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정아를 섭외하기 위한 메일을 쓰던 중 고민에 빠졌다. 으레 감독이나 배우를 부를 땐 ‘감독’, ‘배우’ 등의 호칭을 붙이는데 뮤지션을 부를 땐 어떤 호칭을 써야 할지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결국 선택한 호칭은 ‘아티스트 선우정아’였지만, 돌이켜 생각하니 무색한 고민이었다. 아티스트 선우정아야말로 ‘감독’이자 ‘배우’이기 때문이다. 선우정아는 김의석 감독과 단편영화 2편(<오늘은 내가 요리사>(2009), <구해줘!>(2011))과 장편영화 <죄 많은 소녀>(2017), 그리고 드라마 <시네마틱드라마 SF8–인간증명>(2020)을 함께하며 음악감독을 역임했고, 정가영 감독의 <연애 빠진 로맨스>(2021)를 통해 상업영화에도 발을 담갔다. 또한 선우정아는 영화 <오늘은 내가 요리사>의 공동 주연배우 ‘콜걸’이었다. 그는 <오늘은 내가 요리사>에서 배우로 데뷔한 뒤 음악에만 집중하리라 다짐했지만 최근 웨이브 오리지널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를 통해 다시 배우로 복귀했다. 연기와 영화음악 작곡, 본업인 음악까지 어느 하나 빠짐없이 인상적인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는 전천후 아티스트 선우정아를 만나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는 그의 작업들에 관해 대화를 청했다.
- <박하경 여행기>는 처음부터 배우로 섭외받았나.
= 그렇다. 처음엔 섭외 요청을 고사했다. 캐스팅 요청에 몸을 사리던 중 제작진으로부터 내 역할이 묵언 수행자라 대사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면 할 수 있겠다 싶었다. 뮤직비디오나 라이브 콘텐츠를 촬영할 때 립싱크하듯, 말만 안 하면 표정 연기는 할 수 있거든. (웃음) 그 후 대본을 받았는데 대본이 정말 좋았다. 그런데 1회 마지막에 대사가 한줄 있었다! 내가 이 한줄을 소화할 수 있을까, 2차 고민이 시작됐지만 그럼에도 매력적인 스토리라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 개인 유튜브 채널에 올린 드라마 촬영기를 보니, 본인의 배역을 특별출연이라 명기했던데. 그렇다기엔 12명의 배우와 출연 확정 기사가 공동으로 뜨지 않았나.
= 그 조각보 사진이 웃기지 않나. 다른 배우들은 배우 특유의 프로필 사진인데 나 혼자 무대 화장을 한 단독자로 사진이 나갔다. 처음엔 브이로그에 카메오라 적었다. 영상 업로드 전 점검차 드라마 제작진측에 편집본을 보냈는데, 특별출연으로 바꿔 달라더라. 생각해보니 드라마 속 정아는 박하경과 1화의 이야기를 공동으로 끌어가는 존재니 카메오는 아니었다.
- 대사가 없어 출연 요청에 응했다곤 하지만 대사 없이 표정과 몸짓으로만 감정을 표현하는 게 더 어려운 연기다.
= 내 배역 ‘정아’가 100%의 선우정아는 아니었지만, 감독님이 일상의 선우정아가 배역에 녹아들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자연인 선우정아의 절반 정도를 투사하며 편하게 연기했다.
- 드라마 속 정아에 관한 전사도 써보았나. ‘왜 정아는 사찰에서 묵언 수행을 할까’라든가.
= 내가 생각했을 때 정아는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린,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친구다. 그리고 록 스타일을 좋아해서 조끼 안에 너바나 로고가 그려진 옷을 입을 것 같았다. 예술을 좋아하고, 앞으로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이 많던 중 남들 따라 무작정 템플 스테이에 합류했지만 막상 기대만큼의 무언가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묵언 수행을 하며 절에 머무르는 그런 아이다. 배역의 전사를 생각하는 법은 김의석 감독으로부터 배웠다.
- 하경 역의 이나영 배우와 길게 눈을 맞추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배우와 눈으로 대화하는 경험은 평소 뮤지션들과 합주하거나 듀엣하는 경험과는 또 달랐을 듯하다.
