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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슬픔의 삼각형’, 신(新)유한계급론
2023-05-31
글 : 송형국 (영화평론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솔직해지자. 인류는 안다. 신자유주의의 엔진을 장착한 자본주의호(號) 밑바닥에 구멍이 뚫린 지 오래라는 걸. 균열 신호는 20세기에만 여러 차례 있었다. 2008년에 이르러 더이상 경고가 아닌 무거운 증상으로 글로벌 금융 위기가 나타났다. 기축통화국인 미국의 경제 시스템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점은 정직한 경제학자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미국은 말할 것 없고 20세기에 설계된 유럽 복지국가 모델 역시 곳곳에서 물이 샜다. 신자유주의에 국경이란 없으니 그 폐해가 북유럽이라고 해서 비켜가지 않았다. 불평등은 구조적인 데 비해 복지는 임시방편적이었다. 국민을 통합하는 순기능보다 수혜자와 시혜자로 가르는 역기능이 상대적으로 커졌다. 그러는 와중에 유튜브를 포함한 소셜미디어 기업과 이를 구현하는 스마트폰 제조업체들이 세계를 호령하게 됐다. 알고리즘은 사람들의 생각을 갈랐다. 2022년 현재 전세계 10대 부자 중 7명이 소셜미디어와 온라인쇼핑 등 디지털 알고리즘 경영과 관련된 미국인이다. 이제 인류 개개인은 각자가 원하는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는 듯 보이지만, 비슷비슷하게 생긴 디바이스에서 나오는 본질적으로 비슷비슷한 소비 콘텐츠를 손바닥 안에서 들여다볼 뿐이다. 여기에 중독되는 일이 뇌과학적으로 마약중독과 다를 것도 없다는 점 또한 인류 역사에 견줄 때 우리는 빨리 알아차렸다.

2010년 이후 기후 위기는 장래가 아닌 현재의 문제가 됐다. 역시나 국경이 따로 있는 위기가 아니었다. 기후가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변하고 있다는 점은 이제 음모론 신봉자를 제외하면 문명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받아들이고 있다. 코로나19가 전세계를 휩쓸자 우리는 대량생산·대량소비 위주의 경제 시스템이 생태계를 훼손한 탓에 기후도 바뀌고 감염병도 돋운다는 과학적 사실을 그다지 오래지 않은 시간 안에 학습하게 됐다. 그런데 여기까지다. 많은 이들이 이거 정말 큰일 났다며 배에 차오르는 물을 열심히 퍼내고 있지만, 구멍난 배 밑바닥을 손보거나 배를 갈아탈 생각은 하지 못한다. 어쩌면 배 밑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초호화 크루즈는 현재 그렇게 운항 중이다. 어떤 부자들이 눈앞의 산해진미를 최대한 우아한 자세로 입에 넣느라 진짜 위기를 애써 외면하는 것처럼. 이상 <슬픔의 삼각형> 중 2부 ‘요트’에 대한 나름의 해제였다.

구멍난 배에서 물 퍼내기

소스타인 베블런을 빌려 말하자면 <슬픔의 삼각형>의 요트에 모인 부자들은 영락없는 유한계급(有閑階級, leisure class), 돈이 너무 많아 ‘한가로움만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상대방에게 예의를 갖추고 과시적 소비를 품위 있게 한다. 크루즈 고객 중 슈퍼리치가 아닌 인물은 SNS 인플루언서인 패션모델 야야(샬비 딘)와 그의 남자 친구 칼(해리스 디킨슨)뿐이다. 그들은 홍보 협찬을 받아 이 배에 올랐다. 노동으로 돈을 벌어야 하는 이들이 이 영화의 전제, 즉 1부 ‘칼&야야’의 문을 여는 주인공이라는 점에 우선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레스토랑에서 누가 계산할지를 놓고 성역할을 들먹이며 말꼬리를 붙드는데, 3부까지 보고 나면 1부에서 둘의 다툼과 고민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었는지를 떠올리며 탄식하게 된다.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태도와 존중을 주장하며 언쟁하는 대목은, 2부에 등장하는 부자들을 보며 되짚어보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노동에 빼앗기는 사람들이라면 예절을 습득하기 힘들다. 따라서 세련된 취미, 예절, 생활습관은 상류계급에 속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용한 증거”(소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1899))라는 견해의 현대판 영상 버전으로 볼 수 있다. 두 연인의 위태로운 관계는 그들의 처지뿐 아니라 현생 인류의 당면 위기에 대한 압축적인 비유다.

