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워터 보이즈>로 동시대 청춘의 표상이 됐던 쓰마부키 사토시. 그로부터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는 <한 남자>의 주인공 키도가 되어 ‘자신이 누구인지’란 질문에 답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이 질문은 비단 키도의 것만은 아니다. 쓰마부키 사토시 역시 오랜 배우 활동을 거치며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거듭하고 있다. “배우 경력이 쌓일수록 ‘나’란 상자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르게 된다.” 이에 그는 때마다 다른 영화 속 인물로 존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미지의 상자 속을 채우고 있다. 이를테면 키도를 연기하기 위해 직접 재판정을 찾거나 실제 변호사들과 만나 배역을 연구하고, 장면 하나하나의 영화적 의미를 적확히 꿰뚫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한 남자> 속 키도의 여정은 키도가 누구인지 알고자 하는 배우 쓰마부키 사토시의 여로이기도 한 셈이다. 이로써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한 남자>의 질문은 더욱 깊은 미궁이 된다.
- 지난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 이어 다시 한국을 찾았다. 방문 소감은.
= 2~3달 전에도 개인적인 일로 한국에 온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낯설지 않다. 다만 이번엔 무대 인사를 다니면서 관객과 직접 만날 일이 많아 무척 색다른 느낌이다. 요즘 일본은 개봉 첫날에만 무대 인사를 하는 추세라 더 좋았던 것 같다. 또 일본과 달리 한국 관객은 말 그대로 무대 코앞에서 인사를 해주시더라. (웃음) 서로의 거리가 굉장히 가까운 덕에 관객의 표정 하나하나를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한국 관객은 감정을 굉장히 직접적으로 표현해주시는 편이라 더 재밌고 기뻤다.
- 키도를 연기하며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 <한 남자>에서 키도는 작품의 전체적인 판을 관조하는 역할이다. 주변 사람들의 상황을 부감처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 그런 만큼 키도의 감정이나 행동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면 관객의 몰입을 방해할 수 있다. 인물의 존재감을 너무 드러내지 않되 화면 뒤로 빠져 있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 중요했다.
- 그래서인지 키도는 매사에 여유롭고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로 보인다.
= 처음의 키도는 그렇지만, 서서히 변해가는 그의 심리를 그리는 일도 중요했다. 키도는 X에 관련된 사건이나 주변 인물들의 감정적 고락에 휘말리며 변해가는 인물이다. 서사가 진행되며 코너에 몰릴수록 본인의 정체성을 강제로라도 찾아가게 된다.
- 키도가 겪는 정체성의 변화를 어떻게 해석하며 연기했나.
= 어떤 사람도 자신을 완벽하게 해석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 키도의 변화 역시 그런 종착점을 향한다고 느꼈다. 처음엔 ‘내가 누구인가?’에 집착했다면, 차차 ‘이런 나도 받아들이자’라거나 ‘지금의 내 상황을 인정하자’라는 태도로 바뀐 거다. 나를 구성하는 요소를 하나하나 밝히기보다 대체로 감내하는 인간으로 변했다고 이해했다.
- 그러한 키도의 변화가 잘 드러나는 장면이 있다면.
= 후반부에서 아내의 외도를 묵인하는 장면을 언급하고 싶다. 지금의 인생을 놓고 싶지 않기에 본인에게 달갑지 않은 일이어도 살짝 눈감는 행동이었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모르겠다”라고 말하고 싶다. 배우는 이런 캐릭터의 선택을 영화에 그대로 표현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 감정을 숨기던 키도가 크게 분노하는 장면도 떠오른다. 신분 세탁 브로커인 오미우라 노리오(에모토 아키라)와 감옥에서 대화할 때다. 본인을 무시하며 X에 대한 단서를 쉬이 내주지 않자 좀처럼 볼 수 없던 분노를 드러낸다.
= 처음 대본을 봤을 때부터 키도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웃는 얼굴이라고 느꼈다. 때에 맞춰 여러 유형의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언급한 장면에서도 키도는 여유롭게 웃음 짓고 있다가 점차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분노한다. 감정의 급변보다는 컵에 물이 천천히 차다가 한번에 넘쳐흐르는 듯한 감정 변화를 구현하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키도가 원래 지니고 있던 삶의 태도가 확 무너진 순간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시카와 게이 감독과 장면마다 세세한 연기 톤을 논의하진 않았는데 이 장면만큼은 키도의 분노를 어느 정도로 폭발시킬 것인지 상세히 조율했다. 그만큼 중요하고 소중한 감정 신이다.
- “삶의 태도가 무너졌다”라는 표현에 대해 더 상세한 설명이 듣고 싶다.
