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극 이해가 안돼!” 등장인물이 제4의 벽을 뚫고 나오면서 외친다. 거울이 관객의 속마음을 비춘 듯한 순간. 하지만 괜찮다. 설사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과정이 흥미롭다면 얼마든지 느끼고 공유할 수 있다. 우리 생의 대부분의 순간도 정확한 이유와 의미를 모른 채 잘 흘러가고 있지 않은가. 완벽한 설명으로 세계를 완성하겠다는 작법은 실은 환상을 향한 강박일 뿐이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언제나 관객을 향해 이렇게 말해왔다.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돼. 말이 되는지 아닌지 따지지 않아도 괜찮아. 그저 그 자리에서 함께 바라봐주면 좋겠어.
신작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그동안의 스타일을 한층 더 농밀하게 응축시킨 웨스 앤더슨 영화적 유희의 끝이다. 웨스 앤더슨은 이미 ‘웨스 앤더슨적’이라는 대명사로 칭해도 좋을 만큼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해왔다. <애스터로이스 시티>는 극중극의 액자 구성을 통해 웨스 앤더슨의 구조를 한층 강화하는 가운데 황금기 고전영화,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흔적을 고스란히 투영해낸다. 그렇게 소행성이 떨어진 도시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장소는 물론 1955년 9월이라는 시간적 배경까지, 웨스 앤더슨이 창조한 시공간의 안과 밖이 모두 ‘영화라는 꿈’으로 둘러싸여 있다.
액자 구성이 의미하는 것
웨스 앤더슨은 두개의 액자를 짠다. 하나는 ‘TV 쇼’, 다른 하나는 ‘TV 쇼에서 찍고 있는 연극’이다. 흑백으로 시작되는 오프닝에서 진행자(브라이언 크랜스턴)는 지금부터 시작되는 TV 쇼가 어떤 내용인지를 소개한다. “연극의 극본이 써지면 배우들이 캐스팅돼 연기하고, 스탭들이 무대를 만든 뒤 결국 연극이 완성되는 과정” 전체를 관람하는 방식의 TV 쇼다. TV 쇼는 흑백 화면에 정사각형에 가까운 1.31:1 비율로 전개되고, TV 쇼에서 만드는 연극은 파스텔 톤의 화려한 컬러와 2.55:1 비율로 진행된다. 요컨대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TV 쇼 속의 연극과 연극 밖의 TV 쇼, 두개의 플롯(혹은 흑백과 컬러의 영화)을 나란히 병치시킨 구조다.
TV 속 연극은 가상의 도시 애스터로이드가 배경이다. 소행성이 떨어진 날을 기념하는 행사에 과학에 관심이 많은 아이들과 그 가족들이 모여든다. 그중 하나인 오기 스틴백(제이슨 슈워츠먼)은 얼마 전 아내를 잃은 아픔을 떨치지 못한 상태지만 아들 우드로(제이크 라이언)를 위해 티내지 않고 애스터로이드 시티까지 찾아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딸은 천진난만하게 엄마의 유골이 든 상자를 들고 마녀들의 마법으로 되살리자며 장난을 친다. 설상가상으로 차가 고장난 탓에 한동안 연락을 끊었던 장인 스탠리(톰 행크스)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한다. 서로의 서먹함을 확인하면서도 스탠리는 애스터로이드 시티까지 와주기로 약속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는 오기 이외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 유명 배우 밋지(스칼릿 조핸슨)는 딸 다이나와 함께 왔다. 오기와 밋지는 상실의 아픔을 겪은 서로를 알아보지만 선뜻 마음을 표현하진 못한다. 그 와중에 오기의 아들 우드로와 밋지의 딸 다이나가 서로 호감을 느낀다. 잊지 마시라. 이건 TV 속 연극이다. 연극에서 오기 역을 연기하는 배우 존스 홀(제이슨 슈워츠먼)은 오기에게 감정이입한 나머지 연극 속 배역과 자신을 헷갈리기 시작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핵심은 바로 이러한 혼란스러움에 있다. 오기도, 존스 홀도 모두 배우 제이슨 슈워츠먼이 연기 중이다. 요컨대 우리는 오기를 연기하는 존스 홀의 혼란을 연기하는 배우 제이슨 슈워츠먼의 연기를 보는 셈이다.
