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본 칸트>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을 각색한 프랑수아 오종의 장편영화. 제목의 차이가 암시하듯 오종의 영화는 두 주인공의 성별을 바꿔 두 남자의 멜로를 중심에 둔다. 영화는 성공한 중년의 영화감독 피터(드니 메노셰)와 성공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는 청년 아미르(칼릴 벤 가르비아) 사이에서 길항하는 사랑의 권력관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프티부르주아에 대한 풍자와 매체에 대한 성찰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무대와 백스테이지, 촬영장과 편집실이 다소 산만하게 뒤섞이는 공간에서 ‘영화에 대한 영화’가 효과적으로 성립하는지는 의문이다.
<언더 더 스킨>
올해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조너선 글레이저의 장편영화. SF영화의 관습을 해체한 이 대담한 시도로부터 어느덧 10년이 지났지만 <하이 라이프>나 <놉>을 제외하고는 장르의 규칙을 뒤흔드는 시도가 거의 감지되지 않는 듯하다. 마이클 파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언더 더 스킨>은 인간을 사냥하는 외계인 로라의 여정을 따라간다. 외계인이라 쓰고 있지만 사실 영화에는 외계라는 말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텅 빈 구멍 같은 로라(스칼렛 요한슨)의 얼굴이 있을 뿐이다. 그의 신작을 기다리며, 감각을 통한 영화적 체험을 가능케 했던 전작의 성취를 상기해보는 것은 어떨까.
<유령과 뮈어 부인>
조지프 L. 맹키위츠의 1947년작 영화. 남편과 사별한 루시(진 티어니)는 새 출발을 위해 바닷가의 별장을 싼값에 빌린다. 별장에는 선장 그렉(렉스 해리슨)의 유령이 머물고 있다. 유령의 성질에 대한 고전적 탐구이기도 한 이 영화가 현재의 자리에서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오늘날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은 멀티버스가 삶과 죽음의 비가역적 경계를 가볍게 넘나들면서 유령이라는 사이 존재들의 자리를 거의 소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최근에 개봉한 <카일리 블루스>가 고전적 시네필의 영화처럼 느껴지는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보라>
<파산의 기술> <얼굴들>을 남긴 이강현 감독의 다큐멘터리다. <보라>는 산업안전보건법상 명기된 ‘현장보건관리’의 현장을 1년간 쫓으며 촬영한 영상으로부터 시작해 농민의 신체와 자본주의의 시스템에 대한 탐구까지 아우르는 노동의 통증에 대한 사회학적 보고서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인 2시간14분은 노동하는 신체가 어떤 조작이나 개입 없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현전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보라>를 보는 것은, 단지 영화를 보는 행위만으로 보이지 않던 존재들을 위한 대안적 시간을 지금-여기에서 (다시) 일으키고 있다는 착각이 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