔다. 그런데 이런 과격함은 영화의 마지막, 파우릭(콜린 패럴)의 결단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한다. 파우릭은 어째서 그렇게까지 한 것일까? 단순한 복수인가, 윤리적인 응징인가. 혹은 여태 눌러놓은 서운함과 분노가 폭발한 것일까? 더 의아한 것은 그런 결단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인물들의 반응이다. 게다가 그 순간을 은은하게 감싸고 도는 경건한 공기라니. 이런 이상함에 대해 생각하던 나는 마틴 맥도나의 작품들을 경유해 하나의 가설에 이르렀고, 그 가정은 지금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파우릭의 결단을 설명하기 위해 쓰여질 것이다. 그것이 기행이 아니라 성스러운 의식이며, 영화의 숭고한 목적지임을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제의(祭儀)를 올리는 영화라고.
쫓는 자와 쫓기는 자
마틴 맥도나의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의 영화의 기본 뼈대는 추적이다. 늘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등장한다. 추적이 시작되는 이유는 누군가가 이 세계의 규율을 깼기 때문이다. 실수로 아이를 죽이거나(<킬러들의 도시>), 누군가의 강아지를 훔치는 식이다(<세븐 싸이코패스>). 이 추적은 숙명적이다. 마치 사람을 향해 돌진하는 운명과 같아서 도망칠 수도, 돌아서서 주먹을 날릴 수도 없다. 추격자는 끝내 죄인의 목덜미를 움켜쥐는 데 성공한다. 거칠게 요약하면 마틴 맥도나의 영화는 세 파트로 나뉜다. 규율을 어기고, 추적당하고, 붙잡히는 것.
그런 측면에서 <이니셰린의 밴시>를 보면 새롭게 보이는 부분이 있다. 영화 내내 파우릭이 눈에 띄게 활약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콜름(브렌던 글리슨)이다. 파계하고 추적을 받는 자, 콜름이기 때문이다. 그는 파우릭에게 절교를 선언하고 그의 당나귀가 죽는 데 일조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기준에서 그리 큰 잘못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우정을 버리거나 동물을 죽게 하는 것은 마틴 맥도나의 세계에서 살인보다 더한 중범죄다(아무렇지 않게 살인을 하면서도 우정과 동물을 끔찍이 여기는 뒤틀어진 윤리관이 그의 작품을 보는 묘미 중 하나다). 콜름은 용서받을 수 없는 원죄를 뒤집어쓰고, 파우릭은 그런 콜름을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물론 당나귀가 죽은 것은 콜름의 의도가 아니다. 하지만 마틴 맥도나의 세계에서 잘못은 늘 의도치 않게 벌어지고, 이것은 감형의 사유가 되지 못한다.
파우릭은 신의 뜻을 전하는 천사처럼 통보한다. 콜름의 집에 불을 지르겠노라고. 마틴 맥도나를 좋아하는 관객에게 이런 전개는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의 영화에서 규율을 깨고 잘못을 저지른 죄인에게는 자주 재앙이 찾아온다. 아이를 죽게 만들자 킬러가 쫓아오고(<킬러들의 도시>), 강아지를 훔친 순간부터 갱단이 따라붙는다(<세븐 싸이코패스>). 죄 없는 시민을 두들겨팬 경찰 제이슨 딕슨(샘 록웰)은 화염에 휩싸여 화상을 입고 만다(<쓰리 빌보드>). 이때 재앙을 안겨주는 이가 누구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가 저지른 잘못이 피할 수 없는 재앙이 되어 형벌처럼 그에게로 되돌아왔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 과정은 복수가 아니라 순환이다. 무너졌던 세계의 규율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폭력은 제자리를 찾아 귀환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는 독특한 점이 있다. 다시 콜름을 떠올려보자. 그는 파우릭의 충격적인 통보를 잠자코 받아들인다. 이 태도는 수상할 정도로 수용적이다. 당나귀가 죽은 게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항변하거나, 파우릭의 난폭한 계획을 저지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다지도 수용적인 반응이 마틴 맥도나의 작품에서 처음은 아니다. 잘못을 저지른 자들은 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 앞에서 순순히 몸을 내주고는 했다. <쓰리 빌보드>의 제이슨은 방화범을 탓하지 않고, <세븐 싸이코패스>의 빌리(샘 록웰)는 갱단의 보복을 피하지 않는다. 이것을 두고 초연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거기에는 초연함을 넘어선 적극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방화가 예고된 시간에 홀로 집에 앉아 있는 콜름의 자세는 어떤가. 예배에 참석한 신도처럼, 연극에 참여하는 배우처럼 성실하게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븐 싸이코패스>의 빌리는 심지어 자신에게 총을 겨눈 상대가 총알을 장전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기까지 한다. 그들은 재앙이 자신에게 제때 도착할 수 있도록 협조한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이 순간에 엿보이는 경건함이다. 파우릭의 방화는 주일(God’s day)에 이뤄지고, 카메라는 십자가를 비추며 이 순간을 신성과 연결짓는다. 입을 꾹 다문 채로 화염병을 던지고, 집을 지키는 파우릭과 콜름의 완고하고도 정제된 태도는 이런 느낌을 배가시킨다. 적극적인 참여 가운데서 경건하게 집행되는 의식. 이것은 다름 아닌 제의다. 그렇게 본다면 어째서 재앙이 강타한 이후에 많은 갈등이 사그라드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뭉치고 꼬였던 것들이 제의를 통해 씻겨나갔기 때문이다. 콜름과 파우릭은 방화 사건 이후 처음으로 해변에 나란히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본다. 물론 그들 사이의 앙금이 완전히 씻겨나갔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영화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한다. 그러므로 마틴 맥도나의 영화에서 규율을 어긴 자에게 닥치는 재앙은 단순히 사고가 아니고, 죄인의 원죄를 대속하는 신성한 의식이다. 이 의식이 끝난 뒤에야 세계는 회복을 시작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 순간을 위해 달려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냉혹한 세계에 대응하는 마틴 맥도나의 방식
마틴 맥도나의 세계에는 도망도, 용서도 없다.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내뺄 수 있는 사람도, 대가 없이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누군가에게 아픔을 준 자가 제의를 통해 그 아픔을 제대로 돌려받은 후에야 무너졌던 규율은 재건되고 세계는 일어서기 시작한다. 그의 세계가 어째서 이다지도 냉혹한지, 지금의 나는 알 수 없다. 아일랜드의 역사를 돌아보거나 현 상황을 짚는 것은 관심사도 아니고 잘하지도 못한다. 나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다. 이 엄혹한 세계에 대응하는 마틴 맥도나의 방식. 끊임없이 죄를 저지르고 재앙을 마주하는 차가운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붙잡고 살아야 할까. 그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지만 영화 속 인간들을 보며 몇 가지를 떠올릴 수는 있겠다. 끝내 예술을 향해가는 콜름과 친절을 택하는 파우릭. 나는 당신의 선택이 궁금하다. 나의 경우는 후자에 가까운데. 마틴 맥도나의 최근작, <이니셰린의 밴시>와 <쓰리 빌보드>의 마지막은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이미지라는 점을 되짚으며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서로의 선택이 달라도 우리는 언제 어느 곳에선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서 있게 될 것이다. 이 냉혹한 세계에도 스쳐 지나가듯 따스한 순간들이 있다고, 그것을 희망 삼아 자신의 선택을 이어가면 된다고 영화는 말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