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극장 위기론 대두되는 2023년, ‘흥행 공식’이 깨졌다
2023-04-07
글 : 임수연
지난 10년의 박스오피스 톱10을 중심으로 시대와 관객의 변화를 살피다
<스즈메의 문단속>

지금 극장은 위기인가.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3월29일 기준 올해 극장 총관객수는 2487만명으로, 이는 2019년의 절반 정도 수치지만 지난해 대비 2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는 코로나19로 큰 타격을 입은 극장이 느리게나마 회복기에 접어들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2023년 박스오피스 상위 세편의 영화는 모두 외화다. 지난해 개봉한 <아바타: 물의 길>(관객수 348만명, 총관객수 1077만명)은 ‘극장에서 봐야만 하는 영화’라는 공감대를 형성해 올해까지 기세를 이어왔고, <더 퍼스트 슬램덩크>(관객수 430만명)와 <스즈메의 문단속>(관객수 315만명)의 흥행은 유례없는 일본 애니메이션영화 열풍을 불러왔다. 수년 전만 해도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안착할 만한 패키징은 황정민, 현빈 주연의 <교섭> 혹은 조진웅, 이성민 주연의 <대외비> 같은 영화에 가까웠을 것이다. 더군다나 두 작품 모두 100억원 이상의 제작비를 투입한 대작이다. 지난해에는 최동훈 감독이 연출하고 류준열, 김우빈, 김태리가 출연한 <외계+인> 1부, 한재림 감독이 연출하고 송강호, 이병헌, 전도연이 출연한 <비상선언>이 흥행에 실패했다. 현재 극장은 점진적으로 회복세에 접어든다고 해도 과거와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감독과 배우의 이름값, 제작 규모 그리고 소재와 장르까지 과거 흥행 요소로 꼽히던 요소는 코로나19를 거치면서 더이상 시장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박스오피스 성적에 새로운 기준, ‘뉴 노멀’을 정의해야 할 시대가 온 것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수요가 아닌 공급에 의해 자리 잡은 ‘흥행 공식’

하지만 지난 10년간 박스오피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흥행 법칙’이라 믿어온 것들의 실체가 불분명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지난 10년간 흥행한 한국영화를 보면, 흥행 공식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배급이다: 흥행을 완성하는 전략과 실무>를 쓴 이화배 영화사 그레이칼라 대표는 개봉 시기, 개봉 규모 등 배급의 기술적인 측면에서 흥행을 결정짓는 요소가 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작품 자체의 정량적 지표로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전한다. 영화의 주제, 소재, 장르, 배우와 감독의 이름값 등이 성공을 보장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기존에 흥행을 담보한다고 여겨지던 요인들은 결국 투자배급사들이 만든 환상이라는 의견도 있다. 2013년은 총관객수 2억명을 처음으로 돌파한 해지만, 관객수 쏠림 현상이 가속화된 시기이기도 했다. <영화 배급과 흥행>을 쓴 이하영 하하필름스 대표는 “2013년부터 한국영화 전체 관객수에서 상위 10위권 영화의 점유율이 높아졌다. 중간급 영화가 사라지고 독과점이 시작됐다”는 점을 지적한다. 2013년 총관객수는 2억1335만명이었고, 2019년 전까지 이 숫자는 2억1000만명대에 머물렀다. “총관객수는 크게 늘어나지 않지만 특정 영화에 관객수가 쏠리면서 4대 배급사의 어젠다에 맞춰 관객이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들의 전략에 따라 흥행이 달라졌다.” (이하영 대표) 이를테면 티켓 파워를 검증받은 기성 유명배우가 나와야 영화가 잘된다거나, 형사가 나오는 범죄 스릴러가 시장에서 잘 먹힌다는 공식은 수요가 아닌 공급에 의해 자리 잡은 것이다.

