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인터뷰] '길복순' 전도연, 나는 여전히 목마르다
2023-04-13
글 : 김소미

“요즘 사람들이 <일타 스캔들>과 <길복순>으로 인해서 뭐가 달라졌냐고 물어요. 달라진 건 없다고, 하지만 이 두개의 경험이 앞으로를 바꿀 수는 있을 것 같다고 답하고 싶어요. 이상하게 기대가 돼요. 자꾸만 더 기대해보고 싶어져요.”

사진제공 넷플릭스

- 3월31일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이 3일 만에 글로벌 톱10 영화 (비영어)부문 1위를 차지했다. 이렇게 확실한 지표로서 반응이 나오기 전까지 배우 자신의 개인적인 평가는 어땠나.

= 1차 시사 끝나고 만족스러웠다. 전도연 하면 드라마에 강한 배우라는 이미지, 액션 장르에 대입하기엔 낯선 배우라는 연상을 깨고 싶었다. 변성현 감독님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전도연이란 배우를 새롭게 쓸 수 있음을 증명해줬다는 것에 감사한다. 나름의 용기가 생겼다. 욕심 같아선 갖가지 장르를 거침없이 소화해보고 싶은데 내게 주어지는 선택지가 부족해서 답답한 시간을 보낸 게 사실이다. 그러다 만난 <길복순>은 너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투자를 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어휴, 내 입으로 말하긴 싫지만(웃음) 나이 많은 여성배우가 메인인 액션 장르라는데 그것에 대해 누가 믿어줄까 의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정말 솔직히 이야기해서, 그런 반응 때문에 다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현실을 이미 안다고 해도 굳이 확인하는 건 다른 문제니까. 변성현 감독님에게 “꼭 내가 아니어도 되니까 젊은 배우와 하셔도 된다”고 누누이 이야기했던 건 그런 두려움 때문이었다. 어느 날 감독님이 딱 잘라 말하더라. “전도연이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힘들게 쓰고 있는데 그런 힘 빠지는 이야기는 안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 청부받은 일을 작품이라 칭하고 살인을 ‘슛 들어간다’고 표현하는 킬러 회사 MK ENT.에서도 고참급인 길복순을 향한 조직원들의 묘한 시기와 편견이 묘사된다. 변성현 감독이 배우의 딜레마를 빗대어 흥미롭게 풀이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제작 과정부터 닮아있다. (웃음)

= 하긴, 그러네. 오래된 칼은 무뎌지고 쓸모없어진다는 지적에 대한 차민규(설경구)의 답이 좋았다. “무딘 칼이 더 아파.”

- 무협 사극인 <협녀, 칼의 기억>(2015)이 있었기 때문에 액션이 처음이라고 할 순 없다. 이번에 제대로 도전해본 <길복순>에선 무엇이 다르던가.

=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작품을 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지만 사실 그 말 안에 액션 장르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만큼 내게는 도전적인 프로젝트였다. <협녀, 칼의 기억>은 서사적인 액션이었고, 50 대 1로 싸우는 중요한 신이 있긴 했지만 워낙 많은 스턴트 배우들이 나를 둘러싸고 작은 실수에도 유려하게 맞추며 움직여주어서 한결 수월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른 힘듦이었다. 연습했던 것만큼 100% 구현하진 못했지만,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이만하면 잘 나오지 않았나 싶다. 후반작업에 다들 굉장히 애쓰셨구나 싶고. (웃음)

- 액션 신은 컷을 짧게 끊어서 찍지 않고 긴 호흡으로 펼쳤다고.

= 화려하기보다 현실적인 액션, 그 안에서 인물의 감정을 보여주는 것. 이 두 가지가 어떻게 만날지 잘 몰랐는데 촬영하면서 알게 됐다. 쉽지는 않았다. 짧게 짧게 장면을 끊어서 갔다면 조금 더 쉬웠겠지만 감독님은 타협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프닝 신, 그리고 상가 식당 신이 특히 길었다. 그게 배우들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여러 가지 호흡이 잘 맞아야 한다. 특히 상가 식당 액션 신은 애초에 잡은 촬영 기간보다 훨씬 오래 걸려서 한달 가까이 촬영했다. 그 장면이 특히 기억나는 건 그 무렵 내 안에서 일어난 변화 때문이다. 어렵고 힘들다면서도 어느 순간 적응하고 있는 시기였다.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옷이 서서히 맞는 느낌이 들었다. 다 지나고 나니 그제야 모종의 쾌감이 찾아오더라. (코를 찡긋하며) ‘거 봐, 나 결국 해냈잖아. 해낼 수 있다고 했잖아’ 싶은?

