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잡한 세상에서 평범한 남녀의 사랑을 이야기한 <도시남녀의 사랑법>, 어리숙한 편의점 점장의 로맨스를 그린 <편의점 샛별이>, 호스피스 병원의 생과 죽음을 다룬 <당신이 소원을 말하면> 등 배우 지창욱이 최근 3년 동안 걸어온 길은 로맨틱 코미디와 휴먼 드라마로 가득하다. 거친 말투와 빠르게 전개되는 고난도 액션, 아슬아슬한 눈치 싸움 등 <최악의 악>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눈에 띄는 건 새로운 모습의 지창욱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메마른 땅에서 자란 고혹적인 꽃처럼 박준모는 꼿꼿하고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다만 땅 아래에서 물줄기를 찾아 조용히 자리를 뻗는 뿌리만큼 그는 생존 욕망과 인정 욕구도 강하다. 인간은 어디까지 변할 수 있는가.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따라 박준모로 변한 지창욱을 만났다.
- <최악의 악>은 최근 3년 동안 참여한 작품들과 색깔이 많이 다르다.
= 누아르는 처음이다. 항상 범죄 스릴러물이 궁금했는데, 그만큼 걱정도 됐다. 과연 내가 암흑가의 인물이 품은 깊은 감정을 드러낼 수 있을지 스스로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같은 장르에 이미 너무 유명한 대표작이 많기도 하고. 부담과 걱정이 앞섰지만 이상하게도 하고 싶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최악의 악>만이 가진 고유한 색깔이 분명해서 그걸 잘 살려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또 배우로서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맡아보지 못한 역할을 통해 나를 확장하고 싶다는 욕심이 컸다.
- <최악의 악>은 마약 거래범을 소탕하기 위해 경찰이 잠입 수사를 감행한다는 내용을 다룬다. 극적인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서로 속고 속이는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려내는 게 중요했을 것 같다.
= 준모가 마약 범죄 집단에 잠입해 우두머리인 기철(위하준)과 속고 속이는 기싸움을 계속 이어나가야 작품의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다. 전체적인 균형이 팽팽하게 맞아떨어져야 했다. 그런 데 초반에는 준모의 불안을 얼마만큼 드러내야 하는지 감이 잘 안 잡혔다. 준모의 두려움을 너무 감추면 긴장감이 떨어지고, 너무 많이 보여주면 거짓말처럼 보일 것 같았다. 종이 한장만큼의 미묘한 선을 지키는 게 정말 어려웠다. 그러다 한동욱 감독님과 전체적인 흐름을 상의한 끝에 굳이 준모가 긴장한 모습을 표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준모의 성격상 오히려 그런 감정을 감추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최악의 악>을 하면서 나무보다 숲을 보는 연출자의 시선에 많이 의지했다.
- 준모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본능적으로 잡아내는 인물이다. 시나리오를 읽으며 준모를 어떻게 분석했나.
= 준모가 경찰이기 때문에 정의롭고 특별한 사명감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배제하고자 했다. 준모가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마약 수사에 뛰어든 이유를 생각해보면 피상적으로는 두 계급 특진이라는 보상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게 정말 목숨을 내놓을 정도의 보상일까. 준모는 입체적이다. 의심과 욕망, 이기심과 질투, 집착 등을 보이기 때문에 어떻게 반응할지 예측하기 어렵고 그만큼 다양한 인간 군상을 품고 있다. 다소 모순적이고 양면적이기도 하다. 준모를 통해 인간이 어디까지 변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 준모가 기철의 사무실에 찾아가 죽은 태호(정재광)의 이야기를 꺼내며 싸우는 장면은 둘의 갈등이 앞으로 더 깊어질 거라는 미래를 암시한다. 이때 기철의 부하들과 싸우면서 동시에 감정적 폭발을 드러내야 했는데 쉽지 않아 보였다.
= 극심한 감기에 걸려서 정말 힘들었던 날이다. (웃음) 코감기에 걸려 목소리까지 맹맹하게 나와 쉽지 않았다. 이 장면은 준모가 기철에게 다른 사람인 척 굴면서도 자신의 분노를 표현해야 하는 중요한 장면이다. 그래서 촬영 내내 긴장한 채로 있었다. 한정된 시간 안에 감정과 액션, 두 요소를 모두 챙겨야 한다는 생각에 압박감이 들기도 했지만 많은 스탭과 배우들의 도움으로 다행히 잘 마칠 수 있었다. 특히 태호의 죽음을 두고 기철을 도발해야 했기 때문에 분노를 절제하는 듯한 기술이 필요했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에서 준모의 싸움이 처절해 보이길 바랐다. 깨지고 비틀리고 넘어지지만 그는 계속 일어나 싸운다. 그를 멋진 액션영화의 주인공이 아닌, 아득바득 발악하는 모습으로 그려낸 이유이기도 하다. 몸으로 감정을 표현한다고 생각하며 임했다.
- <최악의 악> 촬영을 회상하며 걱정, 긴장, 불안 같은 단어를 많이 언급했다.
= 작품에 임할 때마다 그런 것 같다. 이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무뎌지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나 감정이 들면 그냥 그대로 흘러가게 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건강한 취미를 갖거나 생각을 전환할 다른 활동을 이것저것 하려고 한다. 가장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는 건 역시 동료들이다. 현장에서 동료 배우, 스탭을 만나면 금세 안정된다.
- 비언어적인 동작들도 이전 작품들보다 더 거칠고 투박하게 그려졌다. 제스처 하나에도 준모의 성향을 담으려 한 듯하다.
= 말투와 눈빛, 손동작 같은 걸 더 툭툭 내뱉으려 했다. 사실 이런 행동들은 책상 위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대본을 숙지한 상태로 현장에서 움직여보고 대사를 곱씹다보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다른 배우들과 맞춰보는 과정에서 더 자연스레 변형되기도 한다.
- 준모, 기철, 의정(임세미) 세 인물이 맺은 각기 다른 관계는 이야기 전개에 극적인 영향을 준다. 시청자가 이를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까.
= 관객들이 세 인물의 구도를 두고 자기만의 해석을 만들어보면 좋겠다. 작품에서 각 인물의 심리적 변화가 잘 드러나는 만큼 해석의 여지도 많다. 누아르영화이지만 감성적이고 디테일한 연출이 많아서 나만의 발견을 하는 재미가 클 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