웨스 앤더슨의 액자 구성은 결국 액자 바깥을 인식시키는 수단이다. 사진에 찍힌 것 외의 프레임 밖에서 다양한 일이 벌어지는 것처럼 웨스 앤더슨은 영화 제작이라는 집짓기 놀이를 통해 그 바깥의 진실, 미지의 형태에 닿고자 한다. 컬러로 진행되는 연극을 우리가 보는 영화, 흑백으로 진행되는 TV 쇼를 영화 제작의 현장이라 비유할 수 있다. 웨스 앤더슨은 두 경계를 수시로 오가면서 영화라는 행위 전체를 해체한 후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조립한다. 그야말로 거대하고 호화로운 소꿉놀이인 셈이다. 그리하여 흑백 TV 쇼의 시나리오작가는 진실의 끝자락을 붙잡고 선언한다. “잠들어야 깨어날 수 있다.” 우리는 현실에서 잠들고 영화라는 꿈속에서 비로소 눈을 뜬다. 이건 웨스 앤더슨이 꾸는 영화라는 꿈인가. 아니 영화가 웨스 앤더슨이란 꿈을 꾸는 걸까.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도드라지는 형식을 꼽자면 횡의 동선, 정면의 프레임, 동화적 색채가 있다. 카메라는 모든 장면을 편편하게 잡는다. 그 후 주로 수평으로 이동하는 카메라의 동선을 따라 인물들은 항상 정면으로 관객과 마주 본다. 동화적 색감을 더해 이러한 형식들은 이야기와 관객이 너무 밀착하지 못하도록 거리를 벌려준다. 반짝이는 이야기와 뜨거운 감정에 눈멀지 않고 서로를 제대로 응시할 수 있는 거리. 웨스 앤더슨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서로 마주보며 잠들고 깨어나기
웨스 앤더슨에게 형식이란 무엇인가. 적어도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는 환상을 벗겨내는 수단으로 다가온다. 빽빽하게 들어찬 상징, 과장된 색감과 미장센, 집착적인 대칭 구도 등 웨스 앤더슨 고유의 스타일은 이번에도 여전하다. 아니 스타일이 응축되다 못해 아예 실사영화의 굴곡을 지워버리고 스크린 전체를 그림엽서처럼 평면적인 화면으로 탈바꿈시킨다. 그 결과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사진보단 애니메이션, 연기보단 인형극, 영화보단 무대 공연에 가깝게 느껴질 지경이다. 2D 화면에 현실처럼 부피를 더하는 게 영화의 메커니즘이라면, 웨스 앤더슨은 이걸 거꾸로 되감는 셈이다. 한데 이런 스타일의 향연이 절정에 달하고 나니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진실들이 있다. 이건 영화이고, 환상이고,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진실. 웨스 앤더슨은 꿈에서 깨지 않은 자각몽의 상태로 꿈(=영화)의 구조를 탐구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는 온갖 상징과 은유들이 녹아 있다. 연극 속 캐릭터에는 실존 인물의 흔적이 묻어 있는데, 가령 밋지는 배우 마릴린 먼로와 자연스럽게 겹치고 오기 스틴백의 이름에서 작가 존 스타인벡이 떠오른다. 1950년대라는 시대나 로스웰 사건을 연상시키는 외계인 에피소드 역시 상징적이다. 하지만 이런 깨알 같은 상징과 비유, 각종 레퍼런스들을 하나도 모른다고 해도 이 영화와 교감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거의 음악에 가까운 방대한 양의 대사와 과장된 양식들을 보노라면 어떤 면에선 오히려 몰라주길 바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근원을 몰라도 과정은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 당신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당신과 마주 볼 수 있는 것처럼.
모두 정면을 보는 가운데 오기와 밋지는 건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본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프레임에서 웨스 앤더슨이 그리는 이상향의 단편을 마주한다. 외계인이 등장하여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뒤 인물들은 각자의 자리를 찾아간다.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는지는 사실 잘 기억나지도, 중요하지도 않다. 남는 건 예쁘고 사랑스러운 장면들,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던 시선의 자리다. 상대의 거리 안으로 함부로 뛰어들지 않고 그렇다고 멀리 달아나지도 않는 적당한 거리. 서로의 고독을 인정하면서도 언제든 손을 뻗을 수 있을 만큼의 위치. 오기와 밋지의 거리. 혹은 오기와 장인 스탠리의 위치. 웨스 앤더슨은 각자의 고독을 나란히 놓고 수평의 카메라 동선에 차례로 담는다. 그렇게 이해하지 못해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어떤 필연이나 법칙, 이유가 없는 느슨한 연결이야말로 웨스 앤더슨이 마련한 최소한의 쉴 자리다.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고, 상실이 없으면 회복도 없다는 역설. 깨어나기 위해 영화라는 꿈을 꾸는 웨스 앤더슨이 세상에서 가장 화사한 방식으로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