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문>의 재국은 실패를 직시하기보다 숨어버리기를 택한 비겁한 남자다.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유인 달 탐사선 나래호 프로젝트가 예상치 못한 엔진 결함으로 공중에서 폭발했을 때 우주센터장에서 물러나 잠적해버린다. 두 번째 도전에 나선 우리호가 또 한번 사고로 대원들을 잃자, 정부는 유일한 생존자 선우(도경수)의 귀환을 위해 사령선을 가장 잘 제어할 수 있는 인물을 소환한다. 소백산 천문대에 은둔하던 재국은 우주센터로 돌아온 후에도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미성숙함을 보인다. 그랬던 재국이 과거를 반추하며 변화하는 모습을 그려낸 <더 문>은 어떤 의미에서 재국의 성장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 의외로 김용화 감독과는 첫 작업이다.
= 30년 동안 연기하면서 같이 작품을 한 적이 없는 배우도 많고, 같이 일을 해본 적이 없는 감독님은 더 많다. 감사하게도 김용화 감독님이 다른 작품 인터뷰를 하는 자리에서 같이 작업해보고 싶은 배우로 내 이름을 얘기했다고 하더라. 그 얘기를 전해 들으니 너무너무 감사했다. 그리고 이렇게 큰 작품에 출연하는 건 <해운대> 이후 거의 처음이었다. 과연 광활한 우주와 미지의 세계가 어떻게 표현됐을지 작품에 참여한 배우로서도 정말 궁금하다.
- 말없이 센터를 떠난 재국은 5년 동안 어떻게 시간을 보냈을까.
= 그는 상당한 완벽주의자지만 성공과 ‘최초’라는 타이틀에 집착하는 인물이다. 그러다 나래호 프로젝트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냥 혼자 떠나버린다. 모두 놓아버리는 게 본인의 기준에서는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천문대에서 별을 본다는 것 자체가 그의 미련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겉보기에는 멧돼지를 사냥하면서 하루하루 의미 없는 나날을 보내는 것 같지만 말이다.
- <더 문>은 우주학자들에게도 자문을 구하며 만든 영화라고 들었다. 대사가 입에 잘 붙게 하기 위해 과학 지식을 따로 공부하거나 했나.
= 평생을 바쳐서 공부해도 어려운 학문인데 내가 공부한다고 머릿속에 들어올까. 관련된 책은 받았지만 그뿐이다. 의학 드라마에 출연한다고 의사 수준의 지식이 있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처럼 그냥 대사를 암기하고 상황에 집중하려고 했다. 무엇보다 <더 문>은 SF라고 생각하고 접근하지 않았다. <더 문>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우주에 빗대서 체험하는 듯한 작품이다. 선우의 귀환을 돕는 과정에서 숭고한 휴머니즘을 보여주고 ‘용서’에 대해 이야기한다.
- 재국은 우주에 나가지 않는다. 달에서 벌어지는 일은 CG로 완성되기 전에 상상의 영역으로 남겨놓아야 하는데, 선우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연기했나.
= 원래 CG 비중이 높은 영화들은 대략적인 포인트만 알려주고 그냥 아무것도 없는 벽을 보면서 연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더 문>은 우주센터 세트를 제대로 짓고 이미 완성된 CG를 보면서 연기할 수 있었다. 대형 모니터를 통해 선우가 우주선 안에 있는 광경을 직접 보면서 이입할 수 있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 도경수 배우와는 직접 만나기보다는 교신하는 신에서 주로 함께했다. 어떤 후배였나.
= 김용화 감독이 도경수라는 배우를 굉장히 좋아한다. 무척 매력 있는 사람 같다. 외형적으로는 임시완 배우와 살짝 비슷할 것도 같은데 완전히 다르다. 임시완이 섬세하다면 도경수는 선이 굵다. 재미있는 캐릭터로 한번 더 만나서 연기하고 싶다.
- 제작발표회에서 “상업영화에 목말라 있었다”는 발언을 했다. 지금까지 필모그래피도 모두 상업영화 범주 안에 들어가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 한 말인가.
= 김용화 감독은 다소 쉽게 접근해서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든다. 그리고 어떻게 빌드업을 해서 어디서 터뜨려야 하는지 포인트를 잘 안다. 관객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확히 캐치한다. 이런 게 바로 상업영화다. 김용화 감독은 정말 타고난 것 같다.
-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의 임시완, <자산어보>의 변요한 등 젊은 배우들과 투톱으로 호흡을 맞춘 영화들이 최근 좋은 반응을 얻었다. 후배 배우들과 꾸준히 인연을 이어가는 태도가 중견 배우 입장에서도 좋은 영향을 받을 것 같다.
= 현장에서는 중견 배우, 젊은 배우가 구분되지 않는다. 그냥 다 똑같은 배우다. 화면 안에서 선후배가 어디 있나. 그냥 부딪치는 거지. 임시완과 변요한과는 좋은 시너지를 주고받으며 연기했기 때문에 지금도 굉장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나 자신이 그런 경계를 싫어한다. 특히 권위적인 것은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싫다.
- 배우로서 감각을 잃지 않고 젊은 관객 층에게도 소구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 나는 그저 감독이 하라는 대로 하는 사람이다. 내가 젊어 보이려고 바둥바둥 애를 쓰면 관객 눈에는 그 모습이 빤히 보인다. 배우가 멋있어 보이겠다고 의식하면 결국 그 속내가 다 뽀록나게 돼 있다. 아예 그런 생각을 하면 안된다.
- 영화 <더 디너> <소년들>, 그리고 김희애 배우와 한번 더 만나는 넷플릭스 드라마 <돌풍> 등 차기작이 많다.
= 영화는 이미 다 촬영했고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돌풍>은 막바지 촬영 중이다. 김희애 배우와는 30년 동안 만난 적이 없다가 희한하게 연달아 작품을 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