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임수정, 문근영 “또다시 만날 작품을 기대한다.”
2023-04-13
글 : 임수연

또 다른 여성 서사를 기다리며

- <장화, 홍련>처럼 본능적으로 연기하던 시절이 그리울 때는 없나요.

문근영 그리워요. 배성우 선배님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너 <가을동화> 때 연기 진~짜 잘했어. 다시 하라고 해도 그렇게 못할 거야. 그런데 생각하고 고민하고 어느덧 연기에 대해 다 알게 됐을 때, 다시 그때처럼 똑같이 연기를 한다? 그러면 연기의 신이 되는 거야.” 그게 제가 가야 할 길이라고 하면서요. (웃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하겠다고 했죠.

임수정 요즘 그 길을 가고 있는 거야? (웃음)

문근영 응, 추구하고 있어. (웃음)

임수정 근데 근영이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옥> 시즌2도 정말 기대하고 있어요. 최근 연기 활동을 쉬어가는 동안 차곡차곡 내면에 쌓인 게 많을 거예요. 그게 어떤 캐릭터와 만났을 때, 특히 장르적인 작품을 만날 때 자기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것들이 있어요. 저도 <장화, 홍련>처럼 연기에 접근하던 시절이 그리울 때가 많아요. ‘나는 더이상 순수하지 않은 걸까?’ 이런 생각도 자주 들고. (웃음) <장화, 홍련> 때는 당시 제 모습과 수미 캐릭터가 너무 겹쳐서 고통스러웠는데, 그 뒤에 저와 닮은 인물과 만나 즐겁게 연기한 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연기 경험이 많아지고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더이상 순수한 캐릭터를 만날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만약 지금 근영이와 저에게 자신과 완전히 맞닿아 있는 작품을 만난다면 순수하게 혼연일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문근영 연기에는 답이 없잖아요. 이때는 이렇게 하니까 됐는데, 다른 때는 똑같이 해도 안돼요. 어떨 때는 이렇게 하니까 사람들이 좋다고 했는데, 다른 때는 안 좋다고 해요.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 <메리는 외박중> 그리고 연극 <클로저>까지 1년에 무려 세 작품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처음으로 연기가 무엇인지 회의감이 들었고, 모든 걸 쏟아내서 허무하기도 했어요. 그때부터 어떤 게 좋은 연기인지 모르겠다며 방황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건강 문제로 긴 휴식기를 가지면서 연기할 때 취하는 선택의 방향이 달라진 것 같아요.

예전에는 무조건 연기를 잘해야 한다는 에너지로 접근했다면, 지금은 살짝 내려놓고 ‘그냥 해보지 뭐’ 하는 여유가 생겼어요. 현장에서 상대 배우의 연기와 전체를 보는 눈도 생기고, 어떤 변수가 생겨도 당황하지 않게 됐어요. 본능적인 감정은 계속 갖고 있는 거니까 잘 재단하고 계산해서 표현하면 돼요. 어떤 변수에 내가 빨리 적응해가면서 내 것을 끄집어낼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차기작이 기대가 돼요. 역할이 커지면 어쩔 수 없이 작품 전체를 봐야 하는데, 이번에 맡을 역은 좀더 본능적으로 접근해도 괜찮을 것 같거든요.

- 경력 초기에 <장화, 홍련> 같은 작품을 만난 것이 이후 배우 생활에 미친 영향은 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문근영 배우는 아직 중학생일 때 누군가의 아역이나 딸이 아닌 주연 캐릭터를 연기했고, 임수정 배우는 <장화, 홍련> 이후 박찬욱, 허진호, 최동훈 등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거장 감독들과 연이어 작품을 했잖아요.

문근영 작품 자체도, 당시 현장도 마음 한구석에 선물 박스처럼 남아 있어요. 뚜껑을 열면 제가 좋아했던 감정과 기억과 사람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와요. 정말 행복했어요.

임수정 제가 그 나이 때 수미를 연기한 건 너무너무 큰 영광이고 행운이었어요. 그때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큰 예산이 들어간 여성 서사였고, 더군다나 지금 다룬다면 저예산 상업영화나 독립영화로 만들라고 했을지도 모르는 10대 소녀들의 이야기였죠. 여성배우들이 좋은 여성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작품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영화뿐만 아니라 OTT 시리즈도 좋아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양자경 배우가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여성 여러분은 황금기가 지났다는 말을 절대 믿지 말라”고 했잖아요. 저는 아직 희망적으로 보고 있어요.

- 오늘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앞으로 두분이 어떤 작품을 선택하고 연기할지 너무 궁금해지네요.

임수정 연기를 열심히 즐겁게 하던 때도, 조금 느슨하게 작품을 할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쉬어갈 때쯤 멀리서 본 근영이도 개인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그런 시간이 필요해요. 우리가 하는 일은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과정인데, 내 안에 뭔가 쌓여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자발적 아싸’에 돌입해 의식적으로 휴식기를 가졌어요. (웃음) 예전엔 언론의 평가, 업계의 평판, 대중의 말 하나하나를 받아들이느라 제가 너덜너덜해졌는데, 거리를 좀 두고 제가 좋아하는 것 위주로 삶을 채워나가다 보니 30대 때보다 지금 훨씬 단단해졌어요. 저만의 라이프스타일을 구축하면서 닫혔던 마음도 다시 열리고 연기에 대한 욕망이 다시 올라오는 거예요. 코로나19 때 너무 갑갑하기도 했고요. 아무리 힘든 현장이 닥쳐도 무너지지 않고 재미있게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는 저를 꺼내고 표현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40대 중반에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가 분명히 있으니까, 앞으로의 10년은 20대 때처럼 열심히 달려보고 싶어요. 그게 TV드라마든 상업영화든 예술영화든 주연이든 카메오든 유연하게 접근하고 싶어요.