그리고 소비자와 공급자의 만남이 제한됐던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관객은 제작사 및 투자배급사와 무관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채 과거에 안주한다면 그릇된 공식에 기반한 잘못된 전략을 세울 수 있다. 변승민 클라이맥스 스튜디오 대표는 “과거에는 신파적인 영화를 비판하기보다는 공감을 표했다. 10년 전에는 울고 싶다거나 웃고 싶다거나 정확하게 아는 감정을 마주하고 싶어 극장에 갔다면, 지금은 너무 뻔히 보이는 요소를 경계하는 시각이 많아졌다”는 입장이다. 장르는 관객의 진입 장벽을 낮추고 좀더 편하게 접근하는 장치일 수 있지만, 바꾸어 말하면 예상 가능한 코드가 된다. 그러므로 대중성을 판단하는 과거의 모호한 기준에서 벗어나 정확한 타깃 분석이 요구된다. 류상헌 NEW 유통전략팀 팀장과 임성록 NEW 그룹홍보실 과장은 “과거에 대중성을 가진 영화가 흥행했다면, 지금은 코어 타깃층을 확실히 공략한 영화가 성공할 확률이 높아졌다”고 평가한다. “코로나19 이전에는 제작비가 작은 중소형 영화도 천만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기본 시장과 확장 가능성이 충분했지만, 콘텐츠 외형이 다양해졌을뿐더러 OTT가 대중화되고 취향이 세분화됨에 따라 극장을 찾는 관객이 작품 선택에 훨씬 더 신중을 가하고 있다.” 그 결과가 앞서 언급한 일본 애니메이션영화의 선전이다. 이화배 대표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원작 팬덤에 기반해 인기를 끌었고, <스즈메의 문단속>은 한국영화 같은 강렬한 주제 의식과 높은 완성도를 추구”했다는 점을 성공 요인으로 꼽는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개인의 취향과 관객의 위상이 중요해졌다

이렇듯 박스오피스 성공의 기준을 설정하는 주도권이 관객쪽으로 넘어오면서, 실제 업계에서 고민하는 투자배급 전략이나 흥행의 기준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전에 CJ ENM에서 투자와 배급을 담당했던 박철수 필름몬스터 대표는 과거 배급 시기를 데이터를 근간으로 삼아 결정했다고 설명한다. “52주씩 10년간 데이터를 바탕으로 흥행작의 관객수와 장르, 계절, 행사, 연휴 등의 상관관계를 들여다보니 유의미한 키워드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는 작품 내적인 힘이 없으면 아무리 배급 전략을 잘 짜서 작품의 재미를 포장해도 성공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고 첨언했다. 조현경 CJ ENM 배급파트장 역시 “바꾸어야 할 것은 바꾸고 다시 세팅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기존 작품의 레퍼런스는 쌓여 있지만 그 기준대로 개봉이 진행되지는 않는다. 극장 환경도 바뀌었고, 예매량도 과거와 달라졌다. 예전과 다른 기준을 찾고 내부의 평가 잣대도 달라져야 한다.” 또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원작 팬덤을 다시 결집하고 농구 열풍을 가져온 것처럼, “영화뿐만 아니라 관객과 함께 만들어나가야 할 또 다른 가치”를 고민하고 함께 기획할 필요가 있다고 부연했다. 관객수 110만명을 돌파한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연간 박스오피스 10위권 내에 드는 작품은 아니지만 10대 관객을 확실히 만족시켰다는 점에서 성공한 영화다. 그리고 이같은 변화의 공통점은 개인의 취향과 관객의 위상이 중요해졌다는 데 있다. 스크린 독과점과 대기업 주도하에 쏟아지던 비슷비슷한 기획이 힘을 쓰지 못한 시기, 관객의 주도하에 영화계의 ‘뉴 노멀’이 정립되기 시작했다.

* 이번 특집에서는 지난 10년간 박스오피스 성적을 분석했다. 이어지는 1401호에서는 한국 영화 시장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열풍이 가능했던 이유를 살핀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