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명은이는 내가 영화에서 만나고 싶던 인물이다”, ‘비밀의 언덕’ 이지은 감독 인터뷰
2023-07-20
글 : 이자연
사진 : 최성열

명은(문승아)의 거짓말은 자신이 어떤 기준에서 벗어났다는 감각에서부터 시작한다. 평범해 보이는 친구들의 가정환경조사서와 다르게 자신의 가족들은 모든 게 들쭉날쭉하다. 시장에서 젓갈을 파는 엄마를 전업주부로, 하는 일이 없는 아빠를 종이 만드는 회사 직장인으로 둔갑시킨 이유도 그 때문이다. 명은은 평범하고 싶다. 그런 그에게 갑자기 나타난 전학생 혜진(장재희)은 복잡한 가정사를 드러내는 데 거침이 없다. 어느새 글쓰기 동료가 된 두 사람은 정반대의 태도로 각자의 비밀을 드러낸다. 무엇이 비밀이 될 수 있으며 비밀은 우리를 어떻게 성장시키는지 이지은 감독에게 질문을 건넸다.

- 영화는 1996년이 배경이다. “면담은 교실이 아닌, 선생님 연구실에서 하고 싶어요”라는 명은의 편지에서부터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당시 학교에서 실시한 가정환경조사를 중심 소재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 내가 초중고를 다닐 때엔 새 학년이 시작할 때마다 가정환경조사서를 제출해야 했다. 부모님의 직업부터 연봉까지 담임 교사에게 모든 것을 고백해야 했던 시절이다. 그 종이 한장에 담긴 한국 사회의 편견과 당시의 인식을 연결해보면 특정 세대의 보편적 기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교실에서 면담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선생님과 내가 나누는 대화가 반 아이들에게 전부 들린다는 사실은 누군가에겐 무척 불편했을 것이다. ‘친구들이 좀 떠들어줬으면 좋겠는데’, ‘백색 소음에 이 대화 내용이 묻혔으면 좋겠는데’ 하는 아이들의 생각을 명은이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 명은이는 하고 싶은 것과 갖고 싶은 것이 명확한 인물이다. 단순히 갖고 싶은 것을 욕망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는지 현실적으로 파악한 후 실천한다. 이처럼 능동적인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이유가 있다면.

= 명은이는 내가 이상적으로 그리던 인물이다. 나도 영화를 통해 보고 싶던 친구랄까. 명은이를 상상할 때 아이라는 프레임에 가두지 않으려 했다.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조금씩 그 범위를 넓히다보니 오히려 설정 범위가 넓어졌다. 아이라고 상정하는 순간, 명은이가 갈 수 있는 곳은 한정된다. 집, 학교, 학원. 하지만 영화에서 명은이는 예상치 못한 곳들을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보훈 글짓기대회를 위해 통일전망대에 가는가 하면 일반 직장인을 아빠라고 속이기 위해 일면식도 없는 회사에 찾아가 직장인을 인터뷰한다. 스스로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진 인물을 그려내고 싶었다.

- 명은이 주변엔 다소 허술한 어른들만 있다. 매일 지각하는 담임 선생님, 거짓말을 부추긴 교장 선생님, 자기 마음을 전혀 몰라주는 부모님 모두 선한 마음을 가졌지만 의도치 않게 명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 영화 작업을 하면서 홀로 세운 원칙이 하나 있다. 모든 등장인물이 장점과 단점을 다 가지고 있을 것. 특정 인물을 미화하지 않고, 어디서나 볼 법한 현실적인 캐릭터를 그리고 싶었다. 보통 주인공의 활약과 성장을 강조하기 위해 주변 인물의 성격을 변형하거나 미화하곤 하는데, 나는 충돌을 만들더라도 이 규칙을 꼭 지켜내고 싶었다. 그렇다고 영화 속 인물들의 모습이 극적이거나 특수한 경우는 아니다. 오히려 일상적인 모습에 가깝다. 담임 선생님 애란(임선우)도 온화해 보이지만 성격이 무척 급하고 실수도 잦다. 이제 막 사회에 나온 성인의 어설프고 서툰 모습을 떠올려보면 익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 애란은 담임 선생님인데 왜 매일 지각하나. 게다가 출근도 항상 요란스럽다.

