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이하 DMZ영화제)는 올해 변화를 꾀했다. 프로그램 섹션을 전면 개편해 국제경쟁, 프런티어, 한국경쟁으로 경쟁부문을 나누고 비경쟁 섹션을 베리테, 다큐픽션, 에세이, 익스팬디드, 기획전으로 구분했다. 이 다채로운 섹션에서 총 54개국 148편을 만날 수 있다. 영화제는 CGV 고양백석, 메가박스 백석벨라시타에서 9월14일부터 21일까지 열린다. 달라진 DMZ영화제의 지형도를 탐색하려는 관객을 위해 가이드를 준비했다. <씨네21>이 엄선한 9편의 추천작과 고 이강현 감독 개인의 영화사를 되짚는 기획전 ‘메모리얼 이강현’, 극장 밖에서 영화와 관객의 접점을 도모한 비(非)극장 프로그램 ‘귀신을 본 적 있나요?’를 차례로 소개한다.
이터널 메모리 The Eternal Memory
마이테 알베르디 / 칠레 / 2023년 / 100분 / 개막작 / 김예솔비 영화 평론가
<이터널 메모리>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공고라와 그의 동반자 파울리나가 보내는 다정하고 열렬한 시간을 응시한다. 저널리스트로 일했던 아우구스토 공고라는 피노체트 독재의 참상을 목격하고 이를 언론에 알리기 위해 나섰던 인물이다. 그렇기에 공고라의 기억을 붙잡으려는 두 사람의 분투는 특정한 역사의 이미지를 망각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한 구원에의 몸짓이기도 하다. ‘기억이 있는 자에게 용기가 있다’라는 말은 단순히 알츠하이머라는 상실의 병에 전하는 위로이기보다 금지된 기억을 역사로부터 누락시키지 않기 위해 함께 저항하는 용기를 칭하는 문장이 된다.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것이 망각되는 순간까지 끌어안는 것이며, 그 순간을 가능한 한 멀리 지연시키면서 자신의 보폭으로 희망의 반경을 더듬는 일과 같다. 영화는 아카이브 푸티지 영상과 홈비디오, 기록과 관찰 사이를 오가면서 기억과 망각 사이를 팽팽히 순환하는 한 사람의 미시 세계를 들여다보고 그 풍경을 칠레의 근현대사와 느슨하게 겹쳐놓는다. 화면이 어두워지고 다시 밝아질 때마다 공고라의 증상은 점점 악화되고 알츠하이머는 예정된 상실을 상연하지만, 감동적인 것은 카메라가 기록하기를 멈추지 않을 때다. 영화는 쇠잔해가는 육체와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단단하게 보호되는 어떤 기억의 존재 방식과 기록의 상관관계를 가늠해 보게끔 만든다.
어나더 바디 Another Body
소피 캠튼, 루벤 햄린 / 미국, 영국 / 2023년 / 80분 / 국제경쟁 / 김예솔비 영화평론가
대학생 테일러는 자신의 얼굴이 딥페이크 기술로 합성되어 포르노 사이트에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얼굴뿐 아니라 이름과 학교, 주소까지 노출된 탓에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조차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테일러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보호받을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은 딥페이크가 조성하는 익명성 속에서다. 테일러라는 이름조차 가짜라고 밝힌 그녀는 가상의 이름과 얼굴을 빌려 잠입 수사를 시도한다. 그녀는 딥페이크에 대한 마땅한 처벌법이 제정되지 않는 현실에 낙담하는 대신 스스로 범인을 추적하며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동료들을 조우한다. <어나더 바디>는 각종 SNS와 포털, 불법 포르노 사이트를 옮겨다니며 추리를 벌이는 노트북 무비이면서, 트라우마적 사건을 경험한 이가 자신의 절망을 헤쳐나가는 과정이 담긴 자기 고백적 비디오 다이어리다. 테일러의 얼굴은 모든 여성의 얼굴이 기입될 수 있는 잠재적 자리이고, 바로 그 점으로부터 연대의 정의가 가능해진다. 그것은 속삭임이 모이면 하나의 구체적이고 정확한 육성으로 들린다는 사실이다.
