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부천영화제를 찾은 동시대 대만 작품은 총 7편이었다. 가진동 감독의 <흑교육>을 비롯해 ‘엑스라지’ 섹션에 편성된 3편의 단편영화, ‘비욘드 리얼리티’에 전시된 3개의 XR 작품이 이름을 올렸다. 그 경향성을 축약하자면 ‘과거를 그리는 현재의 XR’, 그리고 ‘대만식 장르물의 부각’으로 정리할 수있겠다.
역사를 가시화하는 XR
대만은 한국과 여러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우선 두 국가는 20세기에 수탈의 아픔을 직면한 바 있다. 또 다른 공통점은 20세기의 수난을 딛고 21세기에 고도화된 기술 선도 국가로 발돋움했단 사실이다. IT산업에서 두각을 드러낸 한국과 대만은 예술 영역에서도 VFX, XR 등 아시아의 미래 영상 기술을 이끌고 있다. 올해 부천영화제에 걸린 3편의 XR 전시작은 전술한 대만의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는, 요컨대 대만의 아픈 과거를 소생 하는 최신 기술의 집약체다.
<차마 떠날 수 없던 사람>
진심의 감독의 VR 작품 <차마 떠날 수 없던 사람>은 1950년대 초반의 녹도 강제 수용소를 배경으로 대만의 정치사를 들춘다. 녹도 수용소는 섬 하나를 통째로 감옥으로 만든 곳이며, 이곳엔 당시 국민당 정부에 반발했던 정치범과 사상범이 투옥됐다. 반정부 운동에 연루된 학생들 역시 이념 재교육이란 명목으로 수감됐다. <차마 떠날 수 없던 사람>은 이 시대의 녹도로 플레이어를 인도하고 수용소의 풍경을 적나라하게 체험하게 한다. 좁디좁은 방에 몸을 겹치고 있는 사람들, 줄에 매달려 받는 고문, 그리고 어린 청년이 겪은 가족과의 생이별까지 쉬이 감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실사 VR 영상으로 재생된다.
<올 댓 리메인즈>
연극 공연을 원작으로 하는 VR 작품이다. 더 많은 관객과의 만남을 위해 해당 공연을 360도 VR 영상으로 치환했다. 한 젊은 여성이 카메라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옷을 한 꺼풀씩 벗어 속옷 차림이 된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던 중, 그의 반라가 좁은 감옥에 가둬지는 시점부터 이야기는 진의를 드러낸다. 과거 대만의 풍경을 현재에 불러온 것이다. 더하여 또 다른 남성 역시 전라를 드러내며 무릎을 꿇고 관객을 깊게 응시한다. 결국 두 남녀가 한 공간에서 만나고 여성의 뱃속에 남자가 들어가는 구도가 펼쳐지는데, 이는 곧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한점에 물리는 순환성의 상징으로 작용하게 된다.
<레드 테일>
앞선 대만 XR 작품들보다 가벼운 분위기의 VR 애니메이션이다. 한 소년이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빨간색 물고기를 쫓는 과정을 그린다. 마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 명>과 같이 기차를 타고 세계의 틈을 여행하는데, 당도하는 세계 곳곳엔 인간 외의 다양한 생명체들이 도사리고 있다. 이내 <레드 테일>은 과거의 향수, 자아정체성의 본원, 이른바 개인의 역사를 찾는 이야기로 이어지며 전술한 대만의 XR 작품들과 주제 의식을 공유한다. 더불어 <레드 테일>의 강점은 현재 대만의 XR 기술 수준을 단번에 체험할 수 있는 압도적 품질의 영상미다. 고품질의 아트워크, 선예도, 움직임이 애니메이션 세계로의 몰입을 안정적으로 보장한다.
단편이 보여주는 대만식 멜로와 호러
<남아있는 것들> <부유(浮游)> <편도 승차권> 등 세편의 단편영화는 현재의 대만영화를 규명하는 각양각색의 장르성을 뽐낸다. 특히 동시대 대만 영화를 대표하는 ‘대만식 멜로와 호러’ 장르의 성격이 두드러진다. XR 전시작품이 과거로의 몰입을 유도했다면, 단편영화들은 현재 대만의 색채를 강하게 느끼게 하는 쪽이다.
<부유(浮游)>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나 <나의 소녀시대> 등 최근 ‘대만 멜로’로 명명되는 작품들처럼 청년들의 산뜻한 사랑을 그린다. 수영장의 한 소녀가 금붕어를 들고 온 소년을 관음한다. 관음의 정도가 꽤 진득하여 센슈얼함의 농도가 짙어지기도 한다. 종국엔 둘의 시선이 교환되면서 사랑의 초현실적인 감각을 일깨운다. 이러한 사랑의 과정이 파스텔 톤의 질감에서 이어지면서 대만 멜로 특유의 감성이 증폭되는, 그러면서도 장편영화에선 쉬이 다룰 수 없던 성적인 은유를 한 스푼 가미하는 작품이다.
<남아있는 것들>
<반교: 디텐션> 등으로 알려진 대만 호러영화의 성격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무용을 전공한 여학생이 예술에의 집착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블랙스완>과 같은 분위 기를 떠올리게 한다. 부상으로 인해 공연의 기회를 잃은 주인공이 남들에게 인정 받기 위해 몸을 혹사하는 방식이다. 급기야 그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며 극한까지 신체의 힘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좀비처럼 온갖 관절을 뒤틀며 공연을 이어가는데, 여기에 핏빛의 조명과 스승의 신경질적 호통까지 섞이면서 작품은 강한 호러의 향취를 내뿜게 된다.
<편도 승차권>
5분여의 짤막한 단편애니메이션으로서, <남아있는 것들>과 함께 호러영화의 양태를 띤다. 몇몇 인물들이 노을이 비치는 기차에 가만히 앉아 있다. 그러나 평화로운 분위기는 곧 어둠에 잡아먹힌다. 저승사자와 같은 승무원이 등장하더니 승객들의 표를 하나하나 검수하는데, 이것은 곧 죽음으로 향하는 티켓 발권이 된다. 피할 수없는, 예정된 죽음의 도래라는 인간사의 고전적 공포를 주요 동력으로 삼는 셈이 . 요컨대 위 3편의 단편영화는 단편의 구조일지라도 최근의 대만영화가 장르영화의 강점을 획득하려 노력 중이란 점을 되짚도록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