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그 여름’ 한지원 감독, 관객과 동시대의 감성을 공유한다
2023-06-08
글 : 조현나
사진 : 오계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원령공주>를 좋아해 애니메이션의 길을 걷기 시작”한 한지원 감독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2학년에 재학할 당시, 단편 <코피루왁>으로 서울인디애니페스트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이어 26살에 단편 <코피루왁> <학교가는 길> <럭키미> <사랑한다 말해>를 엮은 옴니버스 장편 <생각보다 맑은>을 개봉하며 ‘최연소 극장애니메이션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얻었고, 신작 단편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로 서울인디애니페스트2022에서 또 한번 대상을 거머쥔 뒤 선댄스영화제 단편경쟁에도 진출했다. <그 여름>의 개봉을 앞두고 새로운 장편 준비로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다. 다양한 작화 스타일을 자유자재로 운용할 줄 아는 한지원 감독은, 그 누구와도 비할 바 없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가고 있다.

- 여름을 좋아하지 않나. 그간의 일러스트레이션이나 작품을 보면 여름의 활기가 느껴질 때가 많다.

= 그렇다. 여름만 기다리면서 산다. (웃음)

- 최은영 작가의 소설을 좋아한다고. <그 여름>도 일찍이 접했던 건가.

= <쇼코의 미소>를 정말 좋아했고, <그 여름>이 수록된 <내게 무해한 사람>은 OTT 플랫폼 라프텔에서 같이 작업한 분들이 “이 단편들 중에서 하면 좋겠다”고 제안한 후보 중 하나라 그때 읽었다. 그중 <그 여름>이 가장 마음에 들어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

= 시작 부분에선 풋풋한 청춘물이구나 했는데 주인공의 자기 성찰이 점점 처절하다고 여길 정도로 솔직해지더라. <쇼코의 미소>에서 좋아했던 작가님의 결과 비슷해서 좋았다. 고등학생 소녀의 시선에서 사랑이 양가적으로 그려지는 게 좋았고, 이런 감정을 나 역시 느껴본 적 있다는 확신이 들면서 ‘내가 연출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 소설을 영상화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공지영 작가의 <딸에게 주는 레시피>를 영상화했을 때와 이번 작업은 어떤 차이가 있던가.

= <딸에게 주는 레시피>는 에세이고 요리법도 소개하는 포맷이라 한편 한편을 단편애니메이션처럼 연출했고 화자의 심정을 잘 드러내기 위해 자체적으로 주인공을 설정했다. 반면 <그 여름>은 정극으로 인식했다. 단편임에도 서사가 세부적이고 풍부했는데 이를테면 이경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겪는 변화가 수이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소설이 다큐멘터리처럼 감정을 응시하듯 묘사됐다면 애니메이션은 보다 시간성을 드러내면서 사건을 연출해야 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각색이 들어갔다.

- 캐릭터는 어떻게 잡아갔나. 생각보다 외형 묘사가 간결해 감독의 상상으로 채운 부분도 있을 텐데.

= 소설을 읽으면서 인물들의 조형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편이다. 이경은 이미 머릿속에 나름의 이미지가 정해져 있었다. 수이는 까무잡잡한 피부와 거칠게 일어난 입술에 대한 묘사가 있었고, 눈동자가 갈색이라 명시된 이경보다 더 어두운 색의 눈을 가졌겠다고 여겼다. 또 꾸미지 않은 모습들, 이경과는 다른 세계에 있는 친구 같다는 표현들을 살리려고 했다.

- 장편애니메이션으로 재편집되기 전, <그 여름>은 라프텔에서 7부작 시리즈물로 먼저 공개된 바 있다. 시리즈물에 도전한 것도, 기획과 제작을 분리해 작업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 평소 내가 정말 좋아하고 존경하는 애니메이션 회사인 레드독컬처하우스와 협업했다. 개인 프리랜서 감독으로서 이렇게 개인 대 업체로 작업을 해본 건 처음이었다. 내가 직접 설계를 하고 애니메이팅을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이번엔 회사와 많은 부분을 분담했다. 나의 예술적인 비전을 시스템화해서 전달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협업과정에서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 그래서인지 작화 스타일이 기존의 작품과 다르다. 반면 이경의 방과 같은 배경 일러스트레이션에서 한지원 감독의 분위기가 더 잘 드러난다.

= 정확하게 봤다. 프리프로덕션은 거의 내가 하고 메인을 레드독에서 했지만, 그중 일부 배경은 내가 그린 그림들이 들어갔다. 프리 단계에서 샘플 배경을 그리는 ‘키 비지’ 작업을 정말 열심히 했다. 배경 묘사가 중요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최은영 작가님에게 장소를 여쭤보고 이천의 장호원으로 답사를 갔고 예쁜 학교와 다리 등 소설 속 아이들이 갔을 법한 곳들을 찾았다. 이경이 여기서 이렇게 걷고 수이가 저기서 공을 차는 설정이면 좋겠다, 저 즈음에 이경이 앉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사진을 찍었다.

