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멘탈>은 물, 불, 공기, 흙 등 4원소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엘리멘트 시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앰버(리아 루이스)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이주를 결정한 부모 밑에서 자랐고,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부모의 제한적인 시야에 익숙하다. 시내에서 불 원소를 위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아버지는 물 원소 손님을 앞에 두고도 “물을 잘 감시해야 돼! 물 튀기면 변상해야지”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내뱉고, 물 때문에 불씨가 꺼질까 두려운 앰버는 늘 불의 마을(파이어 존) 안에서만 안전하게 이동한다.
언뜻 보기에 엘리멘트 시티는 네 원소가 뒤섞여 평화로운 삶을 유지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원소별 지역 점유도에 따라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이 형성돼 있다. 마치 이민자가 모여 과거의 미국을 완성했듯, 4원소는 ‘원소 N차 대이동’에 맞춰 엘리멘트 시티로 모여들었다. 그중 상대적으로 늦게 들어온 불은 정착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들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민자 1세대인 앰버의 부모는 모든 걸 태워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집을 구하는 데 애를 먹는다. 도시의 기차가 오고 갈 때마다 웅덩이의 물줄기가 불의 마을로 쏟아져도 이에 대한 도시 개발은 따로 진행되지 않는다.
불평등과 차별의 답습
그러니 앰버 가족의 날 선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이들의 삶은 차별의 역사로 가득하고 관용이나 공동체, 소속감에 대한 경험이 전무하다. 특히 이들은 자신과 상반되는 물의 무신경함에, 혹은 무신경할 수 있는 계급 차에 이골이 나 있다. 오히려 앰버 가족이야말로 도시 곳곳에 숨은 일상적 차별을 용해하는 민간 대안의 시작이자 돌파구에 가깝다. 앰버네 식료품점 ‘파이어 플레이스’를 중심으로 불의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확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연민을 기반으로 한 성공은 자기만의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기 마련이다.
불인 것과 불이 아닌 것을 가르는 행동은 앰버의 내집단 안에서 더욱더 견고해졌다. 이러한 태도를 답습하듯 앰버는 “이 가게는 곧 네 가게가 될 거란다”라는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복사하여 “나중엔 제 가게가 될 거래요”라는 말을 반복한다. 부모의 태도는 곧 앰버의 태도가 되고, 가족의 목표 또한 앰버의 목표가 된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중요한 결정에 다다르기까지 응당 있어야 할 고민의 과정은 싹둑 편집된 채 앰버는 결론만 생각할 뿐이다.
그런 앰버 앞에 나타난 물의 원소 웨이드(마무두 아티)는 앰버가 지금껏 경험한 적 없는 인물이다. 둘은 모든 게 정반대다. 성미가 급하고 열정적인 앰버와 달리 웨이드는 눈물이 많고 타인에게 수용적이다. 이러한 성향 차는 환경적 차이에서도 비롯한다. 식료품점과 같은 건물에서 살아가는 앰버네 거주 환경은 가드까지 배치된 웨이드의 널찍한 아파트 생활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앰버는 외출 내내 자신의 불꽃을 꺼트릴지 모르는 물줄기를 피하기 위해 우산을 상비해두지만 정작 도시는 불의 어려움을 모른다는 듯, 길거리 어디에도 우산 가게나 방수용품 가게를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교육 수준에서도 극명한 차이가 드러난다. 웨이드의 가족 내엔 당장 생존이 급급하지 않은, 예술대학을 졸업한 여러 구성원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웨이드도 엄연한 시청 공무원이다. 이들은 휴일에 모여 게임을 즐길 정도로 화목하나 앰버의 부모는 이민 과정에서 원가족으로부터 외면받았다. 오랫동안 엘리멘트 시티가 키워온 조용한 불평등은 개개인의 흑백논리를 만나 가속화되었고, 자연스레 두 꼭짓점의 거리도 크게 벌어졌다. 웨이드의 너그러운 태도가 앰버의 눈에 다소 나이브하게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메시지
웨이드의 집에 초대받은 앰버는 그의 한 일가친척으로부터 “여기 말 잘한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듣는다. 앰버는 이곳에서 태어났지만, 다수이자 엘리트 층에 속하는 물의 원소에게는 여전히 이방인으로 여겨진다. 과연 물과 불은 섞일 수 있을까. 이 질문을 바꿔보자. 기득권층과 비기득권층은 융화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으로 이민자에 대한 제도 개선과 인식 제고를 떠올릴 즈음, <엘리멘탈>은 계급 운동의 발현보다 모두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방식을 택한다.
어쩌다 댐을 막기 위해 임기응변으로 유리벽을 빚어낸 앰버를 보고 웨이드는 “아름다움에게 일격을 받은 건 처음”이라 외친다. 앰버에겐 낯설고 어색한 칭찬이다. 하지만 유리가 본래 불과 물, 흙과 공기 등 모든 원소에 중립적인 적응력을 가진 물성임을 고려하면 웨이드의 말대로 앰버의 능력은 무척 아름답다.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어떤 원소와도 어울릴 수 있는 힘이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떤 환경에서도 튼튼하게 자란다는 비비스테리아를 보기 위해 물웅덩이 안으로 들어가야 할 때, 이때까지도 앰버는 습관적으로 평소와 같이 걱정을 한다. ‘물’ 안으로 들어가면 ‘불’은 꺼진다고. 하지만 웨이드는 공기 원소 동료인 게일(웬디 맥렌던 커비)의 도움을 받아 제3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바로 공기막이다. 공기 방울 안에 들어가 있으면 물 안에서도 20분가량 거뜬히 탐험할 수 있을 거라며 게일은 다정한 말씨와 눈빛으로 설명한다. 물도 불도 아닌 중간지대. 앰버는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확장한다. 자기 안에 내재된 융합의 힘을 깨닫고 타인에게 기꺼이 기대면서 병립의 가치를 깨우치는 것이다.
“나도 가게 물려받기 싫어. 이제 알았어.” 피아식별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느라 자신을 돌보지 못했던 앰버는 타인을 향한 경계선을 지우고 나서야 자신을 제대로 돌아보게 된다. 이제 그는 부모가 지어낸 견고한 울타리를 거두고 자기 삶의 문을 열기로 한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로 한다. 작은 식료품점을 물려받아 자신의 재능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갈 수도 있던 그에겐 상상도 못할 결말이다. 함께 서서 문제의 근원을 고쳐나가는 것. 어쩌면 이건 외로운 이민자를 위해 <엘리멘탈>이 이끌어낸 공존의 메시지이면서 디즈니·픽사만의 환상적 프로파간다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