문근영 저는 그냥 하루하루 재밌게 살고 싶어요. 옛날에는 연기가 제 인생에서 1순위였는데, 이제는 내 삶이 1순위가 돼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내 인생을 잘 살면서 하고 싶은 연기도 잘하고 싶어요. 예전엔 그때그때 제 마음이 따라가는 대로 작품을 선택했거든요. 이를테면 <바람의 화원>의 윤복을 선택했던 것은 윤복이 22살의 문근영에게 있었기 때문이에요. 연기로 내 삶을 살았고, 삶이 연기이자 연기가 곧 삶이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내 마음이 온전히 가지 않더라도 다른 이유가 명확하다면 서슴없이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임수정 그런 선택도 필요해요. 왜냐하면 온전히 나와 맞닿아 있는 캐릭터만 만날 수는 없거든요. 새롭게 도전하다 보면 저 깊숙이 어딘가에 나와 닮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돼요. 원래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연정인을 연기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없었는데, 민규동 감독님이랑 이유진 영화사 집 대표님이 제게 그런 면이 있다면서 설득하셨어요. 그래서 그분들을 믿고 용기를 냈어요. 하다보니 점점 입이 풀리고 제 안에 정인이처럼 독설가 같은 면이 있다는 걸 깨달았죠. (웃음) 모든 배우에게 작품은 사랑하는 사람 만나듯 인연이 닿아야 되거든요.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뭔가 설레고 심장이 뛰는 작품이 있다면 만나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 20년 만에 <장화, 홍련>을 다시 보니까, 한국영화계는 이렇게 좋은 배우들을 일찍 발굴해놓고 더 많은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문근영 배우는 아직 10대 때라 더 좋은 캐릭터를 연이어 만나지 못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30대의 임수정 배우가 <장화, 홍련>처럼 강렬한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작품을 자주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임수정 아무래도 영화에서 연기할 수 있는 여성 캐릭터의 연령대가 한정돼 있고, 더욱이 남성 캐릭터 중심의 장르영화가 더 많이 기획되고 만들어지다 보니 선택의 폭은 더 줄어들 수밖에 없죠. 한때는 ‘한국 영화산업은 왜 이렇게 평등하지 못하지?’라고 생각했는데 할리우드도 여전히 남자배우와 여자배우의 출연료 차이가 커요. 어디서나 벌어지는 일이라면 너무 마음 다치지 말고 포기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할리우드에서도 커뮤니티를 만들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직접 제작에 뛰어든 배우들도 많아요. 섹슈얼한 매력을 가진 금발 백인 미녀 캐릭터만 계속 들어오는 것에 화가 난 마고 로비가 제작사를 차리고 처음 만든 영화가 <아이, 토냐>였어요. 작품도 좋은 평가를 받고 연기상도 많이 받았죠. 근영이가 자신이 연기해 보고 싶은 캐릭터를 만나고 싶어서 직접 단편영화를 연출한 것도 무척 멋진 시도인 것 같아요.

문근영 내가 직접 보여줘야 사람들도 ‘아, 문근영에게 이런 모습도 있구나’라고 알 수 있으니까요.

임수정 그렇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캐릭터들을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아이디어가 많이 떠오르는 편이어서 프로듀싱 관련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늘 있는데, 영화 제작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문근영 재무가 보통 일이 아니에요. 그래도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저한테 주세요. (웃음)

임수정 스크립트를 써봐야겠어, 그치? (웃음) 최근 몇년간 “그냥 네가 제작사를 만들어”라는 말도 많이 들었는데, 이미 훌륭한 여성 제작자들도 어렵게 하시는 일에 그렇게 쉽게 뛰어들 순 없잖아요. 그래도 좋은 여성감독과 인연이 닿아 작은 영화부터 같이 만들어본다든지, 지금 나이대 근영이랑 연기도 같이하고 싶네요. (문근영을 바라보며) 영화가 아닌 TV시리즈여도 좋고, 굳이 자매가 아니어도 돼. 두 트랙의 여성 서사가 같이 흐르는 작품을 함께하면 어떨까.

- 이건 김지운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써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웃음)

임수정 김지운 감독님은 여성 서사에 항상 열려 있던 분이에요. 그런 면에서 존경해요.

문근영 김지운 감독님, 보아라!

임수정 아, 오늘 우리가 만났다는 걸 알면 엄청 반가워할 텐데. 근영이와 얼굴을 본 지 10년도 더 됐는데 이런 자리를 마련해줘서 심장이 콩닥콩닥했어요, 처음엔 ‘무슨 이야기로 시작하지?’라고 생각했는데 만나는 순간 모든 걱정이 사라졌어요. 우리는 정말 좋은 케미스트리로 연기했던 관계예요. 왜 그동안 만나지 못했을까, 라는 생각도 들어요. 도착하자마자 여기 오기 전에 있었던 일을 정신없이 얘기하는데 근영이가 아무 말도 없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더라고요. 안쓰럽고 반가웠어요. 영상으로 찍어서 감독님에게 보여드렸어야 했는데!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근영이는 똑같다고. (웃음)

문근영 20년 전 언니랑 지금 언니가 너무 똑같아서 울컥했어요. 앞으로 언니랑 다시 만나는 작품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임수정 꼭 좋은 작품에서 다시 만나자. 돌이켜보면 문근영처럼 좋은 배우가 거의 없었어요. 배우 대 배우로 또 연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렬해지네요. 어떤 작품에서 어떤 관계로 만나면 좋을지 오늘부터 생각해볼래요.

사진제공 바른손이앤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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