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식, 구병모, 남유하, 박문영, 연여름, 천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의 새 SF 앤솔러지 시리즈 <SF 보다>가 출간되었다. 1호는 ‘얼음’이 주제다. ‘얼음’은 물이 언 고체 상태를 가리킬 수 있고, 기후 위기와 맞물려 지구에 빙하기가 왔다는 테마를 뜻할 수도 있을 것이고, 나아가 이 세계에 거대한 재앙이 닥쳐 세상 자체가 파괴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구병모 작가의 <채빙>에는 ‘사한’(司寒, 얼음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신)이 등장한다. 얼음이 거의 없는 미래 세상의 인간들은 통 속 투명한 존재로 처리된 ‘나’를 사한으로 모시며 종교 제의를 벌인다. 그들에겐 얼음을 캐는 행위가 너무나 중요하다. 그렇지만 사실 ‘나’는 신적인 존재와는 거리가 먼 과거 세상의 인간일 뿐이다.
박문영 작가의 <귓속의 세입자>는 우리 세계의 일상적 열기가 얼마나 뜨겁고 불편할 수 있는지, 그 뜨거움 속에서 ‘나’를 지키고 또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2034년의 월드컵 축구 경기를 배경으로 이야기한다. 또 연여름 작가의 <차가운 파수꾼>은 영구동토층마저 녹기 시작하여 이주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추위를 지켜주는 신과도 같은 차가운 파수꾼을 지켜나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편 차가워진 세상이 배경인 단편도 있다. 남유하 작가의 <얼음을 씹다>는 먹을 것이 없다 보니 사람이 죽으면 바로 식재료로 취급하는 세상에서, 차마 가족을 먹지 못하는 주인공의 심리적 갈등을 그린다.
‘얼음’을 얼음땡 게임처럼 해석한 곽재식 작가의 <얼어붙은 이야기>는 교통사고로 죽기 직전에 ‘생사귀’가 나타나 시간을 얼린 듯 멈추고 인간의 생과 사를 논한다. 인간의 목숨 하나 살리려면 별 몇조개를 없애야 하는데 그럴 가치가 있느냐는 능청스러운 생사귀의 말은, 책을 여는 서문 ‘하이퍼링크’에 등장한 ‘챗지피티’의 일화와도 이어진다. ‘얼음’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아질 것 같냐고 챗지피티에 묻자, 그렇다고 하며 세 가지 이유를 제시했단다. 그 이유는 1. 기후변화 2. 생존과 모험의 테마 3. 신비롭고 기괴한 느낌 때문이다. 신비롭고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인 생존의 이야기들이 담긴 이번 앤솔러지에 이어 다음은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지 기대된다.
42쪽“아까 우리가 이야기했던 대로, 이런 삶 하나를 위해서 은하계 몇개를 희생해도 된다고 생각하기도 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