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껍데기다. 그러나 이 껍데기는 너무 과중한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겨우 몇 글자의 이름은 가족 관계와 사회적 지위, 고유의 성격이나 밟아온 과거를 단순 합산하여 한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곤 한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곤 하나 실제 우리 삶의 부피에 비해 이 집은 종종 좁아 보이기 일쑤다. 이에 <한 남자>는 주인공 키도(쓰마부키 사토시)와 X(구보타 마사타카)를 둘러싼 껍데기들, 가령 그들의 이름이나 체면 같은 것들을 벗긴다. 더하여 <한 남자>는 영화의 이미지를 감싸안고 있는 몇 가지 껍데기, 이를테면 서사의 개입과 설명식의 주석들까지 벗겨낸다. 이로써 그것들 속에 진정 무엇이 들었는지 집요히 바라보게 만든다.
작품의 도입부부터 호기롭다. 브라운 톤의 안락한 조명, 카메라는 벽을 비추고 그곳에는 르네 마그리트의 <금지된 재현>이 걸려 있다. 그림 속의 한 남자는 거울을 보고 있는데 거울엔 본인의 뒷모습이 보인다. 오프닝 타이틀이 오르자 액자 그림이 확대되더니 프롤로그는 끝난다. 장면은 전환되어 비 오는 날 한 문구점의 외관을 비추는 설정숏이 등장한다. 문구점 내부로 화면이 이동하자 30대쯤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홀로 물건을 정리하고 있다. 문구점 주인인 것 같은데 펜을 몇개 자리에 꽂아 넣다가 돌연 눈물을 흘린다. 인물의 이름도, 눈물의 이유도, 앞뒤 상황도 없이, 말 그대로 어떤 껍데기도 없이 갑작스레 마주한 여인의 감정에 관객은 어찌할 바 없이 녹아든다.
우는 여인
우는 여인의 이름은 리에(안도 사쿠라)다. 리에는 몇해 전 두살배기 아이를 뇌종양으로 잃었다. 그 탓에 남편과도 헤어졌으며 혼자서 아들 유토를 키우는 중이다. 그런 리에에게 다이스케(구보타 마사타카)가 다가온다. 그림 그리기가 취미인 그는 화구를 사러 리에의 문구점에 자주 들르고, 이내 둘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그렇게 몇해가 흐르고 둘째 아이가 서너살이 됐을 무렵 다이스케가 사고로 죽는다.
그런데 1주기 참배에 찾아온 다이스케의 친형은 리에의 남편이 본인의 동생이 아니라 말한다. 리에는 이혼 당시 도움을 받았던 변호사 키도에게 남편의 정체를 밝혀 달라 의뢰한다. 조사 결과 리에의 남편은 다이스케의 호적을 매입한 미지의 인물임이 밝혀진다. 키도는 가짜 다이스케를 X라 부르며 그의 진짜 정체를 알기 위해 탐문을 계속한다. 이름이란 껍데기를 치워내고 그의 진실을 찾아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키도는 외려 재일 교포, 엘리트 변호사, 남편이자 아빠란 껍데기에 쌓여 질식 중인 자신의 처지에 대해 고뇌하게 된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관객은 도입부 속 리에의 갑작스러운 눈물이 자식을 잃은 부모의 아픔이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눈물의 이유가 제공됐다 하여 도입부가 지닌 감정의 농도가 필연적으로 깊어지진 않는다. 이해와 느낌은 다르다. 서사를 이해하는 일과 장면의 감정을 느끼는 일은 사실 명확한 인과에 묶여 있지 않다. 감정의 정수를 이야기의 껍데기로 감싸는 선택은 정서의 보호보다 은폐에 가까울 수도 있다. <한 남자>는 이해와 느낌의 차이를 플롯의 배치로 보여준다. 사건의 전말을 뒤에서 밝히는 추리물의 형식을 채택함으로써 초반부 리에의 눈물을 껍데기 없는 순수한 감정의 덩어리로 남겨둔 것이다.