- 암살자들의 액션영화이기도 하지만 레즈비언인 딸과 킬러인 엄마가 각자의 비밀 때문에 갈등하는 감정이 중심에 있고, 복순의 로맨스 서사도 뜻밖에 격정적인 데가 있다. 특히 공개 직후 길복순과 그의 보스인 차민규의 관계에 대한 반응이 좋았는데.

= 나도 그랬다. 사랑 이야기도 중요한 요소라 생각했지만 책으로 볼 땐 둘의 관계가 이 정도로 강렬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딸 재영(김시아) 과의 관계를 비롯해 워낙에 따라가야 할 숨은 감정들이 많았기 때문인데 막상 촬영 들어간 이후부턴 인물들간의 로맨스에 서서히 물들 었다.

- 마지막 대결에서 차민규를 바라보는 길복순의 클로즈업에는 종래에 사람을 죽일 때는 결코 나오지 않았던 표정이 포착된다.

= 클로즈업숏을 찍을 때 변성현 감독님이 한컷 안에 너무 많은 감정을 요구하더라. (웃음) 내 반응은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였지만 감독님은 원하는 바를 상세히 설명한 뒤 모니터 뒤로 사라졌다. 그런 상황이 닥치면 배우는 항변하고 싶어지는 동시에 감독이 머릿속에 그린 바를 완전하게 구현해주고 싶은 갈망도 커진다. 내 생각에 복순은 믿기지 않았던 것 같다. 민규의 죽음이. 이 사람이 이렇게 죽을 수 있다고? 그동안의 복순의 세계관 안에선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다. 그래서 그 순간에 자기가 차민규를 죽였다는 놀라움, 오랜 시간에 걸친 애정, 그리고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 사실임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뒤섞인다. 또 나는 그 순간에, 민규를 처음 만났던 때 복순에게 있었던 소녀 같은 얼굴이 잠시 비쳤으면 했다. 연기하면서 복순의 감정을 제대로 깨달았다.

- 첫 테이크에 오케이가 났나.

= 그랬던 것 같다. 워낙 복잡하게 뒤섞인 감정이라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채로 반신반의하며 촬영했는데, 컷 소리가 난 후 감독님이 곧바로 “거 봐요, 제가 말한 게 이거였어요”라고 해서 기분이 좋았거든.

- 재영에게 아빠가 필요한 게 아닐까, 묻는 민규의 에두른 고백을 복순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 분명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복순은 민규의 마음을 잘 알지만 계속 모른 척한다. 자신이 보고 싶고 나아가야 할 세상이 민규의 것과 다르다는 것도 잘 아는 여자라서. 같은 일을 하면서 같은 회사에 몸담고 있지만 다른 세상에서 살아야 할 두 사람이란 걸 직감하고 선을 긋는 쪽은 언제나 복순이지 않았을까 싶다.

- 올해 20주년이 된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하드보일드 멜로인 <무뢰한>, 금기의 사랑에 서정을 부여한 <남과 여> 등 전도연이 연기한 여자들을 줄 세워보면 많은 경우 자기 사랑을 참아내는 인물들이었다. 최선의 품위나 자존심, 혹은 앞서 언급한 대로 ‘나아가야 할 세상’을 알고서 감정을 억누르는 얼굴들을 연기할 때 나오는 폭발력이 있다.

= 내가 그런 정서를 좋아한다. 모든 걸 다 표현하며 살 수는 없으니까. 감정을 머금고 있는 상태를 연기할 때 더 이입하게 되는 면이 있다. 그게 곧 여운이라든가 여백의 미를 낳기도 한다. 실제의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쉽게 말할 순 없지만, 배우이자 관객으로서 내가 추구하고 좋아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 <길복순>의 쿨한 엔딩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문을 닫지 말고 열어두라는 딸의 메시지에 방점이 찍히는.

= 재영과의 관계는 상황은 다르지만 나와 딸아이의 소통 방식을 변성현 감독님이 몇번이나 집에 놀러 와서 묘하게 관찰한 부분이 있어서 그런지 유독 편안하게 다가왔다. 엔딩도 좋았다. 얼마 전 GV에서 비슷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 재영도 자신만의 비밀이 있고 스스로 어떤 벽을 세웠겠지만, 어쨌든 모녀를 단절시킨 가장 큰 원인은 복순의 직업일 것이다. 그런데 복순의 직업은 결국 차민규가 열어준 세계잖나. 한마디로 문을 닫게 한 것도 민규, 그 닫혀 있던 문을 결국 열게 만든 것도 민규라는 대화였다. 뒤늦게 너무나 공감이 가더라.

*이어지는 기사에서 전도연 배우와의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사진제공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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