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인터뷰] 혼란의 갈림길에서, ‘최악의 악’ 임세미
2023-09-20
글 : 정재현

<최악의 악> 속 의정의 삶은 고군분투의 연속이다. 대대로 경찰을 배출한 집안의 딸로 자라 경찰이 돼 보안과 경위까지 올랐지만, 1990년대 대한민국의 여성인 의정의 진취성과 독립성을 사회 분위기는 뒷받침해주지 못한다. 친정 식구들의 구박데기인 남편 준모(지창욱)는 지역 발령 근무 중 의정 몰래 서울에 와 마약 조직 내부에 위장 잠입하는데, 조직의 엄혹한 보스 기철(위하준)은 의정의 아련한 기억 속에선 순수한 소년이었다. 맞서 싸워야 할 일이 의정 앞에 거듭 놓이지만 의정은 멈추지 않는다. 이같은 의정의 태도는 배우로서 “끊임없이 부딪히며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임세미와 똑 닮아 있다.

- 의정 역을 맡게 된 결정적 동기가 있나.

= 우선 작품을 연출한 한동욱 감독님의 전작이 <남자가 사랑할 때>여서 무척 반가웠다. 20대 시절 로맨스 장르에 관한 호기심을 마음에 품던 때가 있었는데, 그 작품을 보고 이런 것이 사랑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악의 악>도 고전 멜로 같은 구석이 있다. 액션 장르 특유의 거칠고 날 선 장면이 많지만, 그 속엔 두 남자와 의정의 관계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촘촘하게 짜여 있다. 그 감정의 갈림길에 배우로서 서 있고 싶었다. 막상 갈림길에 서보니 몹시 혼란스러웠지만. (웃음)

- 준모에게 의정은 사랑하는 아내이자 열등감을 부르는 존재다. 배우 입장에선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배역을 연기하기 위해 오히려 캐릭터를 비우는 작업을 선행했을 것 같다.

= 의정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의정에게도 열등감이 있었을 것이다. 의정은 대대손손 경찰을 배출한 집에서 자란 데다 경찰인 남편까지 만났는데, 90년대 대한민국에서 여성 경찰로서 느끼는 열등감이 있지 않았을까. 승진이 더딘 남편과 함께 모든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지만, 희망의 달성이 쉽지 않다는 것 또한 마음 한켠으로 인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의정과 준모의 신혼 생활이 길게 그려지지 않지만, 둘 사이에 공전하는 어색한 기류와 숨길 수밖에 없는 마음이 잘 드러나길 바랐다. 의정과 준모는 마냥 사랑만 할 수 없는 사이다.

- 반면 기철의 눈에 비친 의정은 영원한 첫사랑이다.

= 그래서 의정은 늘 물음표로 가득한 캐릭터였다. 의정이 느끼는 혼란이 좋아 작품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는데 막상 의정을 연기하려니 마음의 갈피를 종잡을 수 없더라. 촬영 초반엔 무척 혼란스러웠지만, 몇 회차 연기하다 보니 의정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혼란이었다. 의정은 혼란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는 캐릭터다. 한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행위와 마음을 시간이 흐른 뒤 돌이켜보면 그때의 확신만큼 부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않나. 그런 마음을 의정은 내내 느꼈을 것이다.

- 1화에 묘사되는 의정의 친정 풍경을 보면 절로 숨이 막힌다. 의정의 성장 환경에 관한 전사도 써보았나.

= 의정의 과거보다 현재 시점의 의정이 끊임없이 마주해야 하는 양면성에 관해 고민했다. 작품 속 의정의 선택을 믿고 연기했다. 순수한 첫사랑이었던 기철이 마약 유통 조직의 보스가 된 모습을 마주했을 때 의정은 기철의 현재를 부정하기보단 달라진 기철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여러 일들이 동시에 닥칠 때 의정이 즉각적으로 느낄 법한 감정이 더 중요했다.

- 실제로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서울의 논현동, 역삼동 일대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작중 배경인 90년대의 강남 풍경이 기억나던가.

= 90년대의 나는 너무 어려서 알고 지낸 주변 언니, 오빠들을 떠올리며 연기했다. 그리고 90년대 서울에 살던 청춘의 사진과 영상도 많이 연구했다. 뿐만 아니라 작품의 주요 설정이 언더커버이기 때문에 이를 소재로 한 당대의 홍콩영화들도 모두 섭렵했다.

- <최악의 악>의 1화 오프닝 시퀀스에선 직접 액션 연기도 소화한다. 등산이나 사이클 같은 운동을 무척 좋아한다고 들었다. 액션 연기를 익히는 데 도움을 주던가.

= 요즘엔 사이클보다는 달리기에 빠져 있는데 확실히 운동으로 다진 기초 체력 때문에 테이크를 거듭해도 지치지 않았다. 사실 내 액션 연기의 빈도는 다른 배우들에 비해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배우들을 응원하러 촬영이 없는 날에도 현장에 자주 놀러갔다. 얼마나 자주 갔는지 어느새 별명이 ‘임 PD’가 되어 있더라. (웃음)

- 올해 방송된 드라마 <방과 후 전쟁활동>의 박은영 선생에 이어 성숙하고 든든한 성인 여성을 연이어 맡게 됐다. 임세미가 생각하는 성숙함과 강인함의 정의가 궁금하다.

= 내가 생각하는 성숙함과 강인함은 성실함에서 온다. 처음 이 일을 꿈꾸었을 때의 마음을 근면하게 유지하는 일이 나에겐 끝없는 원동력을 준다. 다소 유행이 지난 말이지만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란 말이 있지 않나. 그 말처럼 어디든 안주하지 않으려 한다. 삶도 연기도 잘 모르는 것투성이지만 끊임없이 부딪히며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 최근 인스타그램에 황윤 감독의 <수라>를 인상 깊게 보았다는 게시물을 올렸다. SNS와 유튜브 개인 채널을 통해 채식, 해양 환경 보호 등 친환경적 삶을 적극적으로 보이고 있다.

= <수라>는 내가 본 올해 최고의 다큐멘터리다. 포스팅을 통해 해양오염의 현실을 모르는 분들에게 이런 삶의 방식을 택해 살고 있는 배우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호아킨 피닉스가 시상식 연단에 설 때 늘 환경과 동물권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관련 다큐멘터리도 많이 제작하지 않나. 피닉스처럼 나도 더 용기를 내려고 한다. 배우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사랑하고 공감하며 느낄 때, 작품 속에서 캐릭터로서 살아갈 수 있고 이런 마음은 관객이나 시청자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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