솔직한 이들은 진작부터 자본주의에 경고를 보내왔고 그 최전선에 경제학과 사회학, 과학과 예술이 있었다. <유한계급론>이 출간된 지 123년 만인 지난해 노벨 경제학상은 글로벌 금융경제의 취약성을 경고한 더글러스 다이아몬드 교수가 수상했다. 같은 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은 숨만 쉬어도 자산이 불어나는 부자들의 기괴한 우화인 이 영화에 돌아갔다. 극 중 러시아 과두재벌 부부가 칼과 야야에게 조언한다. “돈 있으면 절대 묵혀두지 마요. 돈은 굴려야 해.” 러시아 비료 산업을 독점해 스스로를 “똥의 왕”이라 부르는 그의 아내는 극 중 45분 뒤 범람한 변기의 똥물 속에서 허우적댄다. 역류하는 변기 장면과 다리미 같은 돈으로 구김살을 편 부자들을 보며 <기생충>을 떠올리지 않기도 어려운 일이다. 갑판에서 상의를 벗어 야야의 눈길을 끈 직원이 영문도 모른 채 해고되는 대목 역시 마찬가지다. 봉준호 감독이 황금종려상을 받던 해 노벨 경제학상은 불평등이 치유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으니 기본소득 제도처럼 새로운 발상이 도입돼야 한다는 논지를 펴온 아비지트 배너지·에스테르 뒤플로 부부가 받았다. 인류는 그들을 칭송한다. 고장난 자본주의호에 몸을 실은 채. 이만큼 경고를 받고도 전환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변화를 원하지 않는 이들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고, <슬픔의 삼각형>의 멀미는 말해주고 있다.

부뉴엘의 후예가 날리는 직격탄

칼과 야야가 객실에서 다정하게 포옹하는 중반부, 칼은 고객을 응대하는 승무원인 척하며 역할 놀이를 한다. 다음 장면에서 러시아 재벌 부인은 서빙 직원에게 역할을 바꿔 풀에서 수영하라고 ‘명령’한다. 루이스 부뉴엘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에 나오는 지역 교구의 주교 신부처럼 옷을 바꿔 입는다고 계급까지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저 불편한 수영에 동원될 뿐이다. 우리는 식당칸과 엔진칸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피부색을 보고 나서야 직원들 사이에도 계급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알코올중독인 선장은 이미 고주망태 상태이고 직원 중 가장 난감한 이는 중간 관리자다. 현대사회의 잘못 돌아가는 조직에 대한 적절한 뜻풀이이기도 한 이같은 인물 구성은, 악당은 아닌 기득권 엘리트들과 성실한 실무 관리자가 만나 침몰하는 배를 본의 아니게 방치하는 메커니즘을 꿰뚫는다. 베블런이 그랬듯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누구도 편들지 않고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이것이 더 서늘한 공격법이라 볼 수도 있고 냉정한 관찰이라 말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외스틀룬드는 현재 활동하는 유력 감독 가운데 누구보다 부뉴엘식 접근법을 사회비판적으로 구사하는 연출자다. 수류탄이 주력 상품인 사업체를 운영하며 “전세계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조용하고 금실 좋은 사장 부부가 다름 아닌 자사 제품으로 해적들에게 공격당하는 장면에 이르면, 외스틀룬드를 ‘직격탄 날리는 부뉴엘’ 정도로 표현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베블런식으로 한번 더, 이 영화의 2부가 약탈 자본주의의 준평화단계를 거쳐 당도한 신자유주의 시대의 우화라면, 3부 ‘섬’은 가까운 미래 야생 회귀 시대를 그린 상상화다. 인류는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전쟁을 치르거나 총기 난사를 벌이고 있고 당장 어떤 독재자가 핵무기 발사 버튼을 누를지도 모른다. 이런 세상에서 재러드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세계 석학들은 인류를 위협할 위기로 기후 위기, 불평등 위기와 함께 핵 위기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소수의 인류가 살아남아 야생으로 돌아갔을 때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는 3부의 풍경은, 뜻밖에도 불 피우고 사냥할 줄 아는 권력자 아비게일(돌리 드 레온)을 여성이자 유색인종으로 설정함으로써 2010년대 이후 영화예술의 흐름에 또 한번 전복을 꾀한다. 거칠게 나눠 이 영화의 1부가 심리학, 2부가 사회경제학이었다면 3부는 인류학인데 1, 2부에서 차곡차곡 다져온 계급사회론과 성역할론 등을 본성의 영역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단단한 삼각형을 완성 짓는 모양새다. 이런 가운데 남성이 생존을 위해 성상납하는 상황,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이뤄질 때 고전적 이분법을 탈출하려는 모색 등 3부의 이야기는 적잖은 논쟁을 낳았다. <월스트리트 저널> 등은 이 영화에 만점을 준 반면 <뉴욕타임스>는 별점 1개 반, <가디언>은 별 2개를 준 다음 혹평을 아끼지 않았다.

