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 Eureka
리산드로 알론조/프랑스, 아르헨티나, 독일, 포르투갈, 멕시코/2023년/146분/아이콘 김소희 영화평론가
<유레카>는 막이나 소제목으로 구획되지 않았으나, 뚜렷이 감지되는 분기점을 지닌 영화다. 첫 번째 이야기는 흑백의 시대극이다. 비고 모텐슨이 연기한 남자가 새로운 마을에 당도한다. 딸을 찾기 위해 마을로 들어온 남자는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총을 사용해야만 한다. 두 번째 이야기는 눈이 내리는 쓸쓸한 겨울 풍경 속 경찰의 이야기다. 그에게는 사건 현장에 출동하라는 무전이 끊이지 않는데, 그의 눈앞에도 해결해야 할 다른 사건이 산적해 있다. 세번째 이야기에서 소녀는 주술사 할아버지가 준 차를 마시고 커다란 새가 된다. 네 번째 이야기에서 질투로 살인을 저질러 도망자가 된 남자의 여정을 따라간다. 네개의 이야기는 느슨하게 만나고 이어진다. 이야기를 관통하는 지점은 각각의 세계 속 사람들이 꿈을 꾸는 것처럼 잠에 취해 있다는 사실이다. 취한 상태는 정신적인 해이를 은유하지만, 가장 영화에 가까운 상태이기도 하다. 영화의 제목은 발견의 기쁨보다는 잠과 깨어남 사이의 영원한 망설임을 의미할는지도 모른다.
<뮤직> Music
앙겔라 샤넬렉/독일, 프랑스, 세르비아/2023년/108분/아이콘 김소희 영화평론가
안개가 자욱하게 낀 산의 스산한 풍경 위에 천둥이 친다. 뒤이어 피투성이 여자를 안고 쓰러지는 한 남자의 절규가 메아리친다. 얼마 뒤 구급대원이 도착해 남자를 깨우고 발에 상처를 입은 갓난아기를 구조한다. 시간이 흐르고 난폭하게 정차하는 자동차 소음과 함께 발에 상처를 가진 젊은 남자가 친구들과 함께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도착한다. <뮤직>은 대단히 과묵한 영화다. 영화의 첫 대사는 10분여가 지난 다음에야 겨우 한마디 내뱉어진다. 카메라는 사건이 일어난 찰나를 비추는 대신, 스틸 이미지처럼 정지한 사람들이 침묵한 가운데 무언가를 응시하는 얼굴을 담는다. 사건의 경과는 생략되기 일쑤이기에, 숏의 사이를 메우는 데는 약간의 시차 적응이 필요하다. 시골에서 도시로 이야기의 배경이 이동할 때는 시대가 이동한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온다. 주인공이 신화에서 걸어 나온 인물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끝내 삶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노래와 함께 영화는 현실의 시공간에서 다른 시간대를 기입하는 방법을 찾는다.
<지난 여름>
최승우/한국/2023/76분/한국영화의 오늘-비전 김소희 영화평론가
사건 없이도 영화는 성립할 수 있을까. 강원도 홍천의 한 시골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농부들이 논에 모를 심는 장면에서 출발해, 모가 자라 초록의 논이 되고, 곡식이 익어가면서 노랗게 변한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농사를 짓는 데는 농부의 손길뿐만 아니라 자연의 도움이 필요하기에 자연은 믿고 따라야 할 종교와도 같다. 자연 속에 놓인 인간의 삶은 특권을 지니지 않는다. 영화는 사람의 죽음을 지나칠 정도로 덤덤하게 묘사하며 이 사실을 보여준다. 웬만하면 거리를 둔 채 땅 위에 단단하게 붙박여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 역시 자연의 일부로 사람과 사물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려 애를 쓴다.
이를테면 카메라가 수직으로 뻗은 길과 그 길을 걸어오는 사람을 롱테이크로 보여줄 때, ‘감독이 찍으려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피어오른다. 사람일까, 길일까, 아니면 길가에 놓인 나무일까. 그러다 곧 말풍선을 지운다. 어쩌면 무언가를 보아야 한다는 강박에서마저 해독되는 순간을 카메라는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리굴다리>
구파수 륜호이/한국 /2023년/67분/한국영화의 오늘-비전 김철홍 영화평론가
<소리굴다리>는 어쩌면 정말로 영화가 아닐지도 모른다. 영화는 오프닝에서 자막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것은 AI 의 이미지 인식 프로세스를 시각화한 것이라고. 사연은 이렇다. 2046년, 스스로를 ‘구원’이라 칭하는 고도 발달된 AI가 곧 있을 인류 파국의 날을 예견한다. 구원은 그 ‘디데이’를 막기 위해 과거에 메시지를 보내고, 전갈을 받은 소수의 인간이 구원의 지령을 수행하기 위해 각자의 악기를 들고 길을 나선다. 인간들은 구원이 신호를 인식할 수 있도록 특정 소리를 최대한 공명시키려 하고, 그래서 그들이 도착한 곳이 바로 ‘소리굴다리’다. 마치 뚜렷한 서사가 있는 듯 소개했지만, 이 영화는 사실상 신과 신의 관계가 무의미한 임의의 이미지 데이터 덩어리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거기에 장르를 규정하기 어려운 밴드 아나킨 프로젝트의 음악이 고막을 울린다. 영화제에서 새로운 문법의 영화를 찾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자.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말하지 않는 것들> What They Don’t Talk About When They Talk About Love
몰리 수리야/인도네시아/2012년/104분/ 인도네시아 영화의 르네상스 김철홍 영화평론가
시각 장애 청소년을 위한 특수학교에 다니고 있는 세명의 절친 디아나, 피트리, 마야의 최대 관심사는 사랑이다. 일과 시간에 각자의 꿈과 이상형에 관한 판타지를 신나게 늘어놓던 그들은, 저녁엔 방에 모여 함께 오디오 멜로드라 마를 청취하며 시간을 보낸다. 비록 눈이 보이지는 않지만 가슴속에 사랑에 관한 자신만의 선명한 이미지를 품고 있는 그들은, 그렇게 눈앞의 사랑을 향해 각자의 방식으로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이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농인 에도가 있다.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말하지 않는 것들>은 2021년 부산영화제가 선정한 아시아 여성감독 베스트10(원더우먼스 무비) 중 8위로 선정된 <살인자 말리나의 4막극>의 감독 몰리 수리아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영화가 그리는 어린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는 모든 게 보이는 관객의 입장에선 다소 위험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감독의 섬세하고 감각적인 연출이, 끝끝내 이 위험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 키고야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