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
어릴 때부터 변희봉 선생님의 팬이었다. 변희봉 선생님은 당시 사극과 현대물을 가리지 않고 많은 드라마에서 독특한 개성이 넘치는 조연으로 나왔다. 가족이 모두 좋아하는 배우였다. <수사반장>에서 사이비 종교 교주, 이른바 ‘할렐루야 교주’로 나왔을 때나 점쟁이로 나온 일일 사극 <안국동 아씨> 등, <조선왕조 오백년–설중매> 편에서 유자광으로 나오면서 유명해지시기 훨씬 이전부터 나는 변희봉 선생님의 광팬이었다.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 시나리오를 쓸 때 반년 넘게 잘 풀리지 않아 고전을 거듭했다. 처음 시나리오에서는 변희봉 선생님이 연기한 경비 아저씨 캐릭터 자체가 없었다. 그러다 지하실 공간과 경비원 캐릭터가 만들어지면서 이야기가 급속도로 구조를 찾게 되고, 어릴 적부터 내가 너무 좋아하던 변희봉 선생님을 아파트 경비원으로 모시면 어떨까 하는 발상을 하면서 시나리오가 풀리게 된 것이다. 변희봉 선생님, 경비원 캐릭터 덕분에 <플란다스의 개> 시나리오가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경비원 캐릭터에 한정해놓고 보면 이는 변희봉 선생님을 놓고 쓴 캐릭터가 맞다. 그리고 1999년 봄 마포에 있는 한 호텔 커피숍에서 생애 최초로 선생님을 뵙게 됐다. 제작사를 통해 받은 시나리오를 먼저 읽은 변 선생님은 시나리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웃음) “아파트 지하실에서 보신탕을 먹는다는 게 영화 감이 되느냐?”고 하시고, 영화는 나름 스케일이 있어야 하는데 아파트 단지만 왔다 갔다 하고 본인의 캐릭터는 지하실에서 이상한 짓을 하고 있으니 모처럼 온 영화 시나리오에 실망하셨던 것 같다. 당시 변희봉 선생님은 1986년 이두용 감독의 <내시> 이후에 13년간 영화 출연을 안 하던 상태였다. 소위 말하는 충무로와 무척 멀어져 있었다. 그런데 애송이 신인감독이 보낸 시나리오와 캐릭터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거다. 어떻게 변 선생님을 설득해야 할 것인가 무척 막막했던 기억이 난다. 절박한 마음에 궁극의 팬심의 스위치를 눌러서 다른 사람들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변희봉 선생님의 아주 옛날 드라마 속 장면들을 줄줄이 나열하고 묘사했다. 심지어 직접 선생님의 대사를 흉내내며 발버둥쳤는데 그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나 보다. 자식 나이 또래의 어떤 신인감독이 수십년 전 TV드라마 속 장면을 재연하니 당황스럽기도 기분이 좋기도 했나 보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플란다스의 개>를 함께하게 됐다.
