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M 오펜(O’PEN, 이하 오펜)이 협업한 2023 부산 스토리 팸투어가 진행됐다. 오펜 스토리텔러 공모전 4, 5기를 통해 발굴된 19명의 작가와 이종민 CJ ENM IP개발센터장 등 오펜 관계자 8명이 참여해 부산 곳곳의 촬영 명소를 방문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본 프로그램은 부산영상위원회와 오펜이 올해 4월부터 본격적으로 추진 중인 ‘스토리 공동창작 프로젝트’의 연계 사업이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오펜 출신의 작가 2명, 부산에서 공모로 선정된 작가 2명이 집단창작 형태로 신진 스토리 IP를 내놓을 계획이다. 마찬가지로, 팸투어 역시 부산 지역의 창작 원천과 수도권 창작 인력의 교류를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진행됐다.
<씨네21>은 양일간 이어진 팸투어에 동행했다. 책상 앞에서 종일 머리를 싸매고 있을 것만 같은 작가의 직업적 이미지는 편견이었다. 팸투어 참여 작가들은 아픈 역사가 곳곳에 어려 있는 부산의 장소성을 몸소 마주하며 잠시도 자료 수집의 활기를 잃지 않았다. 수도권보다 대개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20세기의 공공 아파트, 항만, 적산가옥이나 쉽사리 접근할 수 없었던 공공기관의 내부 시설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장소들은 온갖 장르물의 매력적인 서사 공간이 되는 한편 로맨스 코미디물의 이질적인 배경으로 작동하며 작가들의 상상력을 일깨웠다. 오펜 작가 19명의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청취한 동행 취재기를 전한다.
DAY 1
부산 팸투어의 첫 일정은 부산교통공사의 부산 노포차량기지 견학이었다. 통상 보안 구역으로 취급되어 일반인의 접근이 제한되는 철도 기지이지만, 부산교통공사는 다수의 영화·시리즈 촬영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다. 여느 작품, 여느 장르에나 필요한 대중교통 공간이니만큼 참여 작가들은 호기심을 곤두세웠다. 특히 그들의 관심을 끈 것은 아직 미운행 중인 신축 철도의 내부였다. 철도 천장에 대놓고 설치돼 있는 CCTV를 보고 홍성연 작가(오펜 숏폼 5기)는 “혹시 CCTV의 사각지대는 없냐?”고 역무원에게 묻는다. 질문을 들은 옆자리의 작가는 “이분 범죄물 쓰시는 분이겠네…”라고 속삭여 일동 폭소를 터뜨렸고, 다른 작가들은 CCTV가 24시간 감시되는지, 영상 자료는 얼마 동안 보관되는지 등의 질문을 연달아 쏟아냈다.
해운대 엘시티 랜드마크타워 98~100층에 자리한 초고층 전망대 ‘부산엑스더스카이’ 견학까지 마친 후, 팸투어 참여 작가들과 부산영상위원회, 오펜 관계자들이 한데 모여 회포를 풀었다. 창문 바깥에선 찰리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가 상영되며 운치를 돋웠다. 노도연 작가(오펜 영화 5기)는 “코로나19 팬데믹 탓에 사람을 만나거나 대외적인 자료 조사 일정을 가지지 못했던 기수라 아쉬웠다”며 “직접 듣지 않고는 몰랐을 실제 사례들을 모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1일차 소감을 남겼다.
