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비밀은 성장의 계기를 표현한다. 고전적인 성장 서사가 자아와 그것에 대립하는 세계 사이의 화해를 목적으로 한다고 했을 때, 다시 말해 이러한 화해는 그 이전에 세계로부터 분리된 비밀스러운 자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자아와 세계의 위상, 그리고 대립과 화해의 이분법적인 의미망이 흐트러지고, 더이상 개인의 성장을 하나의 목적으로 환원시킬 수 없게 되어버린 동시대의 감각이 지배적인 한편, <비밀의 언덕>의 명은(문승아)은 여전히 화해를 예비하는 비밀스러운 자아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 영화의 이야기에서 중심이 되는 소재는 1990년대 초중고에서 행해졌던 가정환경조사다(지금도 이 관행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된 명은은 다른 학생들이 모두 앉아 있는 교실에서 담임 교사 애란(임선우) 앞에 불려나가 부모의 직업을 말해야 한다. 그는 모질고 억세고 속물적이며 화이트칼라가 되지 못한 부모에 대한 거짓말과 함께 자기 자신을 비밀에 부친다.
하지만 명은의 거짓말은 학생 지도의 편의를 위한다는 허울을 뒤집어쓴 억압적 상황을 단순히 모면하려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명은이라는 캐릭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특징일 텐데, 그는 반대하는 부모에게 거짓말을 해서라도 학급의 임원이 되어야 하고, 담임에게 거짓말을 해서라도 임원으로서 학급을 위한, 또한 그렇게 해서 담임과 친구들로부터 주목받기 위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관철시켜야 한다. 그의 거짓말은, 자신의 부모가 종이 회사 직원이나 전업주부가 아니라 시장에서 젓갈 장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탄로날 위기에 처하자, 가짜 가족을 만들고 그 증거까지 조작해서 내보일 정도로 가차 없다. 이 모든 거짓말의 끝이기도 한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명은이 성장을 이루어낸 것이라면, 그러니까 학교에서 거짓 없이 교사는 물론이고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그리고 가족과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라면, 그것은 명은 자신이 그 화해를 위한 비밀의 공간을 향해 나아가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명은의 변화가 증명하는 것
최근 한국영화에 등장해 주목받았던 몇몇 성장 서사들과 비교했을 때, 이러한 명은의 능동적인 캐릭터는 분명하게 두드러진다. 비슷한 나이대의 미성년을 다룬다는 점에서 <비밀의 언덕>과 영향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영화로 <우리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따돌림 당하는 선(최수인)과 전학생 지아(설혜인) 사이의 갈등을 그린 이 영화 는 10대 소녀들만의 고유한 생태계를 세심하게 보여줬다는 점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교훈적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선의 동생이 말하는, “그럼 언제 놀아?”라는 대사로 정리할 수 있는 이 영화의 교훈은 영화에서 비록 어린아이의 입을 빌린 것이지만, 화해의 순간을 위해 정확한 위치에 배치되어 있다. 주인공 선의 수동성은 영화 내내 카메라의 관찰하는 시선을 대변하는 얼굴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지아와의 화해에 다다르기 위해 외부의 어떤 교훈을 필요로 하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외부의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얻어 주인공이 각성 상태에 이르는 성장 서사의 한 가지 전형은 영화 <벌새>에서 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갖는다. 중학생 은희(박지후)를 매개로 영화에서 재현되는 90년대의 서울 강남, 대치동이라는 시대적 공간 속에 놓인 풍경들은 그에게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다. 은희에게 물리적으로 가해지기까지 하는 가부장적 질서의 폭력과 그 질서에 부역하는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한 엄마, 서울대 진학만이 지상 목표가 될 수 있는 학교생활과 그 규칙을 빠르게 내면화한 아이들, 또한 그것의 거울상으로서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서조차 나누어지고야 마는 계급. 하지만 은희가 등교하는 길에 자리한 재개발 예정 지역에 걸린 철거민 투쟁 현수막을 보고 왜 남의 집을 빼앗느냐고 그가 질문할 때, 한문 선생인 영지(김새벽)는 “말도 안되는 일들이 너무 많”다고 대답해준다. 그는 은희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으로부터 느끼는 불안을 공감할 수 있으며, 또한 그런 세상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바꿔 말하면, 은희의 이해할 수 없음의 상태는 영지를 위해 의도적으로 비워놓은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멘토로서의 영지의 존재가 자신을 세상에 대한 이해로 이끌어주기를 은희는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영화가 취한 전략은 관객을 은희와 비슷한 정도의 무지와 불안의 상태에 두는 것이다.) 이러한 은희의 기다림은 영화 안에서 풍경의 수동성으로까지 전이된다. 재개발 예정 지역의 낯선 풍경이 영지를 통해 은희에게 이해 가능한 것으로 변모하듯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붕괴된 성수대교의 모습 역시 영지의 죽음을 통해 의미화되고 사유화된다.