이후 변희봉 선생님은 <화산고> <선생 김봉두><더 게임> 등 여러 작품에 연이어 출연하며 스크린을 종횡무진했다. 단지 이런저런 우여곡절로 영화계와 멀어졌을 뿐 원래 그렇게 하셨어야 하는 분이었다. 조명과 카메라앵글에 따라 무척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는, 개성 있고 입체적인 시네마틱한 마스크를 처음부터 갖고 계셨다. 자유자재의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는 표현력도 뛰어났다. MBC 공채 성우 출신답게 목소리 톤도 멋지고 대사 전달력이나 에너지도 대단하셨다. 악기로 치면 모든 음역대를 커버하는 풍성한 음색을 가진, 중저음부터 고음역대를 아우르며 극장 사운드 시스템을 뒤흔들 수 있는 목소리를 갖고 계셨다. 애초부터 무척 시네마틱한 배우였는데 그것이 뒤늦게 스크린에서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현장에서 변희봉 선생님은 무척 열정적이고 사실성을 위한 디테일을 늘 고민하셨던 분이다. 2016년 <옥자>를 촬영할 때 산골 노인으로 나오셨다. 2010년대 이후 변 선생님은 국회의원, 대학교수, 병원 원장 등 중후한 사회 지도층 연기를 많이 하셨다. 오랜만에 한골에 처박혀 사는 노인 캐릭터를 맡으면서 리얼한 표현을 위해 많은 고민을 하셨다. <옥자>에서 변 선생님 클로즈업 신을 자세히 보면 한쪽 눈이 약간 뿌옇게 나오는데, 백내장 치료가 잘 되지 않은 노인 느낌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렌즈를 낀 것이다. 변 선생님이 첫 등장에서 잔 나뭇가지들이 수북한 지게를 지고 산비탈을 올라올 때 얼굴보다 지게가 먼저 보인다. 스토리보드를 만들 때 그 장면을 떠올린 것도 변 선생님이 “산골 노인이라면 자기 몸뚱아리보다 훨씬 큰 장작을 거뜬히 지고 왔다 갔다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했던 말에서 착안한 것이다. 캐릭터의 뉘앙스와 리얼리티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셨으며 언제나 연출자와 치열하게 의논을 하셨다.
변희봉 선생님과 4편의 영화를 함께했다. <괴물><옥자> 두편은 부모로서의 이미지, 다른 두편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에서는 구수하고 비굴하면서도 현실적인 기성세대의 모습으로 등장하셨다. 따뜻한 아버지의 모습과 구질구질한 기성세대의 모습을 모두 리얼하게 잘 보여주셨다. 처음부터 변희봉 선생님을 전제로 해서 시나리오 속 캐릭터를 쓰고 묘사했고, 돌이켜보면 모든 역할이 대체 불가능했다. 변희봉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던 인물들이다. 작품 외적으로도 내겐 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덕후의 관점에서 보면 변 선생님과의 만남은 곧 영화적인 꿈을 이룬 것이다.
어제가 변희봉 선생님 발인이었다. 서울 시내에 있는 한 사찰에 모셔졌다. 조만간 한번 찾아뵈려고 한다.
류승완 감독
<플란다스의 개>와 <살인의 추억>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시점에서 <주먹이 운다>를 같이 작업했다. 마치 신인 같은 열정으로 가득하셨던 기억이 난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셨고 최고의 연기를 남기길 원하셨다. 끊임없이 자신의 연기가 괜찮았냐고 물어보시는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우리에게 빛나는 연기를 남겨주셔서 감사드린다. 영화가 존재하는 한 변희봉 선생님의 연기는 계속 기억될 것이다.
우민호 감독
‘열심: 어떤 일에 온 정성을 다하여 골똘하게 힘씀. 또는 그런 마음.’ 영화에 ‘열심’으로 임하지 않는 배우는 없겠지만 촬영 현장에서 변희봉 선생을 보고 있노라면 유독 그 단어의 의미가 가슴에 파고들곤 했다. 지금의 위상을 지닌 연기자로 자리 잡기까지 꽤 오랜 세월 부침을 겪었다던 그는 노령에도 늘 영화배우로 사는 것 자체에 대한 행복과 희열이 충만했고, 그래서 내겐 참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은 분이다. 어찌 매 순간 저렇게까지 영화에 진심일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다. 천진함, 심술궂음, 유머러스함, 선량함, 괴팍함 등 수많은 표정이 하나의 얼굴에 실려 자아내는 변희봉 선생만의 독특한 카리스마는 어떤 영화에서도 꼭 한번은 빛나는 순간을 만들어내고야 만다. 때문에 많은 감독들이 매료되었고,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영화 <간첩>에서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老)간첩 ‘윤고문’으로 분했는데, 짠내와 허세와 온기가 적절히 배합된 변희봉표 페이소스는 아마 내 영화에서는 다시 나오지 않을 캐릭터일 것이다. 특히 투닥거리는 강 대리(염정아)와 우 대리(정겨운)를 보고 씩 웃으며 읊조리던 그의 한마디, “했네, 했어”는 내 영원한 웃음 버튼이다.