수카바티
선호빈, 나바루 / 한국 / 2023년 / 102분 / 한국경쟁 / 조현나
서포터스의 개념조차 명확하지 않던 1990년대. ‘레드’(RED)는 K리그를 주름잡던 안양LG치타스의 팬클럽 이름이었다. 이름처럼 붉은 화약포를 한꺼번에 터트리는 것이 이들 응원의 시그니처와 다름없었다. 당시 K리그를 휩쓸던 안양LG치타스는 2003년, 돌연 서울로 연고지를 이전해 현재의 FC서울로 변모한다. 갑작스레 적을 둘 팀을 잃었음에도 레드는 와해되는 대신 자신들의 축구팀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연출을 맡은 나바루 감독이 본인의 터전 안양을 돌아보는 것에서 영화의 여정이 시작된다. 안양을 둘러보던 그가 포착한 것이 바로 레드였고 감독은 삶의 일부인 축구를 잃은 팬들의 상실감을, 어떤 면에선 가족보다 더 깊게 결부된 팀과 팬의 관계를 세심히 들여다본다. 레드를 창단한 이들부터 다른 팀 서포터스와 언론사 기자까지 다양한 시점의 증언이 감독의 기록에 힘을 싣는다. FC치타스의 자리에 FC안양이 들어서고 마침내 ‘수카바티’의 뜻이 밝혀지는 극의 말미엔 뭉클함마저 느껴진다. 특정 스포츠팀을 좋아하거나 혹은 그런 경험이 없을지라도 <수카바티> 속 팬들의 열렬한 애정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맨 인 블랙 Man in Black
왕빙 / 프랑스, 미국, 영국 / 2023년 / 60분 / 프런티어 / 이보라 영화평론가
나신의 남자가 계단을 걸어내려와 원형 무대로 진입한다. 빈 객석 틈으로 중앙에 다다른 나이 든 남자는 불가해한 동작을 반복하며 움직인다. 카메라는 그의 몸을 지나치게 탐색한다. 핏줄과 각질과 상처와 주름에 노골적으로 다가가며 인물의 신체를 가감 없이 취할 기세다. 동시대 중국 사회의 풍경을 면밀하게 담으려 애써온 왕빙은 이번에 재독 중국인 작곡가 왕시린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그는 1960년대에 반정부 인사로 낙인 찍혀 고문과 수감을 겪었다. 실존 인물에게 거의 달라붙어 그(들)의 삶을 가능한 한 투명하게 담아내던 왕빙은 <맨 인 블랙>에 이르러 별안간 당혹스러운 1인극을 시도한다. 왕시린이 말문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조차, 시종 울려 퍼지는 그의 음악은 마치 소음처럼 대사를 덮으면서 ‘음과 말’이 충돌한다. 실재의 포착을 고수해오던 왕빙은 왜 이토록 형식적인 모험에 관심이 생겼을까? 그렇다면 <맨 인 블랙>은 다큐멘터리인가? 예술가와 작품이 서로를 방해하고 끼어드는 과정을 선보이면서, 영화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오간다.
나는 군산에서 태어나 7년、그리고 일본으로 송환되고…
존필원 / 일본, 한국 / 2023년 / 239분 / 한국경쟁 / 이보라 영화평론가
한국영화에서 전라북도 군산을 로케이션 촬영지 또는 서사의 배경으로 삼은 적은 더러 있었지만, 존필원 감독의 <나는 군산에서 태어나 7년、 그리고 일본으로 송환되고…>에서만큼 이 지역이 복잡한 역사성을 지닌 장소로 등장하(지 않)는 사례는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하면 대나무숲이 펼쳐지는 화면 틈으로 어떤 남성의 일본어가 들려온다. 그는 제목처럼 1938년 군산에서 태어난 뒤 어린 시절을 보내다 일본으로 강제 송환된 캄바야시 아키오다. 군산에서 시작한 그의 회고는 전후 일본으로까지 이어진다. 와중에 숲을 떠나 도심을 떠도는 카메라는 애니메이션 필터를 씌운 듯 노이즈로 가득 차 형상을 알아볼 수 없도록 뭉개진다. 종종 캄바야시의 말은 인터뷰이를 상정한 채 특정 사진이나 활자 등을 언급하지만 관객은 이 대화가 발생하는 현장을 모른다. 이 불일치와 미지의 감각은 내내 이어지지만 끝내 기묘한 감동을 건넨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매우 구체적인, 캄바야시의 기억력이다. 하긴 그는 마흔 넘어 참석한 동창회에서 군산초등학교의 교가를 불렀던 이다. 개인의 기억이 역사가 되는 경험, 그리고 그 역사를 이야기로 바꾸는 모험이 만나 만들어진 대장정이다.
