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편만 놓고도 심상치 않은 기대감을 불러내더니, 8월18일 시리즈 공개와 동시에 2화 ‘주오남’, 3화 ‘김경자’를 연달아 본 시청자들을 아연실색게 했다. 지금 안재홍은 <마스크걸>이 지닌 화제성의 중심에 있다. 올봄 영화 <리바운드>에서 실존 인물을 연기하면서 이미 굳건한 존재감을 보여주었음에도, <마스크걸>에서 다시 만난 안재홍의 얼굴엔 익숙한 구석이 없다. 탈모와 피부병 분장을 한 안재홍이 연기하는 인물은 주인공 김모미의 직장 동료이자 일본 애니메이션 오타쿠인 주오남. 외모 콤플렉스를 숨긴 채 인터넷 방송의 스타가 된 마스크걸에게 동질감을 넘어 사랑을 느끼는 남자다. 이른 죽음 이후에도 유령처럼 떠도는 주오남의 잔상은 자칫 희화화에 머무를 위험이 있는 캐릭터에 정확한 표정과 순정을 투여한 배우의 자질에 힘입어 선명히 지속된다.
“어떤 작품과 만날지는 내가 재단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일”이라지만 <마스크걸>이 결코 흔치 않은 기회라는 직감마저 물리칠 수는 없었다. 관객만큼 배우 자신도 주오남을 제안받고 “솔직히 놀랐다”. 첫 OTT 시리즈 출연, 게다가 리얼돌과 대화하며 홀로 생일 케이크를 자르고 자위 기구를 셀프로 선물하는 남자라니. 과감한 제안 앞에서 안재홍은 덩달아 대담해지기로 했다. “마음이 움직이면 빠르게 결정하는” 습관대로 3일 만에 김용훈 감독에게 응답을 보냈다. 다중 시점의 플롯을 읽어내려가는 사이 배우 이전에 관객 안재홍의 흥미가 발동한 덕분이기도 하다. “괴상하고 독특한 작품이었다. 그래서 더 끌렸다. 용기란 걸 내보고 싶었다.” 공교롭지만, 그렇다고 뜻밖의 만남은 아니다. 자신의 이면을 경신하고픈 지극히 배우다운 욕망이 안재홍에게도 언제나 존재했으므로. “안타고니스트 역할로 좋은 작품과 연이 닿는다면 어떨까, 막연한 바람은 늘 품고 있었다.”
건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출신으로 홍상수 감독의 현장에서 배우인 동시에 연출부를 겸했을 만큼 인디 신을 활보한 배우지만 안재홍이 대중적인 인지도와 이미지를 갖추기까지 그리 오래 걸린 편은 아니다. 흔한 편견대로라면 독립영화 배우가 마이너한 이미지를 탈색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법도 한데, 안재홍은 처음부터 그저 안재홍다움으로 받아들여졌다. 남성의 ‘무해한’ 매력이 하나의 코드로서 소비되기에 한발 앞서, 그는 이미 <족구왕>(2014)과 드라마 <응답하라 1988>(2015)에서 엉뚱함, 순진함, 친근함을 이유로 사랑받은 배우다. 안재홍의 스타성은 곧 연기력과 친숙함을 두루 갖춘 배우를 향한 대중의 호감으로 입증됐다. <위대한 소원> <굿바이 싱글> <임금님의 사건수첩>에서 코미디의 지평을 넓혔고, 트렌디 드라마 <쌈, 마이웨이> <멜로가 체질>이나 영화 <해치지않아>에선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연기 스타일의 장점을 극대화했다. <소공녀>의 공장 노동자이자 돈이 없어 애잔한 연인인 한솔, <사냥의 시간>의 속 깊은 동창생 장호는 배우가 지닌 희극적 이미지에서 깊이와 쓸쓸함을 알아본 연출자들이 파토스를 끌어낸 경우다. <리바운드>에 이르러 그는 코트를 관장하는 리더로 분한다. 안재홍은 실존 인물인 강양현 코치를 소화하기 위해 말투와 제스처는 물론 10kg 이상 몸무게를 증량해 데뷔 초 이후로 볼 수 없었던 묵직한 실루엣으로 나타났다. <마스크걸>에서는 여태 한번도 시도한 적 없는 양식적인 분장을 덧입고서 선악의 경계를 오간다. 올해 그의 행보는 마치 체급을 불려 나타난 선수의 한방을 보는 것 같다.