이병훈 PD
배우 변희봉과는 1970년대 초부터 드라마를 같이해왔다. 나는 드라마 조연출이었고, 배우 본인은 무명 시절이었다. 80년대 들어 내가 연출한 <암행어사> <수사반장> 및 연속극을 거쳐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를 하면서 여러 작품을 함께했다. 특히 1984년 <조선왕조 오백년–설중매> 때 희대의 인물 유자광 역을 맡아 능력을 발휘해 대성공을 거두며 각광받기 시작했다. 1999년 <허준>에서는 주인공 허준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나타나 수호천사가 돼준 성인철 대감 역을 맡아 큰 인기를 모았다.
변희봉은 지나칠 정도로 열정적인 연기자였다. 첫 연습부터 감정을 최고로 이입해서 표현하는 바람에 2~3회 연습이 끝나면 기진맥진했고, 연습 때 제발 설렁설렁 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물론 가장 리얼하게 연기한 순간은 본 촬영 때였다. 이름이 알려지기 전 무명 시절에도 그의 표정 연기가 하도 강렬해서 시청자들은 “드라마에서 눈알 쏟아지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1999년 <허준>을 제작할 때는 이미 배우가 나이를 꽤 먹었을 때라 그전보다는 많이 절제하는 모습을 보였던 걸로 기억한다. 또 젊은 나이에 노역을 도맡아 했던 배우다. 최불암이 30대 중반에 노역을 했다면, 변희봉은 30대 초반에 할아버지 역을 맡았다.
변희봉은 연기의 스펙트럼이 넓어 다양한 성격, 다양한 직업, 다양한 신분과 연령의 인물을 무리 없이 완벽하게 소화한 훌륭한 배우였다. 그동안 재벌 회장이나 근엄한 아버지부터 지게꾼, 거지, 양아치, 사기꾼, 깡패, 범인, 사극에서의 정승, 판서, 청백리부터 간신, 거지, 사당패 등 온갖 신분과 성격의 인물을 자유자재로 표현해내는 스펙트럼을 보여줬다. 홈드라마, 멜로물, 수사물 등 장르도 다양했다. 전체적으로 지체 높은 역할도 잘 어울렸지만, 오히려 인생에 실패한, 망가진 인물이나 막장인물 묘사 때 더 능력이 돋보였던 연기자다.
정지인 PD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사진 속 선생님은 너무나도 유쾌하고 행복해 보였다. 드라마 촬영 때 소품으로 썼던 영정 사진이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였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 사진은 변희봉이 아니라 판식이었으니까. 사모님께서 두손을 잡고 <2014 드라마 페스티벌-내 인생의 혹> 대본을 같이 읽으셨던 얘기를 해주셨다. 처음으로 선생님이 돌아가신 게 실감이 났다. 집에 돌아와 <내 인생의 혹>을 간만에 보았다. 내가 찍은 모든 컷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선생님은 달랐다. 의욕만 많고 서투르기 짝이 없던 풋내기 감독의 부족한 부분을 아낌없이 채워주고 계셨다. “정 감독, 이걸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현장에서 늘 하시던 말투가 생생하게 기억났다. 술 취해 들어와 세숫대야를 걷어차던 것도, 바지를 다 못 벗고 쓰러져 자던 판식의 모습도 모두 선생님의 아이디어였다. 주인집 사정 때문에 더 길게 촬영할 수 없어 급하게 마무리했던 그날이 새삼 아쉬워졌다. 세숫대야 걷어차던 타이트숏을 찍었어야 했는데. 선생님이 이 얘길 들었으면 100% 역정을 내셨을 것 같다. 진작에 찍지 왜 그랬냐고. 그러곤 얼른 찍자고 바로 준비를 하셨을 테다. 현장에서 선생님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최고의 주인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