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되는 아이디어 조합하기
여래와 조나단이 마지막 결투를 벌이는 장소는 원래 공원이나 항만이었다. 하지만 촬영 당시는 2020년, 코로나가 극심하던 여름이었다. “떠나는 조나단을 습격하는 설정이었는데 코로나로 도시가 폐쇄되고 집합금지명령이 확산되던 때라 도저히 촬영이 불가능했다. 어떡하지, 고민하고 있던 때 숙소에서 이선균 배우와 TV를 보는데 홈쇼핑 채널이 나왔다. 마침 호스트가 이선균 배우의 친구였다. ‘우리도 홈쇼핑으로 가면 어때요?’” 그 홈쇼핑에 등장했던, 이선균 배우의 친구이자 실제 호스트가 출연해 홈쇼핑 스튜디오에서 마지막 대결을 완성했다. 원래는 종합운동장을 가득 메울 만큼의 여래바래 팬클럽을 동원하려고 했지만 상황상 인원을 대폭 축소해야 했다.
8대 지옥으로 불리는 ‘대초열지옥’ 불가마에서 조나단을 죽이자는 아이디어는 연출부 팀원이 냈다. 이원석 감독은 “처음 들었을 땐 ‘말도 안된다’고 웃었던 아이디어들”을 네모난 플래시카드에 하나씩 옮겨 적었다. “플래시카드를 쭉 펼쳐보니 아이디어의 톤이 제각각이었다. 이걸 한꺼번에 섞으면 어떻게 될까?” 이원석 감독에게 새로움이란 “기존에 있던 것을 새로운 조합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기존의 것을 비트는 것을 좋아한다. <킬링 로맨스>로 블랙코미디를, 영화라는 형식을 비틀어보고 싶었다.” 이게 무슨 로맨스인가, 심지어 이게 무슨 영화인가 싶은 반응까지 나름 감독이 의도한 비틀기인 셈이다.
B무비의 엇박자감
이원석 감독이 비주얼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긴 요소는 엇박자의 전개감이었다. “1, 2, 3 순서대로 가는 게 아니라 2에서 6으로 갔다가 다시 3으로 가는 식의 엇박자를 좋아한다. 그게 B무비의 묘미다. 로버트 로드리게스의 <플래닛 테러>에서도 중간에 필름이 불타잖나. ‘MISSING REEL’이라는 자막이 나오고 엔딩으로 가버리는, 그런 느낌을 살리고 싶었다.” 그가 말한 엇박자감의 매력이 담긴 장면은 뜬금없는 전개로 여길 수 있는 장면들이다. “‘왜 타조가 갑자기 저기서 나오지’, ‘쟤네들은 어떻게 저기까지 간 거지?’ 싶은 장면들은 편집할 때도 숏의 길이나 사운드를 오래 만지면서 나름의 박자감을 살리려고 애썼다.” 사고사로 남편이 죽거나 여래와 범우가 진짜 남편을 죽이는 엔딩은 오히려 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타조 엔딩이야말로 그가 추구하는 “엇박자감을 살리면서 결코 무난하지 않은 상업영화적 엔딩”이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타조를 도와 선행을 쌓은 덕에 얻어낸 도움으로, 서사적이거나 교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 점이 매력적”이었다고 <킬링 로맨스>의 제작자이자 <창궐> <공조>를 연출한 김성훈 감독도 말을 보탰다.
빅 브러더 조나단과 아무것도 못하는 범우
광고사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이원석 감독은 미디어가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알고 있다. “우리의 취향이나 좋아하는 것들은 누군가에 의해 컨트롤되는 경우가 많다. SNS를 통해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는 원리도 비슷하다. 그게 이 시대의 악이자 빅 브러더다.” 그래서 조나단을 그런 빌런으로 구상했다. 조나단은 H.O.T의 <행복>을 반복해 부르면서 행복의 정해진 상태를 강요한다. 그런 세계에서 사수생 범우의 순수함은 조나단이 컨트롤할 수 없는 요소다. 범우는 여래를 괴롭히는 조나단을 대신 죽이겠다고 제안한다. 여래의 팬으로 그녀의 행복을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나서지만 범우는 ‘사람을 진짜 죽일 순 없다’는 이유로 ‘존나(John Na) 죽이는 작전’에 가장 훼방을 놓는다. 이런 범우를 이원석 감독은 “진정한 해결사”라고 봤다.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은 순수한 마음,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 없는 모습을 그대로 그리고 싶었다. 처음에 여래는 자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범우를 통해 ‘혼자서라도 하겠다’며 자기 인생을 바꾸려고 노력한다. 범우가 직접 조나단을 죽이지 않고 여래를 변화시킨 것만으로도 해결사 역할을 한 셈이다. 때때로 무언가 순수하게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용감하게 나설 때가 있잖나. 그런 모습이 나나 주변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고 생각했다.”
크리에이티브는 체험에서 나온다
“누군가는 좋아할 거고 누군가는 싫어할 수 있는 영화다. 욕하더라도 극장에 와서 한번 보고 얘기했으면 좋겠다.” 이원석 감독이 <킬링 로맨스>로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다른 체험’이다. “‘자연농원’에서 호랑이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내 아이만 봐도 무언가 새로운 걸 경험하기 전에 이미 유튜브로 다 본다. 아는 걸 확인하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은 감흥이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쉽게 찾은 정보들을 답처럼 갖고 있다. 크리에이티브는 체험에서 나온다. 앞으로도 재미있는 시도를 하고 싶다. 이게 누군가에게는 ‘이렇게도 할 수 있네?’라는 자극이 되지 않을까. 나 역시 70년대 B무비를 통해 배운 게 그거다. <킬링 로맨스>는 영화 자체를 비튼 것만으로도 일종의 반항을 했다고 생각한다. 조나단으로 상징되는,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컨트롤하고 획일적인 모양을 강요하는 것들에 비틀기로 대응해보고자 했다.” 만든 이의 의도는 이러하다. 사용 후기는 이제 관객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