“김경자(염혜란)가 죽은 아들의 노란 점퍼를 입고서 복수를 감행한다는 설정을 보고 <마스크걸>에서 주오남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감을 잡았다. 오남은 죽음과 동시에 경자에게 바통을 건네면서 분노한 엄마가 달려나가게 만든다. 오남이 <마스크걸>의 이야기가 폭주할 수 있도록 추진력을 모으는 인물, 혹은 뇌관을 터뜨리는 인물이라면 더욱더 장르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겨야만 했다. 몇몇 장면들의 수위가 꽤 센 것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했다.” 자신의 쓰임을 정확히 이해한 배우에게도 의외의 고충은 있었다. 어둡게 닫힌 방 안에서의 시간을 안재홍은 이렇게 회고한다. “모니터를 대체한 블루 스크린을 보면서 채팅창의 내용과 속도를 혼자 상상해야 했고 대화는 인형하고만 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세상 밖으로 나가 실제 사람과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지더라. (웃음)”
사랑하는 여자 대신 살인죄를 뒤집어쓸 용의가 있는 남자를 지켜보는 동안, 안재홍은 대본 귀퉁이에 ‘삐뚤어진 깊은 마음’이라고 썼다. “오남이 울고 있는 모미에게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 먼저 나가라’고 말할 때 무언가 턱 하고 마음에서 북받치는 게 있었다. 오남의 진심은 이 순간에 있다고, 그렇게 느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보는 분들마다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오남의 서사는 비극이다. 세상과 늘 조금씩 어긋났고, 그 속에서 내린 선택들로 인해 점점 더 수렁으로 빠지더니 결국에는 파국에 이른다.” 파격적 변신에 대한 호평의 일환으로 SNS상에서는 “안재홍이 악마와 거래했다”는 식의 밈까지 퍼졌다. “이 정도로 어두운 카타르시스와 함께 다가온 인물은 내게도 처음”이라고 그 역시 인정한다. 그러나 안재홍은 자신의 결과물이 거창한 단어로 수식되는 일이 하여간 겸연쩍은 눈치다. “내가 배우로서 지향하는 바가 뭐지? 새로운 작품을 제안받을 때 주로 이것 하나만 질문해본다. 헷갈릴 때도 있지만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은 간단하더라. 좋은 배우가 되고 싶은 것, 연기를 계속해서 더 하고 싶은 것. 그러니 안 가본 길로 가보는 즐거움을 마다하지 않는 것뿐이다. 앞으로도 그냥 계속 여행하듯 나아가보고 싶다.” <마스크걸>로 새 개척지에 당도한 뒤에도 그는 쉬지 않고 다음 경로로 이동 중이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면 이전과는 마음이 조금 달라져 있다. 한 작품을 잘 끝내고 난 후도 비슷하다. 다음에는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 같고, 더 즐겁게 놀 수도 있을 것 같은 용감해진 기분이 든다.”
영화와 현실의 틈새를 좁혀온 안재홍의 청년들은 조금씩 미덥게 나이 들고 있다. <리바운드>와 <마스크걸>을 마주하는 현재, 우리는 어느덧 30대 중반을 지나는 배우 안재홍의 분기점을 목격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이어질 작품들 역시 그가 가장 잘하는 것과 새로운 모험을 골고루 품은 모양새다. 내년 공개 예정인 넷플릭스 시리즈 <닭강정>에선 “원작 웹툰을 처음 봤을 때 ‘날 보고 그렸나?’ 생각할 정도로 엄청난 싱크로율을 자랑하는 캐릭터”로 나온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온스크린 섹션에 초청된 티빙 시리즈 <LTNS>에선 배우 이솜과 생계형 부부로 남다른 호흡을 맞춘다. 인터뷰에 앞서 “한창 <LTNS>의 클라이맥스 신을 촬영 중이라 목이 쉬어 죄송하다”고 첫인사를 건넸던 그는 마무리 인사로 차기작에 대한 기대감을 슬쩍 지피는 일도 빠트리지 않았다. “임대형, 전고운 두 감독님이 각본을 쓰고 공동연출을 하는 데서 오는 엄청난 시너지가 있다. 밀도 높은 드라마가 나오리란 예감이 든다.”
<마스크걸>로 만난 배우 안재홍의 낯선 표정
대본에는 없던 일본어 대사 “아이시테루!”를 외치는 순간, 안재홍은 그를 마주한 김모미만큼이나 주오남 스스로도 본능적인 수치심을 느끼고 있음을 표현해낸다. 차마 뜨지 못한 눈, 아래로 축 처진 채 일그러진 입꼬리를 하고서.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남자의 모습은 후련하기는커녕 미묘하게 낭패스럽다. 관계에 숙맥인 남자를 처음 연기하는 것도 아닌데, 이 순간 오남의 얼굴은 안재홍에게서 처음 보는 그것이다. 오타쿠적 면모를 부각하는 일본어 대사보다 주오남에게 축적된 오랜 실패감과 접속한 것이 이 장면의 진정한 성취다. 안재홍은 “촬영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스크걸>에 유독 클로즈업이 많이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웹툰 원작의 이야기라고 해서 만화적으로 그리기보다 오히려 더 섬세한 접근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배우의 얼굴을 여과 없이 담고자 하는 김용훈 감독님의 바람이 느껴져서 가능한 한 더 감정에 예민해지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