- 소설을 영상화하며 생략해야 하는 부분이 많았을 텐데 이경과 수이의 감정선만큼은 섬세하게 묘사했다.

=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봤다. 후반부에 둘이 싸우는 신을 연출하는 게 개인적으로 정말 재밌었는데, 둘이 서로에게 서운함을 표할 때의 미묘한 감정들에 공감이 됐다. 수이를 두고 마음이 흔들리는 이경이 스스로 자책하지만, 소설은 이를 평가하지 않고 그의 마음을 그대로 담는다. 어쩌면 그게 내가 이 작품을 하고 싶은 이유였던 것 같다. 이렇게 캐릭터의 레이어를 생각하면서 감정을 표현하게 되니 그 신에 푹 젖어서 작업했다.

- 선우정아와 김뜻돌, 정우 등 사운드트랙 라인업이 눈에 띈다. 개인의 취향이 반영된 것인가.

= 음악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서 의견을 많이 낸다. 애니매틱이라는 비디오 콘티 단계에서부터 음악을 꼭 삽입하는 편인데, 선우정아의 <도망가자>는 그때부터 넣었고 ‘나중에도 꼭 쓰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김뜻돌의 <아참,>은 가사가 정말 재밌다. (웃음) ‘네가 좋아하는 그 여자애가 사실은 여자를 좋아한다’란 맥락의 내용이 있어서 레즈비언 클럽의 파티에서 재생되도록 했다. 메인 OST <그 여름>을 작업한 싱어송라이터 정우와는 예전에 스톤헨지 광고를 만들 때 협업을 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나와 영혼의 파장이 잘 맞는 분이라고 생각해서 (웃음), 꼭 엔딩곡을 맡아주셨으면 한다고 음악감독님께 말씀드렸다.

- 신작 단편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가 지난해 서울인디애니페스트에서 대상을 탔고, 선댄스영화제에도 초청을 받았다.

= 큰 해외영화제에 선정돼서 다녀온 건 처음이라 긴장이 됐다. 주인공이 겪는 지극히 한국적인 고난을 해외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왜 저렇게 가족을 신경 쓰며 주변 환경에 매인 채 더 진취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지 관객이 아쉬워하진 않을까 싶었는데 많이들 공감해주시더라. 역시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나보다. (웃음) 더 자신 있게 해도 되겠다는 확신을 얻었다.

- 개인 작업을 발표하는 틈틈이 아시아나항공과 스톤헨지와의 협업 광고, 가수 나이트오프의 뮤직비디오 등을 작업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광고라 할지라도 감독 고유의 색을 잃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 사실 광고와 같은 상업적인 협업 프로젝트는 본업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일정이 가능할 때만 조금씩 하는 편이다. 그때마다 자유도가 높은 프로젝트를 주로 고른다. 기획부터 스토리, 그에 맞는 비주얼까지 직접 할 때 작업하면서도 재미를 느낀다.

- 과거 여러 인터뷰에서 장편애니매이션을 꼭 연출하고 싶다고 밝혔다. 장편 <그 여름>이 개봉을 앞뒀고 새 장편 <이 별에 필요한>을 작업 중에 있다. 감회가 남다르겠다.

= 언젠가 장편애니메이션을 하고 싶다는 꿈은 있었지만, 그 ‘언젠가’라는 시점을 떠올릴 때마다 과연 내가 준비가 되어 있을지 항상 의문이었다. 그런데 <그 여름>을 통해서 큰 규모의 스튜디오, 디테일이 좋은 파트너들과 일하며 정말 많은 것을 얻었다. 꾸준히 나만의 이야기를 구상하고 틈틈이 광고 작업을 하더라도 비주얼에 대한 욕심을 놓지 않았다. 그러면서 조금씩 퍼즐이 맞춰져온 느낌이 든다. 어렵고 힘들지만 내가 지금 뭘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 상태는 아니다. 하루하루 도전하되 맞는 곳에 서 있다는 느낌이랄까. <이 별에 필요한>을 작업하면서도 클라이맥스 스튜디오라는 좋은 스튜디오와 실력 있는 스탭들을 만났다. 이제 더이상 변명할 게 없다. 나만 잘하면 된다. (웃음)

- ‘한국의 신카이 마코토’라는 평이 종종 따라붙는데 정작 본인은 그걸 부담스러워한다고. 자신의 이름 앞에 새롭게 붙길 바라는 수식어가 있나.

= 동시대성이라는 키워드를 좋아한다. <그 여름>도 2000년대 초반이 배경인데 요즘 그 당시의 요소들이 다시 유행하지 않나. 그 미묘한 유사성들을 표현하면서 정말 재밌었다. <이 별에 필요한>은 미래의 이야기지만 1990~2000년대 초반의 것이 현재 유행하는 것처럼, 미래에도 지금의 미학적이고 정서적인 부분이 유행할 수 있다고 생각해 캐릭터를 디자인할 때, 음악을 설정할 때도 현재의 것들을 반영하고 있다. 나는 내가 소구하고자 하는 타깃의 관객층과 나이대가 비슷하고, 시대의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 동시대적인 감성을 잘 아는 감독으로 기억해주시면 제일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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