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만 마주쳐도 울고, 뒷모습만 봐도 울고…
- 김지운 감독은 당시 여러 인터뷰에서 “임수정 배우는 오디션에서 살면서 느낀 죄의식과 적개심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고 대답한 유일한 배우였다”는 말을 많이 했었죠.
임수정 신인배우에게 너무 큰 역할을 맡기는 데 반대 의견도 많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당시 저는 굉장히 폐쇄적이었고 경계심이 많았고, 부조리한 세상과 사람에 대한 불만과 불신, 분노, 회피 같은 어두운 감정을 품고 있었어요. 감독님의 질문에 잠시 침묵하다가 어떠한 설명도 없이 “네”라고 답하는 모습을 보고 제가 수미를 연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대요.
- 문근영 배우와 미팅했을 때는 ‘어떻게 이 아이는 이렇게 깊은 눈을 가졌지?’라고 생각했다고 해요. 김지운 감독과 처음 만났을 때의 상황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문근영 한 시간 정도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나왔어요. “시나리오는 어떻게 읽었어?” “수연이는 어떤 아이인 것 같아?” “수미 역할은 누가 했으면 좋겠어?” 제가 웅진식품 피앙세라는 음료수 광고에서 지은 표정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면서, 그 표정은 어떻게 짓게 된 거냐는 질문도 하셨어요. 저는 시나리오를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고, “수연이는 슬프다”고 대답했어요. 그런데 제가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연기한 게 아니었더라고요. 나중에 첫 시사회를 보고 “감독님, 우리 영화 왜 이렇게 무서워요? 난 슬픈 영화인 줄 알았는데…”라고 했더니 김지운 감독님이 “너는 시나리오를 어떻게 본 거니? 근데 연기는 어떻게 한 거야? (웃음)”라고 하시더라고요.
- ‘슬픈 영화’라고 생각하며 연기했기 때문에 지금의 결과물이 나온 거라고 생각합니다. (웃음) 현장에서는 배우 대 배우로 일해야 하지만, 임수정 배우는 20대 중반이고 문근영 배우는 중학생일 때 자매를 연기했잖아요. 어떻게 서로에게 다가갔는지 궁금해요.
임수정 사적인 대화를 많이 나누진 않았는데 그냥 보자마자 서로에게 호감이 생겼어요. 너무 사랑하고 아끼다가 잃어버린 동생 같았어요. 근영이 입장에서는 호흡을 가장 많이 맞춰야 할 상대로 ‘뜬금포’ 배우가 나타난 건데도 저의 모든 것을 잘 받아줬어요. 이게 현실인지 허구인지 왔다갔다 할 정도로 수미 캐릭터에 깊이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문근영 오히려 순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같아요. 마음이 무장해제된 상태로 작품에 임하니까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고 눈만 봐도 서로의 감정을 알 것 같았거든요. 나중엔 언니 뒷모습만 봐도 눈물이 핑 돌았어요.
- 염정아 배우는 <장화, 홍련> 현장에 대해 “임수정은 말도 안 하고 근영이는 산에 쑥을 캐러 다녔다”고 묘사했었죠. (웃음)
문근영 감독님도 “나랑 계속 수다 떠니까 재밌지 않니?”라면서 그냥 열심히 놀라고 했어요. 오픈 세트장 주변 동네를 구경 다니고, 숲에 들어가서 쑥 캐고, 쑥차도 끓여드리고, 세트장 촬영 때도 방에 들어가서 혼자 놀았어요. 벽지나 소품들이 정말 예뻤잖아요. 아무 생각 없이 제가 현장에서 무해하게 놀고 있으면 모두 저를 예뻐해주셨어요. 중학교 졸업할 때 현장에서 파티도 해줬는데 그날 엄청 울었어요.
임수정 맞아, 기억난다. 근데 근영이는 워낙 잘 울었어요. 좋아도 울고, 슬퍼도 울고.
문근영 저는 지금도 똑같아요. 여전히 잘 울어요. (웃음)
- 염정아 배우가 은주 역을 연기했을 때 32살이었더라고요. 염정아 배우는 현장에서 어땠나요.
문근영 에너지가 넘쳐요. 저한테 늘 다이어트한다고 밥 굶지 말라고, 자기는 초등·중학생 때 피자 한판씩 먹어도 살이 하나도 안 쪘다며 잘 먹어야 키가 큰다고 했어요. (웃음) 언니는 항상 유쾌하고 재미있었어요. <장화, 홍련> 현장은 늘 분위기가 좋았어요.