= 물론 위 장면에서의 대화 때문에 키도가 무너진 것만은 아니다. 영화 전체에 걸친 무너짐에 가깝다. 완벽주의자형 인물이던 키도가 점차 민낯을 드러내는 셈이다. 대표적으로 집 거실에서 X 사건에 집중하던 찰나 아들이 장난감을 던져 방해하는 때다. 아이에게 화낸 후에 아내가 X 사건에 집착하는 이유를 묻는다. 이때 키도는 “나도 알 수가 없어. 현실 도피인가”라고 반문하며 속내를 드러낸다.
- X에 대한 키도의 마음은 어떻다고 느꼈나.
= X를 향한 키도의 집착은 점차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변해간다. 그래서 영화 도중부터 X라는 인물이 실제 어떤 사람일지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정도로까지 나아간다고 생각했다. 무게중심을 타인이 아닌 자신에 두게 된 거다. X의 얼굴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는 이미지 구도를 떠올리며 연기했다.
= -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시카와 게이 감독은 키도란 인물을 구현하는 데 중요했던 장면으로 터널 신을 꼽았다. 키도가 감옥에 있는 오미우라를 만나러 가는 길에 혼자 터널을 걷는다. 어떤 감정을 싣고 싶었나.
= 오미우라와의 대면 장면은 작품 내에서 가장 기술적으로 신경 쓴 부분이고, 실내에 비가 오는 등의 환상적 설정도 가장 명확하게 가미된 시점이다. 그러니 터널 신은 <한 남자>의 가장 중요한 영화적 공간, 이른바 거짓의 미궁에 키도가 진입하는 상징적 장면이다. 그러나 영화적 해석과 연기자의 태도는 다르다. ‘이 장면엔 이런 의미가 있으니 어떤 감정을 실어야겠다’라는 마음가짐을 뚜렷이 갖기보다 키도로서 그 자리에 존재하는 일에만 집중했다.
- 이시카와 게이 감독과는 세 번째 협업이다. 전체적인 디렉팅 과정도 궁금하다.
= 감독님과는 굳이 하나하나 논의하지 않아도 마음이 맞는다. 대본을 받은 후 식사 자리에서 한번 만났는데 애써 얘기하지 않아도 작품과 캐릭터를 해석하는 방향성이 같다고 느꼈다. 그래서 현장에서 촬영할 땐 앞서 언급한 정도를 빼고선 한 장면 한 장면 세세한 디렉팅이 있진 않았다. 세 번째 협업에서뿐 아니라 처음부터 우린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 이시카와 게이 감독의 전작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에선 기자를, 이번엔 변호사를 연기했다.
= 특정 직종을 연기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거쳤나.기자 역을 준비할 땐 신문사나 잡지사를 찾아가 기자들을 역으로 취재하기도 했다. (웃음)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실제 재판에 자주 참관했다. 재판정의 냄새나 온도를 체감해야 했고 변호사들이 대략 어떤 유형으로 나뉘는지도 연구했다. 변호사들에겐 비밀 유지 의무가 있는 터라 실제로 의뢰인들과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나누는지까진 알 수 없었다. 대신 직접 변호사들을 만나 여러 조언을 구했는데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한 변호사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내가 지금 이런 어투를 쓰고 이런 표정을 짓는 건 쓰마부키씨 앞이라 그런 거다. 다른 의뢰인과 대화할 땐 상대에 맞는 스타일로 바뀌게 된다”라는 말이었다. 변호사도 사람이다. 특정 재판의 경험만으로 그 인물을 규정할 순 없었던 거다. 그때부터 키도가 어떤 방식의 변호를 해야 하고, 어떤 유형의 변호사인지에 대해선 아예 생각을 접었다. 결국엔 장면마다, 상황마다, 상대하는 사람마다의 연기를 하게 됐다.
- <한 남자>는 자아 정체성에 대해 말하는 영화다. 누군가가 “쓰마부키 사토시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고 싶나.
= 어렵다. (웃음) 배우란 직업을 갖고 있으니 아무래도 본인이 걸어온 발자취를 알기 쉬울 것이고, 스스로 누군지도 비교적 잘 알 수 있겠다고 생각할 법하다. 그런데 젊었을 때 출연한 작품을 보면 “그래, 젊을 때 난 이랬지”가 아니라 “이게 누구지?”란 생각부터 들더라. 그냥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 배우 경력이 쌓일수록 나에 대해 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아, 이런 행동이나 감정은 어떤 연기에 참고해야겠다’라는 생각만 들다 보니까 오히려 ‘쓰마부키 사토시’가 누구인지 더 모르게 된다. 그래도 질문에 답해보자면, ‘쓰마부키 사토시’란 상자에 무언가 들어가 있는 건 맞을 텐데, 어떤 게 들어 있는지는 때마다 다르게 느낀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