이 점에서 <비밀의 언덕>은 동일하게 90년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벌새>와의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다. 명은의 글짓기대회 대상 수상작인 <손녀로부터 온 편지>의 내레이션 장면이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명은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오는 글의 내용과 그 위에 덧붙여지는 이미지들은 때로 만나고 때로 엇갈리며, 그와 동시에 그가 알고 있는 사실들과 알지 못하는 사실들이 서로 교차한다. 명은은 그의 가족에 대해 이미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꽤 많은 것을 모르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오히려 <벌새>의 이해할 수 없음을 가장한 풍경 장면과 같은 비밀은 없다. 영화 안에서 명은이 접근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알아야 할 진실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명은에게는 멘토가 필요하지도 않다. 멘토의 역할을 기대할 법한 담임 교사 애란의 경우, 명은은 그가 자신에게 관심을 쏟아주길 원할 뿐이거나, 아니면 그를 협상의 대상으로 삼는다. 두 사람 사이에 필요한 것은, 쉽지 않지만 소통의 가능성이다. 대상 수상작을 철회하겠다는 명은을 애란이 설득하려 할 때, 명은의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하면서 애란은 그가 가족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한다. 판에 박힌 듯한 이 말 앞에서 명은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울면서 고개를 젓는다.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명은의 대답에 얼마만큼의 진실이 담겨 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한 존재들이어서 배경과 같은, 그래서 없는 셈 칠 수도 있는 대상에서 가족이 새로운 관계 맺음의 대상으로 명은 앞에 다가온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남매의 여름밤>에서 이별 혹은 죽음을 앞둔 어느 한순간을 함께하는 가족들, 또는 <종착역>에서 여름방학을 맞아 함께 여행을 떠나는 친구들처럼, 그리고 <성적표의 김민영>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기 자신과 서로에 대해 다시 알아가야 하는 정희(김주아)와 민영(윤아정)의 이야기처럼, 성장 서사에 있어 타인과 새롭게 형성하는 관계성이 그 자체로 성장의 어떤 지표가 된다고 할 때, <비밀의 언덕>에서 명은이 가족과 맺는 관계의 변화는 그의 성장을 충분히 가늠하게 한다. 그 변화는 학교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인상적인 첫 장면에서 명은이 5학년에 진학하고 새로운 담임인 애란에게 전할 선물을 고르고 긴 편지를 쓰던 것과 달리, 그러니까 명은 자신을 선물처럼 포장하기 바쁘던 것과 다르게, 영화의 마지막에서 6학년에 진학하는 그에게는 그러한 과정이 없다. 새 학년을 맞아 가족환경조사서에 부모의 직업을 솔직하게 적어넣을 뿐이다. 명은이 갖는 관계들의 변화는 그가 어느 한 시기를 힘겹게 지났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지만, 그의 이러한 변화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명은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저마다의 화해 방식
끊임없이 거짓말을 지어내던 명은에게도 정직한 순간은 있다. 글을 쓸 때다. 애란의 권유 때문에 글짓기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했지만 명은은 대회를 위해 학교 독서실에서 책들을 잔뜩 쌓아놓은 채 뒤적거리고 통일을 주제로 글을 써야 했을 때는 혼자서 통일전망대까지 다녀온다. 그리고 이 과정이 끝난 뒤에는, 그의 말에 따르면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일 정도로 쓴다. 이렇게 쓴 글이 본인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해서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반대로 혜진(장재희)의 솔직함은 명은의 거짓말을 닮아 있다. 전학 온 첫날, 자기소개를 하며 자신의 엄마가 ‘아가씨 골목’에서 장사를 한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말해버리고 글짓기대회에서 입상하는 방법으로 적나라함을 택한 것이, 자신을 향한 가혹한 시선과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점에서 혜진의 솔직함은 명은의 거짓말과 같은 역할을 한 셈이다. 대상 작품을 철회한 명은이 시상식에서 입선작으로 수상하고 다른 수상자의 그림자에 가려진 채 사진을 찍는 것도, 결국 대상을 받게 된 혜진이 교내 방송실에서 자신의 글을 낭독하는 것도, 저마다 선택한 화해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비밀의 언덕>은 진실과 거짓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명은의 글이 진짜 자기의 이야기를 쓴 것 또한 정확하게 사실에 부합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앞서 인용한 <손녀로부터 온 편지>의 내레이션 장면이 증명하듯 영화는 그조차 완전한 진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원고를 묻겠다고 결심한 명은의 선택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 그가 오른 언덕이다. 이 비밀의 장소는 명은이 화해를 선택하여 마련한 곳이겠지만, 또한 그의 진실인 원고가 묻혀 있는 한 그의 거짓 역시 계속되도록 만드는 모순된 장소다. 결국 완전한 화해나 완전한 성장이란 없다. 다만 궁금한 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 새로운 담임이 가정환경조사서의 뒷면에 쓰도록 시킨 명은의 자기소개다. 자기소개뿐 아니라 시간이 흘러 나중에 그가 쓰게 될 글에서도, 그의 비밀이 멀리까지 나아가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