= 아이 콘택트를 워낙 못한다. 무대에서도 노래하다 관객과 눈이 맞으면 바로 피할 정도다. 진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제외하면 눈을 잘 못 보는 편인데 촬영 현장에서 무려 이나영과 눈을 맞춰야 했다. 감독님이 내게 주신 디렉션이 있다. 하경을 바라볼 때 <도망가자>를 눈으로 부른다는 생각으로 연기해달라고. 거의 1절을 다 부를 때까지 감독님은 컷을 안 외치고, 이나영 배우도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촬영이 끝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 순간을 언어화하긴 어렵지만 눈에 감정을 담아내는 게 전보다 수월해졌다. 잠시 쉬는 시간에 이나영 배우도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정아님으로부터 흘러들어왔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내겐 그 순간이 강력한 영적 체험과 같았다.
- 1화 중간을 보면 정아가 길을 잃은 하경에게 사찰로 돌아가는 길을 손짓으로만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혹시 대본에 지문이 쓰여 있었나.
= 내가 만든 동작이다. 고심한 동작을 현장에 가져갔더니 감독님이 정말 좋아하셨다. 정작 가족들은 그래서 저 동작이 무슨 의미냐 묻더라. (기자도 두번 봤지만 정확한 의미를 모르겠다고 전하자) 그런데 이나영 배우는 알아들었다. (직접 동작을 다시 선보이며) “저 길로 가면 수월하지만 길이 길어 다리가 아프다. 대숲으로 가면 좁고 풀이 많지만 길이 짧다. 그래서 후자가 좋다”는 의미다.
- 정아의 헤어스타일도 본인의 아이디어인가.
= 내가 만들고 감독님에게 확인받는 식이었다. 작품 속 스타일은 아니지만 평소 내가 머리숱이 많아 머리를 자주 땋기도 하고, 정아가 절에 있으면서 딱히 할 일도 없을 것 같아 머리를 땋을 것만 같았다.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긴 하다. 그랬다면 얼굴이 리프팅돼 내가 처음 의도한 배역의 나이로 보였을 텐데. (웃음)
감정을 음악으로 설명하는 순간들
- 인터뷰 직전 김의석 감독에게 “<오늘은 내가 요리사> 촬영 당시 어떻게 선우정아에게 연기까지 맡길 수 있었나”를 물었다. “정아에겐 한계를 뛰어넘는 에너지가 있어 무얼 시켜도 잘하리라 판단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 김의석 감독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가족과 애인 말곤 싸워본 적이 지금껏 없는데, <오늘은 내가 요리사> 첫 상영 때 의석 오빠와 싸웠다. 내가 너무 어렸지. 영화에 대한 로망이 있는 상태에서 만든 첫 작품이어서 그런지 욕심을 좀 부렸다. “나 음악도 하는데 연기도 하네” 하면서 말이다. 다툼이 있었지만 결국은 굉장히 건강하게 마무리됐다. 처음으로 싸움이 건강한 소통으로 귀결될 수 있음을 김의석 감독 덕분에 알았다. 그 이후로 그가 제의하는 일은 가능하면 무조건 참여하려고 한다.
- 음악감독 작업이라는 게 연출자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일이지 않나. 개인 음반을 만들 때와는 또 다른 소통일 것 같은데.
= 김의석 감독과의 작업은 그의 디렉팅에 맞춰 내가 즉흥적으로 노래를 하는 기분이다. 물론 즉흥적인 노래라기엔 노동 기간이 상당히 길다. 작품을 완성한 후 내 음악을 들으면 정말 오빠와 함께 합주한 기분이다. 그 소통이 재밌어서 계속 김의석 감독과 협업하게 된다.
- <죄 많은 소녀>의 스코어는 음악보다는 음향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 평소 만드는 곡들은 멜로디에 가사가 덧붙다 보니 많은 분들이 음률과 가사에 집중해주신다. 그 부분도 감사하지만 나는 내 음악의 음향 작업에 엄청 신경 쓴다. 음향효과로 사운드가 좁아졌다 넓어지는 그 순간! 영화음악은 보컬이 다른 시선을 잡아끌지 않으니 음향의 맛을 극대화할 수 있어 좋다.
- <죄 많은 소녀>에서 유독 마음이 가는 장면이 있나.
