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책의 첫장을 연다는 것은 누군가의 세계로 발을 디디는 일이다. 섬세하게 세공한 인물의 세계, 주인공들이 겪었던 계절의 잔향과 내면을 같이 겪어보겠다고 더듬더듬 들어가보는 것이다. 잘 직조된 세계에서 주인공이 겪는 불행은 읽는 사람을 함께 괴롭게 하기도 하고, 때문에 소설의 문을 닫고 나오면서도 그 속에 ‘두고 온 인물’의 행복을 기원하게 된다. <두고 온 여름>의 마지막 장을 닫으면서도 마찬가지다. 기하와 재하 형제가 함께 병원에 다녔던, 그 여름을 함께 읽은 독자는 어른이 된 소년들이 앞으로 겪어낼 여름이 부디 눈부시고 푸르기를, 얼룩이 남은 마음 언저리가 이제는 부디 평안하기를 바라게 된다. 이는 작가가 자신이 만든 인물을 창조주로서 충분히 사랑하고 애틋해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사진관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고등학생 기하에게 어느 날 갑자기 동생이 생긴다. 새어머니, 여덟살 터울의 남동생 재하와 함께 살게 되면서 기하는 급결성된 가족 연기가 어색하다고 여겨진다. 새어머니는 기하와 친해지려 노력하고, 동생 재하 역시 마찬가지지만 기하는 둘에게 좀처럼 틈을 주지 않는다. 그렇게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4년을 함께 살지만 기하는 어떤 날의 여름 소풍을 계기로 가족에게서 영영 떠나버린다. “저는 혈연관계가 아닌 이들이 가족이 되는 이야기를 주로 써온 것 같아요. 이번 작품을 쓰면서는 가족이 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는 이들도 있겠구나, 서로를 향한 이해를 시도로만 남기고 돌아보며 후회하는 이들도 있겠구나, 생각했어요.”(153쪽) 성해나 작가의 말은 <두고 온 여름>에 대해 작가 스스로 내놓은 적절한 소개다. 무엇보다 소년들이 함께 보냈던 여름의 일정 시간을, 소설은 흐리게 인화된 필름 사진처럼 서술한다. 일부는 따뜻한 빛으로 남아 평생을 살아갈 이유가 되어주지만, 타인에게 상처줬던 기억은 좋은 추억마저 바래지게 한다. 작가가 쓴 어느 여름의 풍경도, 소설 속 인물의 행복을 바라게 되는 독자의 마음도 결국은 누군가를 이해해보고 사랑해보려는 안간힘일 것이다. 지금 시대에 참으로 귀하고 드문 바로 그 마음.
58쪽
비정에는 금세 익숙해졌지만, 다정에는 좀체 그럴 수 없었습니다. 홀연히 나타났다가 손을 대면 스러지는 신기루처럼 한순간에 증발해버릴까, 멀어져버릴까 언제나 주춤. 다가설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