재난시대의 일상회복이란

이 영화의 전제인 칼과 야야 커플이 1, 2부에서 종종 성역할을 놓고 언쟁을 벌였으므로, 외스틀룬드는 3부가 가져올 논쟁을 피할 생각이 없다. 아니 적극적으로 논쟁을 유도한다. 나는 <오징어 게임>에서 여성 인물이 생존과 성을 맞바꾸고는 마치 논개를 본받는다는 듯 악당과 스스로를 동반 살해하는 설정에 동의하지 않는데, <슬픔의 삼각형>이 부르는 논쟁은 이와는 다른 층위에 있음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외스틀룬드 감독은 현재 주류 담론이 빠뜨리거나 외면하는 문제는 무엇인지, 당위나 정의에 대한 확신이 어떻게 건강한 토론을 방해하는지 등을 질문 목록에 올림으로써 <더 스퀘어>부터 그가 줄곧 취해온 태도, 즉 인물의 딜레마를 한계상황까지 몰고가는 자세를 유지하려 애쓰는 것이다. 영화는 문명사회로 돌아갈 엘리베이터를 발견하는 두 인물로 일시적 기득권자 아비게일과, 과거의 인플루언서 야야를 설정한 다음 이들을 향해 달려가는 칼을 배치한다. 현상 유지를 바라는 자와 일상회복을 원하는 자, 그리고 둘 사이에서 관객의 논쟁을 부른 자가 이루는 ‘슬픔의 삼각관계’다. 새로운 리더십의 독재 성향과 애초에 유한계급이 아닌 경계적 인물, 그리고 독재 치하 하급관리와 비슷한 남성이 각자의 자리에서 딜레마 상황을 상상하게 해준다.

이를 통해 영화가 제시하는 질문 목록에는 꼬리를 물고 항목이 더해진다. 재난 상황 이후 우리는 무엇을 꿈꾸는가. 기후·불평등·핵 위기 상황의 현상 유지를 바라는 자들은 누구인가. 선량한 이들은 일상회복을 바라며 사실상 재난의 원인을 제공한 시스템으로 회귀할 것인가. 21세기형 유한계급을 양산하고 생태계 위기를 부른 과거로 선뜻 돌아갈 것인가. 이대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되돌아간다면 우리는 지난 3년여간의 실체적 재난 상황에서 무엇을 배운 걸까. 이미 집단 망각 상태에 접어든 걸까. 어쩌면 ‘H&M’과 ‘발렌시아가’ 사이에서 패션모델의 표정을 달리 해보는 농담 같은 장난처럼, 스스로를 상품 가치로 만드는 환경에 적응하며 생존해갈까. 당신은 호화 리조트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수 있을까. 승강기에 오른 뒤 우리 앞엔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유례를 찾기 힘든 5월의 폭염 속에서, 올해 칸영화제는 어떤 선택을 할까. 분명한 건 당분간 영화예술의 굵직한 경향 중 하나는 <기생충>과 <슬픔의 삼각형>을 잇는 선상에서 인류에 경고를 이어갈 것이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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