= “나는 가요”가 끝없이 반복되는 노래를 부르는 굿 장면으로 시작해 영희(전여빈)의 음독으로 마무리되는 롱테이크 시퀀스를 좋아한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 흐르던 <Ritual, Death>를 편곡할 때도 재밌었다. 촬영 현장에서 굿 장면의 음원을 딴 후 해당 음원을 여러 방식으로 다뤘다. 음향적 확장을 시도한 노래이고, 지금도 종종 듣는다. 내가 만든 아이라 그런지 무섭지 않고 좋다. (웃음)
- <죄 많은 소녀>는 한 인물의 시점을 견지하는 영화가 아니지 않나. 스코어 작업 당시 특정 인물의 시점을 염두에 두었나.
= 시나리오가 처음부터 이해가진 않았다. 그래서 감독에게 질문을 정말 많이 했는데, “영희는 지금 이런 감정이야”, “경민 엄마는 지금 이런 상황이야”처럼 각 인물의 심리를 자세히 설명해줬다. (잠시 고민한 후) 생각해보니 신기하네. 보통 내가 음악을 만드는 방식은 내 안의 감정을 꺼내는 것이다. 그래서 내 음악은 시점이 명확하다면, 영화음악은 감정을 밖에 둔 채 그 위로 음악을 깔아두는 느낌이다. 확실히 <죄 많은 소녀>를 작업할 당시에는 밖에서 캐릭터를 바라보며 “너는 왜 그래”, “얘는 또 왜 이래” 하며 곡을 썼다.
- 이후 정가영 감독의 <연애 빠진 로맨스>의 음악감독도 맡았다.
= 김의석 감독의 제안으로 <연애 빠진 로맨스>에 합류하게 됐다. 휴가지에서 시나리오를 받아 봤는데, 대본이 쓱쓱 읽히고 재밌었다. 영화음악을 맡으면 아무래도 내 개인 활동이나 음반 제작에 지장이 가다 보니 소속사와도 논의가 필요하다. 처음 제의를 받았을 때만 해도 소속사에 “잘 조율해볼게” 정도로 이야기했는데, 시나리오를 다 읽고 난 뒤엔 어느새 “내가 잘해볼게”라며 회사를 설득하고 있더라.
- <연애 빠진 로맨스>의 음악은 영화의 톤처럼 유쾌하고 가볍다. 그렇다고 해서 작업 과정이 <죄 많은 소녀>에 비해 가볍진 않았으리라 짐작하는데.
= 첫 상업영화라 훨씬 무게감을 느꼈다. 전작들만 해도 작업 과정에서 김의석 감독하고만 소통하면 됐는데, 이제 제작사를 포함해 수많은 분들의 의견을 구해야 했다. 운이 좋았던 건 그분들이 모두 기성 뮤지션인 내 커리어를 존중해주셨다는 점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작업을 마무리했다.
- <연애 빠진 로맨스>의 스코어를 다시 들으니 플루트 같은 목관악기의 솔로가 반복되더라.
= 작업 시 주지한 부분이다. 자영(전종서)과 우리(손석구)를 생각하면 목관악기나 전자피아노의 은은하고 몽롱한 소리가 떠올랐다. 수많은 정사 신이 지나가는 몽타주 시퀀스에도 꼭 목관악기를 넣어 최대한 부드러운 소리를 구현하려 했다.
- 자영의 알람곡인 핑클의 <내 남자친구에게>는 본인의 아이디어였나.
= 시나리오에 명시돼 있었다. 그 노래의 톤과 가사가 <연애 빠진 로맨스>의 음악을 만드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영화를 제작하던 중반부 즈음, 이 곡을 영화에 사용하지 못할 뻔했다. 그래서 내가 직접 나서 “안됩니다. 이 곡이 영화에 꼭 필요합니다”라고 호소했다.
- 영화음악을 작업할 때 작품의 장르도 고려하나.
= 아직 장르를 고려할 만큼 많은 작품을 해보지 못했다. 지금껏 <연애 빠진 로맨스>처럼 엉뚱하고 통통 튀는 느낌이거나 <죄 많은 소녀>처럼 인간의 심연을 건드리는, 극단의 작품들만 오갔다. 말하자면 언급한 두 영화의 중간에 있는 보편적인 드라마엔 아직 참여해본 적이 없는데, 또 내가 평범한 중간선은 어려워해서. (웃음) 앞으로도 극단을 오가는 작품만 하지 않을까.
예술가는 책임감을 갖고 ‘미쳐야 한다’
- <아이언맨>과 <파이트 클럽>을 정말 좋아한다던데.