니트 아일랜드 Knit’s Island
에키엠 바르비에 외 / 프랑스 / 2023년 / 98분 / 프런티어 / 김예솔비 영화평론가
세 사람이 숲을 가로질러 마을에 도착한다. 자신들을 다큐멘터리스트라 소개하는 이들은 마을 공동체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다며 인터뷰를 요청한다. 마을 사람들은 무장한 채 폐허가 된 건물에 모여 살고 있고, 좀비가 득실거리는 바깥은 언제 적의 총알이 날아올지 모를 위험지대다. 기묘한 것은 이 다큐멘터리가 게임 속에서 제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언뜻 보기에 게임 시점 녹화 기능을 이용해 연출된 화면처럼 보이지만, 이들의 여정은 정해진 서사의 줄기 없이 관찰 다큐멘터리 형식을 따른다. 이는 정해진 플레이 없이 스스로 생존 전략을 구사해야 하는 ‘데이즈’(DayZ)라는 게임 자체의 특징이기도 하다. 게임의 서사는 이미 주어져 있기보다 플레이어의 선택과 의지로 조정 가능한 대상이 된다. 플레이어들은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위험으로부터 자극을 얻는 동시에 자신만의 공동체를 만들고 거닐며 위안을 누린다. 이 감각은 정녕 현실 세계와 치환 가능한 경험일까? 가상과 현실 사이, 어디에도 위치지어질 수 없는 시간들. 그 속에서 만나고 흩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마더랜드 Motherland
알렉산더 미할코비치, 하나 바지아카 / 스웨덴, 우크라이나, 노르웨이 / 2023년 / 95분 / 국제경쟁 / 조현나
입대하는 젊은 청년들과 이들을 배웅하는 가족들. 2020년 벨라루스에서 펼쳐진 이 풍경에 균열을 내는 것은 군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 스베틀라나의 외침이다. 그의 아들 사샤는 교육을 목적으로 자행된 고문으로 인해 군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 뒤로 스베틀라나는 같은 이유로 가족을 잃은 이들의 발언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스베틀라나의 외로운 싸움은 입대한 아들이 어머니에게 띄운 편지의 내레이션과 중첩된다. 젊은 남성의 목소리로 낭독된 편지에선 그가 군대 내에서 정신적, 신체적으로 어떻게 붕괴해갔는지 서술돼 있다. 이는 <마더랜드>가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은 군대 내의 폭력을 연상시키고, 극 후반부에선 독재정권에 대한 대중의 반발과 이를 억압하려는 대치 사이의 긴장감과도 이어진다. 이러한 흐름은 결국 전쟁의 잔학성과 결부된다. 입대를 준비하는 한 청년과 정권에 대항하는 청년들의 도처엔 죽음의 그림자가 반복해 드리운다. 징병제 국가로서 한국 또한 이 폭력과 죽음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참혹한 현실 속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시도할 수 있을지 되뇌게 만드는 작품이다.
생각의 극장 Theater of Thought
베르너 헤어초크 / 미국 / 2022년 / 108분 / 베리테 / 이보라 영화평론가
5 더하기 5는 11임이 틀림없다고 주장해보자. 전혀 믿지 않는 것을 강력하게 발화할 때 우리의 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베르너 헤어초크는 인간의 뇌라는 화두에 사로잡혔다. 그는 미국의 유명 대학과 실험실, 병원 등을 방문하며 수많은 연구자를 만나 뇌에 관해 질문한다. 히드라의 느릿한 움직임에서 영생의 단서를 배우듯, 이 과정은 비인간적 존재를 통해 궁극적으로 인간 세계에 적용할 교훈을 찾는, 꽤 진부한 시간이다. 와중에 흥미로운 지점은 어느 학자의 열성적인 설명 뒤로 헤어초크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라며 고백하는 보이스 오버가 흐를 때처럼, 이따금 탈선하는 영화의 딴생각이다. 헤어초크는 종종 생뚱맞은 질문으로 화제를 전환한다. 인간이 동물과 소통할 수 있는지, 자신의 다음 영화를 찍기 전에 미리 볼 수 있는지, 죽은 사람이 텔레파시 기기를 갖고 있으면 천국의 존재를 알려줄 수 있는지. 스스로도 순진하다 자평하는 그의 상상력은 사실 영화라는 상상적 행위와 긴밀하게 맞물린다. 이쯤에서 우리는 왜 제목이 ‘생각의 극장’인지 다시금 곱씹게 된다.
조용한 선박들
정여름 / 한국 / 2023년 / 26분 / 한국경쟁 / 김예솔비 영화평론가
화자는 베트남전쟁의 비무장지대(DMZ)였던 곳을 방문한다. 관광 가이드 민은 DMZ에 얽힌 역사를 해설한다. ‘미국이 베트남을 침략했고, 오랜 격전 끝에 평화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상당한 병력이 동원되었습니다.’ 읊조리는 목소리와 동시에 화면에 나타난 것은 사진들이다. 폭격으로 무너진 성당 터, 녹슨 전쟁 기계들, 여행자의 카메라에 포착된 시간의 사소한 단위들. 이상한 의문 하나가 우리를 감싼다. 기억이 장소로부터 미끄러지고 있다는 사실. 사진은 그 자체로 보이는 것의 총체인 동시에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조용한 선박들>에서 사진 이미지는 정보를 제공하는 텍스트이기보다 지상에 감도는 불길한 오차를 드러내는 수단이다. 공산주의를 수호했던 베트남을 제어하고 있는 힘은 자본주의이며, 지난 전쟁의 상흔을 보존하고 있는 기억은 사실상 기억의 하청이다. 정여름은 사진을 배치하고, 아주 가깝거나 멀리서 들여다보면서 세계와 기억의 불협(들)이 진동하는 시공간을 드러낸다. 올해 DMZ영화제의 한국경쟁 섹션은 장편과 단편 섹션을 통합해 작품을 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