- <장화, 홍련> 리메이크작이 나오면 두분이 은주 역을 맡을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웃음)
임수정 해야죠. 정아 언니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주 못된 엄마처럼 혹독하게 연기해야죠. (웃음) 제가 <거미집>에서도 굉장히 예민하고 도도한 여자배우로 나오거든요. 표독한 캐릭터는 제가 다 해보고 싶으니 저에게 꼭 주세요. (웃음)
- 임수정 배우는 <장화, 홍련>을 제대로 다시 본 적이 없다면서요.
임수정 다시 볼 용기가 나지 않더라고요. 가장 본능적으로 연기했던 시기라서 제 얼굴을 보는 건데도 마음이 이상해요. 저만 알고 있는 당시 심정이 있고, 수미 캐릭터인지 자연인 임수정인지 분간할 수 없어서 마치 타인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거리감이 생겨요. <장화, 홍련> 이전의 저는 무척 날카로운 사람이었는데 현장에서 근영이의 맑은 기운을 받으면서 많이 치유됐어요. 원래 배우들이 어떤 작품을 끝내고 나면 캐릭터로부터 빠져나오기 어려워하는 후유증을 일정 기간 느끼는데, <장화, 홍련>은 더더욱 그랬어요. <…ing>를 찍을 때 근영이가 너무 보고 싶으면서도, 근영이가 아닌 <장화, 홍련>의 수연이가 보고 싶었어요.
문근영 그냥 나랑 놀면 좋겠는데, 언니가 현장에서 항상 힘들어해서 너무 안쓰러웠어요. 그러다 힘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수연아…”라고 불러요.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언니가 가끔 웃어 보이는데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시나리오엔 없는데 언니와 함께 놀다가 만들어진 장면도 있어요. 상자에 들어 있는 장난감을 갖고 놀고 있는데 언니가 어디서 난 거냐, 누가 알려준 거냐고 물어보길래 “엄마가”라고 답했거든요. 감독님이 우리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수연아, 우리 그대로 한번만 찍어볼까?”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들어간 장면이에요.
임수정 김지운 감독님은 구체적인 디렉팅을 하기보다는 진짜 감정, 진짜 연기를 끌어내기 위해 자연스러운 무드를 많이 봤던 것 같아요. 그래도 시원하게 오케이를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웃음)
- 수연은 특히나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캐릭터잖아요. 귀신으로서 연기해야 할 때도, 꿈 혹은 환상을 연기해야 할 때도 있었어요. 당시에도 ‘해석본’이 공유될 만큼 매 순간 하나의 의미로 규정되지 않는 연기를 해야 하는 작품이었죠. 그런데 <장화, 홍련> DVD와 블루레이에 실린 코멘터리를 보면 문근영 배우는 맥락을 하나하나 계산하기보다는 무척 동물적인 감각으로 연기했더라고요.
문근영 그땐 연기가 뭔지도 모르고 계산 없이 본능적으로 연기할 때였어요.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현장 분위기나 수미 언니 눈을 봤을 때 느껴지는 감정을 따라가며 연기했어요.
-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엄청난 연기를 보여주었잖아요. 그때도 본능적으로 연기했나요. 연기를 하면서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가 분명 있었을 텐데, 그게 언제였는지도 궁금해요.
문근영 <가을동화> 때도 연기학원을 6개월 정도 다니긴 했는데 크게 배운 건 없었거든요. 지금도 인터넷에 올라오는 <가을동화> 사진을 보면 ‘이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연기했지?’ 싶어요. 그냥 대본이 너무 슬펐고, 대본 리딩할 때부터 눈물이 났어요. 그랬더니 감독님이 광명을 찾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묻더라고요. “너 방금처럼 똑같이 연기할 수 있어? 넌 할 수 있어.” 그렇게 캐스팅이 됐어요. (웃음) <장화, 홍련> 현장에는 항상 질문을 달고 다니는 김갑수 선배님이 계셨어요. 갑수 선배님이 가까이 오려고 하면 감독님이 도망갈 정도였어요. (웃음) 그때는 ‘아빠는 왜 저렇게 궁금한 게 많고, 나는 왜 궁금한 게 없을까?’ 하고 궁금해했어요.
<어린 신부> 현장에서는 (김)래원 오빠가 ‘질문봇’이었어요. 오빠와 나는 나이 차가 얼마 안 나니까 물어봤어요. “오빠는 뭐가 그렇게 궁금해요?” 오빠가 그러더라고요. “너는 지금처럼 연기해도 돼. 그게 맞아. 그런데 언젠가 나와 비슷해질 때가 올 거야.” 그때부터 래원 오빠에게 캐릭터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많이 묻고 배우게 됐어요. <댄서의 순정> 때부터는 인물의 전사도 써보고 머리로 많은 것을 생각하며 연기하게 됐어요. 강약 조절을 어떻게 할지, 현장에서 생기는 변수에 어떻게 적응할지 고민하기 시작한 거죠. 그게 가장 많이 달라진 점 같아요.