= 액션 판타지 장르를 사랑한다. 어릴 때부터 <파워 레인저>나 <슈퍼 그랑죠> 시리즈를 좋아했고, 친구들이 순정만화 잡지 <윙크>를 구독할 때 혼자 <소년 챔프>를 즐겨 읽었다. 그런 내 모든 취향을 집대성한 영화가 <아이언맨>이었다. 그리고 내가 브래드 피트를 오랫동안 좋아했다. 그가 나온 영화를 모두 좋아하지만 그중 <파이트 클럽>은 수작이다. 사람의 비뚤어진 내면을 살피는 걸 좋아하는데 두 영화 모두 그 점에서 결이 맞닿아 있다. 토니 스타크나 타일러 더든의 비뚤어진 내면은 분명 영화에서 미화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나는 두 영화의 연출 방식처럼 영화만의 판타지가 확실히 구현되는 게 좋다. 영화의 이면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성인 관객 각자의 몫이다.
- 재즈피아니스트 염신혜와 결성한 그룹 리아노품으로 무주산골영화제에서 2016년, 2022년 두 차례나 무성영화 <키드>(1921)의 라이브 연주를 선보였다.
= 정말 재밌는 경험이었다. 전술한 김의석 감독과의 작업이 즉흥연주 ‘같다’면, 그 공연은 정말 즉흥연주로 진행한 경우다. 물론 연습을 통해 맞춘 호흡이 있었지만 딱 떨어지는 타임 코드는 없었다. 연습한 대로 연주가 흘러갈 때도, 연습 때와 조금씩 달라지는 타이밍도 모두 재밌었다.
- 미니앨범 《4×4》 발매 당시 4주에 걸쳐 4곡을 발표했고, 정규 3집 《Sereande》도 3번에 걸쳐 16트랙을 발표하지 않았나. 전체를 쪼개 공개한 후 마지막에 전체로 종합하는 음반의 프로모션 방식이 개별 플롯을 통해 전체를 맞춰보는 추리영화의 방식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 하긴 영화는 수많은 편집 컷들의 총합이니 그럴 수 있겠다. 솔직히 말하면 정규 앨범을 한번에 발매하면 리스너들이 전곡을 듣지 않다 보니 위와 같은 방식을 택했다. 창작자의 입장에서 언제나 내가 만든 곡들이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이들에게 효율적으로 가닿을지 고민한다. 몇곡씩 나누어 공개하는 연재 방식이 내 노래를 리스너들의 뇌리에 오래 남길 수 있는 방법이었다. 영화의 영향은 편곡 단계에서 많이 받는다. 영화를 볼 때 느끼는 감흥을 어떻게든 곡에 차용하려 한다. 내 노래 'BUFFALO'는 영화 <테넷>의 편집 방식에 영향을 받았다. 왜 <테넷>을 보면 초반부터 시간의 역전이 마구 벌어지지 않나. 'BUFFALO'의 구성이 꼭 <테넷> 같다. 벌스(Verse)는 한번이고 곡 내내 후렴만 나오다 갑자기 브리지가 튀어나오는 식이다.
- 어떤 뮤지션들은 자기 작업물의 창작 과정을 철저히 극비에 부친다. 하지만 선우정아씨의 행보는 그 반대다. 대부분의 작업기를 가감 없이 공개하는 편인데.
= 워낙 창작 과정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한다. 이 방식이 청자의 감상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우선 나부터 내가 좋아하는 창작가의 예술 작업기를 읽고 들으며 스스로의 감상과 비교하길 즐긴다.
- 한 인터뷰에서 밝힌 ‘아티스트론’이 인상적이었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혜택을 받은 존재. 그래서 반드시 책임감을 갖고 창작하며 최선을 다해 전달해야 한다.” 여전히 이 정의가 유효한가.
= 혜택이란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이 분야에 종사하기 위해선 확실히 타고난 재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노력도 불가결하지만 이쪽 일은 재능이 없으면 시작이 불가능하다. 그렇게 받은 혜택으로 삶을 영위하다 보면 내 작업물이 불특정 다수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예술은 수용자에게 전달되는 파급이 크고 수용자와 언제나 닿아 있으니 창작자는 늘 자신의 성취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자칫 예술가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놀기만 할 수 있다. 그런 모습을 좋아하는 팬도 있겠지만 당사자 입장에선 그들도 자기 책임감 하에 미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책임감을 가진 채 다수가 즐거워할 수 있는 공연과 음악을 만들 수 있을까 늘 고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