DAY 2
부산 팸투어 2일차의 첫 견학 장소는 50여년 전에 건립된 부산시 최초의 공공 아파트인 영주시민아파트였다. 재개발을 논의 중인 터라 아파트의 한동 전체가 실거주자 없이 남겨진 상태이기에 <리바운드> <대외비> 등 여러 영상물의 촬영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폐허에 가까운 아파트 옥상을 함께 거닐던 신희선 작가(오펜 단막 5기), 김다영 작가(오펜 숏폼 5기)는 “당장 여기서 <스위트홈2> 같은 디스토피아물을 찍어도 되겠다”면서 “사진이나 매체를 통해서 로케이션 후보들을 보는 것보다 훨씬 생생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인지 너무 무섭다”란 웃음 섞인 감상을 들려줬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나 <작은 아씨들> <친구> 등 30편의 영화·시리즈물 촬영지로 알려진 부산 서구의 부산공동어시장은 국내 수산물 위판량의 30%를 책임지고 있는 만큼 대규모의 촬영 공간을 자랑한다. “확실히 이런 곳에선 밤에 사람 한명 바다에 빠트려도 모르겠다…”라는 수사·범죄물 작가들의 무시무시한 논의가 오가는 가운데 색다른 의견도 등장했다. 이민주 작가(오펜 숏폼 5기)는 “대체로 중장년층 근로자가 많이 보이는데, 이런 환경에서 젊은 남녀가 일하며 만나는 것도 이질적이고 재밌을 것 같다”며 로맨스 코미디물 전문 작가의 면모를 증명했다. 다만 아쉬운 소식도 있었다. 재개발 계획 중인 영주시민아파트와 마찬가지로 부산공동어시장 역시 대대적인 현대화 사업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2일차의 방문 장소들을 한마디로 일축하자면 ‘사라져가는 부산의 풍경’이었고, 참여 작가들은 “여기저기 없어지기 전에 하루빨리 써먹어야겠다”며 조급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부산에 단 8곳 남아 있는 공인 근대건조물 중 하나인 양덕운 적산가옥. 아름드리 소나무가 빽빽하여 고풍스러운 이곳에서도 작가들의 독특한 장르적 상상력이 끊이지 않고 발동했다. 케이퍼 무비에 꾸준히 관심을 두고 있는 류병구 작가(오펜 영화 4기)는 적산가옥이 “겉에서 보기엔 무척 비밀스럽고 내부엔 뭔가 사연이 많아 보이는 터라 인물들이 작당 모의하기에 딱 좋아 보인다”면서 공간 곳곳 물건을 숨겨놓을 만할 장소를 찾고 있었다. 남들보다 더 꼼꼼히 건물 내부를 살펴보고 있던 홍은주 작가(오펜 단막 4기)는 “6·25를 겪은 군인이 주인공이고, 그가 집 안 어딘가에 돈을 숨겨놓는 설정의 작품을 집필 중”이라며 “이 장소의 분위기가 이야기에 마침 잘 어울린다. 저기 있는 나무 금고에 돈을 숨기면 되겠다는 생각까지 든다”고 창작에 대한 상세한 청사진을 그렸다.
2일차 팸투어의 종점은 <브로커>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등이 촬영됐던 가덕도의 대항마을 부근이었다. 러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일본 군대의 전쟁 기지로 사용됐던 포항항 포진지, 마찬가지로 일본군의 진해만 요새 사령부가 들어섰던 외양포 일대를 견학하며 전문 해설사의 역사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역사의 분기점마다 외세의 침략을 마주하며 쌓아온 부산 고유의 역사성이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작가들의 창작욕을 일깨웠다.
홍성연 작가의 창작 노트
“글씨 못 알아보실 텐데….” 팸투어 첫날부터 유독 눈에 띄는 참여 작가가 있었다. 분홍색 표지의 노트를 들고 다니며 누구보다 열심히 필기하고, 열심히 질문하던 홍성연 작가다. 노포차량기지 견학 당시, 자갈치역에 근무하는 베테랑 역장의 업무 이야기를 빠짐없이 수집한 그는 “드라마 <라이브>의 경찰관 서사처럼 역무원이 주인공인 12부작 시리즈를 뚝딱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노트 속 필기 내용을 흔쾌히 내보였다. “방에만 있으면 생각도 갇힌다. 돌아다니고 사람들과 대화해야 생각이 뚫린다”는 그의 말에서 이번 팸투어의 가치를 느낄 수 있었다.
참가자 단체 사진
영주시민아파트에서 남긴 참가자들의 단체 사진. 다소 을씨년스러운 공간 분위기 탓에 한 오펜 관계자는 “귀신들 설 자리도 필요하니까 중간중간 자리를 띄어달라”며 겁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