감독의 전작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과 <한 남자>는 모두 플래시백을 자주 사용하지만, 그 용법은 다르다. 전자는 주인공 다나카(쓰마부키 사토시)가 밝히는 살인사건의 서사적 반전을 명확히 알려주는 공격책으로 쓰인다. 종래의 추리물과 같이 이 플래시백의 결말은 영화의 결말까지 깔끔히 닫는다. 후자 역시 플래시백을 통해 X의 실명, 행적, 가족 관계 등 사실적 정보나 키도를 둘러싼 여러 제반 사항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것이 영화의 답이나 종착점은 아니다. <한 남자>는 결말에 이르러서도 ‘당신은 누구입니까?’란 영화의 주제에 대해 답변을 유보한다. 키도가 느끼는 X의 진실, 또 키도가 느끼는 자신의 정체성은 영구한 미제로 남을 뿐이다. <한 남자>의 플래시백은 서사의 조각이라기보다 장면들이 지닌 감정의 잔여를 오롯이 간직하고자 하는 방어책인 셈이다.
금지된 재현
<한 남자>는 일반적 서사 매체보단 회화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키도가 X의 진짜 이름을 알게 된 단서는 X가 그린 그림이며, <한 남자>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이미지 역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금지된 재현>이다. 즉 이시카와 게이 감독은 의도적으로 그림의 존재감을 연신 환기하며 <한 남자>를 회화적 영화에 빗댄다. 다만 <한 남자>의 회화성은 프레임 내의 시각적 미, 미장센의 아름다움을 칭하는 보통의 용례와 다르다. 그렇다고 로이 앤더슨의 영화처럼 회화적 구도 내에서 이뤄지는 극한의 롱테이크를 택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특별한 이야기 없이, 달리 말해 이미지를 둘러싼 서사적 껍데기 없이 진행되는 몇몇 장면의 밀도가 너무도 높고 견고하다. 시시각각 덧칠되어 풍부해지는 점묘화 같다.
이러한 장면의 예시는 전술했던 도입부 속 리에의 눈물만이 아니다. “빛이 키도의 전신을 스캔하듯 실루엣을 만들거나, 키도가 홀로 긴 터널을 걸어가는 장면 등 키도 주변을 이루고 있는 순간들이 쌓이다 보면 어떤 윤곽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는 감독의 말처럼 <한 남자>의 주제와 인물을 표현하는 것은 대개 순간의 이미지들이다. 다만 멈춰 있는 이미지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순간의 움직임들이다. 설명 없이 그려지는 인물들의 표정과 걸음걸이, 자연물의 흐르는 듯한 흔들림이 영화의 감정을 대변한다.
키도가 X에 대한 조사 결과를 설명하며 리에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남편 분에게 리에씨와 함께한 3년9개월은 인생의 전부였을 겁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정말 행복했을 겁니다.” 조금 바꿔 말할 수 있겠다. “관객에게 <한 남자>와 함께한 2시간만은 진짜였을 것”이다. 영화의 시간 바깥에서 일어났던 일, 이를테면 X나 키도의 과거 혹은 리에 가족의 미래는 관객이 지레짐작할 순 있더라도 확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금지된 재현이다. 영화에 허락된 재현은 그저 영화가 택한 시간을 보여주고, 겹겹이 쌓아가는 일뿐인지도 모른다고 <한 남자>는 겸손을 떨며 말한다. 등장인물들이 타인과 자신의 정체를 밝히려 보낸 각각의 시간이 바로 그들의 진실이란 듯 말이다. 자잘한 사실들의 연결은 부차적이다. 이러한 태도가 <한 남자>의 장면 장면을 마치 하나하나의 그림처럼 풍부한 알맹이로 만든다.
마지막으로 <한 남자>의 어떤 시간을 언급하고 싶다. 리에가 X와 결혼하기 전, 둘은 식당에서 마주 보고 앉아 있다. 리에가 과거의 아픈 가정사를 X에게 털어놓는다. 조금이라도 더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자책하며 운다. X는 이런 리에의 말을 성심껏 경청한다. 카메라는 둘의 측면을 풀숏으로 비추다가 아주 천천히 리에의 바스트 숏까지 트랙인한다. 바깥에서 스며들어 피사체에 살짝씩 묻는 햇살, 창문 너머로 흔들리는 나뭇잎과 그 그림자들, 그리고 서로의 진심을 포용하며 손을 포개는 두 사람. 이 아름다운 대화 신을 완성하는 안도 사쿠라의 거짓 없는 표정, 그것에 접근하는 카메라의 사려 깊은 속도까지. 그 순간엔 정말 어떠한 껍데기도 없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