= 영화 제작 관련 책에서 이런 문장을 본 적이 있다. ‘주요 인물은 문으로 들어와서는 안된다. 창문으로 들어와야 한다.’ 등장 방식으로 인물의 특별함을 강조하라는 의미인데 애란이 딱 이 말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조금 다르게 등장시키고 싶었다. 또 애란이 한창 방황 중인 시기라고 생각했다. 이제 막 3년차 정도 된 사회인으로서 고민이 많아 밤마다 잠을 설쳐서 지각한다는, 나만의 이유가 있었다.

-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믿어온 명은이는 혜진의 전학과 함께 내적 갈등을 겪는다. 자기보다 열악한 가정환경에 있지만 그것을 숨기지 않고 떳떳해하는 모습을 보며 불편해한다.

= 혜진이는 한마디로 명은이를 망치러 온 구원자다. (웃음) 폭주기관차처럼 거짓말해온 가짜 명은이가 진짜 명은이로부터 승리하는 순간, 혜진이 등장한다. 혜진은 내가 어렸을 때, 그리고 어른이 되었을 때 만난 멋진 사람들의 총합이다. 남들이 만든 기준이나 평가에 흔들리는 법이 없고, 자기만 괜찮으면 모든 것을 원활하게 수용한다. 글쓰는 창작자가 자기 안에 내재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건 무척 중요한 과정인데, 남들 앞에서 말하기 부끄러운 이야기도 자신과 달리 의연하게 써내는 혜진을 보며 명은의 마음은 산산조각난다. 하지만 언젠가 되돌아볼 때 명은은 이때의 혜진이 자신을 성장시켰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결국 두 사람은 글쓰기를 통해 더 가까워지고 함께 성장한다. 이 둘을 연결하는 행위로 글쓰기를 가져온 이유가 있다면.

= 글쓰기가 지닌 사유의 힘 때문이다. 자신을 알아가고, 자기 안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탐색해가는 힘. 아마 혜진이도 처음부터 자기 얘기를 그렇게 진솔하게 쓸 수 있던 건 아닐 것이다. 시간에 따라 글쓰기의 힘을 느끼며 조금씩 단련됐을 뿐이다. 언젠가 GV에서 관객이 이런 질문을 건넸다. 명은이와 혜진이는 계속해서 글을 썼을 것 같냐고. 그러자 문승아, 장재희 배우의 답변이 완전히 달랐다. 장재희 배우는 “혜진에게 글은 자신의 목숨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글을 썼을 것”이라고 했지만, 문승아 배우는 이렇게 답했다. “명은이는 안 썼을 것 같아요. 결국 글을 통해 제 자신을 찾았으니까요.”

- 명은이는 엄마, 아빠의 사랑을 의심하지만 부모님은 그가 알아차리지 못한 방향으로 꾸준히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다. 표현 방식과 형태가 달라 놓쳐버린 가족의 사랑을 생각하게 된다.

= 아마 부모님도 머리로는 알았을 것이다. 명은이에게 더 상냥하게 대하고 사랑해줘야 한다고. 하지만 하루하루가 너무 고단하니까 모든 것을 포용하는 데 어설프다. 하루는 아빠 역의 강길우 배우가 영화를 본 후 이런 말을 하더라. 학교에서 명은이가 저렇게 열심히 지내고 있는 줄 몰랐다고. 집에서 매일 철부지 같은 모습만 보다가 학교생활을 봤는데 명은이가 너무 성숙했던 것이다. (웃음) 정말 부모의 눈으로 바라본 이야기였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도 서로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어떤 입장 차이가 있는지 그 다름을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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