- 서로가 첫 주연 영화에서 만난 연기 파트너였잖아요. 상대 배우로서 어땠어요.
문근영 언니가 수미 언니여서 너무 좋았어요. 항상 현장에서 “수연아”, “수미 언니” 하고 캐릭터 이름으로 부르면서 지냈어요.
임수정 20년 넘게 연기를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서로 연기를 주고받는 배우가 있고 자기 중심으로 집중하는 배우가 있다는 거예요. 근영이는 전자예요. 제가 연기 경험이 없는 신인일 때 문근영처럼 좋은 배우를 만나서 연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죠. 제가 연기한 수미는 수연에 대해 굉장히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어요. 그리움,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의식, 미안함…. 그런데 근영이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기만 해도 같이 눈물이 쏟아졌어요. 심지어 촬영이 아닐 때도 너무 울어서 감독님이 “눈 붓고 얼굴 부으니까 지금 울지 마”라고 한 게 기억이 나네요. (웃음) 근영이뿐만 아니라 염정아 언니, 김갑수 선배님에게도 연기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현장에서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하는지 많은 것들을 배웠어요.
사실 모든 배우가 이렇지는 않아요. 기술적으로 아무리 뛰어나도 자기 연기만 신경 쓰는 배우들을 만나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거든요. ‘나는 이만큼 퍼줬는데, 내 거 할 때 안 도와주네~.’
문근영 맞아, 그런 배우들이 있어. (웃음)
- 배우들과 얘기해보면,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고 나서야 연기는 함께하는 것이고 리액션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아요. 신인 때 이런 애티튜드로 연기하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요.
임수정 신인배우는 자기가 준비해온 것을 하기도 급급하니까요. 감정을 어떻게든 잡고, 내가 연습한 것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어려워요. 솔직히 말하면 상대방이 어떻게 연기했는지 알아차리는 것도 힘들어요. 그런 와중에도 근영이와 연기할 땐 상대 배우와 호흡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함께 깨우쳤어요.
문근영 <가을동화> 당시 선우은숙 선배님이 제 바스트숏을 찍을 때 함께 눈물을 흘려주셨어요. 그때 연기는 항상 같이하는 거라고 배웠어요. 막상 성인이 되고 나니 모든 배우가 연기를 주고받으며 찍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어떻게든 상대를 이기려고 하는 사람들을 볼 때는… 그냥 안타까워요. 더 재미있게 연기할 수 있는데 왜 혼자서만 할까. 가끔 열은 받지만 티는 안 내요. (웃음)
임수정 그렇죠. 그냥 혼자 꿍하며 있는 거죠. (웃음) 그런데 배우마다 연기법이 다른 건데 함께 주고받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할 수는 없는 문제라서, 그냥 그 사람의 방식을 존중해줘요. 대신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할지 스스로에게 집중하며 고민하기 시작하죠.
- <장화, 홍련>을 보면 자매가 함께한 장면의 호흡이 훌륭했기에 각자 힘든 연기를 할 때도 더 잘할 수 있었다는 게 눈에 보이죠. 연기를 주고받는 건 혼자 찍는 신을 잘해내기 위해서도 필요한 태도 같아요.
문근영 감정이 계속 쌓여나가다가 폭발하는 거니까요. 정말 많은 도움이 되죠.
임수정 근영이와 저는 현장에서 눈만 마주쳐도 울었거든요. 제 얼굴을 찍을 때도 근영이가 울고, 근영이 얼굴을 찍을 때도 눈물이 저절로 났어요. 그러다 보니 혼자 촬영을 할 때도 더 몰입이 되더라고요. 정아 언니도 저를 많이 배려해줬어요. 에필로그에서 함께 연기하는 신을 찍을 때 정말 힘들었거든요. 엔지를 너무 많이 내서 그날 촬영을 결국 접어야 했고, 숙소로 돌아와서 엉엉 울었어요. 오케이를 빨리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와서 외로울 때 제일 중요한 게 상대 배우예요. 정아 언니도 그날 “괜찮아, 넘어갈 수 있어”라고 기다려주고, 다음날 오케이를 받은 후에도 엉덩이를 토닥여주며 마음고생 심했겠다고 위로해줬어요. 감독님과 수십명의 스탭에 다른 배우 눈치까지 보는 상황이 되면 정말 괴로워요. 그런데 오늘 안에 끝내기만 하면 된다며 토닥이고 버텨주는 배우가 있으면 연기적 버퍼링이 생겨도 결국 극복할 수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