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S가 50주년을 맞아 개최한 기획 공모전에서 <지구 위 블랙박스>가 1등을 해 제작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고 들었다.
구민정 출발은 공모전을 위한 기획이 아니었다. 전작 <오늘부터 무해하게>를 연출하며 환경에 관한 프로그램을 한번 더 만들고 싶었고, 기후 변화라는 현재 가장 중요한 의제를 다루고 싶었다. 여기에 음악을 활용한다면 시청자들의 마음이 쉽게 동할 것 같았다. 환경 이슈와 음악 퍼포먼스가 결합한 예능성 기획은 없던 터라 내부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듯하다.
- 음악인들이 전 지구적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연합한 경우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해외에선 <We Are the World>나 밴드 에이드의 <Do They Know It’s Christmas?> 같은 프로젝트가 있었고 국내에서도 <내일은 늦으리> 콘서트나 <하나되어> 같은 사례가 있었다. 기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음악을 활용한 이유가 있나.
구민정 쉬워야 했다. 더이상 환경오염이란 용어보다는 기후 위기, 기후 변화라는 직관적인 표현이 더 와닿는 시점에 시청자가 환경 문제를 머리로 이해하기보다는 가슴으로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길 바랐다. 촬영지와 가장 어울리는 노래를 할 수 있는 아티스트를 섭외하는 데 주력했다. 기획 회의 당시 로케이션을 큰 화면에 띄우고 희망 아티스트의 노래를 전부 들었다. 산불로 인해 황폐하고 메마른 스페인 땅을 보자마자 이곳에서 김윤아 선배님이 음악으로 사람들을 위로해줬으면 했다. 미팅 첫날 섭외에 응해주셨다.
김윤아 당시 거의 아이돌을 방붙케 하는 스케줄을 소화 중이었다. 데뷔 25주년 연말 콘서트 연습과 영화 <자우림, 더 원더랜드> 후반작업 그리고 여러 연말 가요 축제가 겹쳐 스케줄이 빼곡하던 때라 해외 출장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뜻을 같이할 수 있는 TV프로그램을 만난 것이다. 언제나 환경 위기에 관한 이야길 하고 싶었는데 마침 PD님이 대규모로 판을 깔아주셨다.
- 기후 위기로 인한 피해가 극심한 곳에서 가수들이 노래하는 컨셉은, 루도비코 에이나우디가 그린피스와 협업해 무너지는 빙하를 배경으로 북극에서 피아노를 연주한 <Elegy for the Arctic> 영상을 연상시킨다.
구민정 그 영상을 본 후 잔상이 계속돼 <인셉션>처럼 뇌리에 박혔다. 주변 분들에게 우리 프로그램을 설명할 때도 에이나우디의 영상을 예로 들면 모두가 알아차렸다.
김윤아 나 또한 그 영상을 몇년 전에 보고 이거야말로 아티스트가 메시지를 전하는 가장 우아한 방법이란 생각을 했다. 그래서 <지구 위 블랙박스>에 참여한 것도 있다. 내가 동의하는 방식으로 이 프로젝트에 감히 낄 수 있다면 정말 기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먼 나라 이야기 아닌 우리 코앞에 닥친 이슈
- 처음부터 해외 로케이션 촬영을 염두에 두었나.
구민정 처음엔 국내 로케이션만 지정해두었다. 지금의 기후 위기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닌 우리 코앞에 닥친 이슈라는 걸 말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다양한 기후 위기의 양상을 보이기 위해선 해외에서 찍은 화면도 필요했다. 윤아 선배님과 함께 간 스페인 촬영이 가장 힘들었다. 처음 찍기로 한 곳이 가뭄으로 인해 저수지가 말라 갈라진 땅이 드러난 ‘고스트 빌리지’였다. 그런데 답사날 폭우가 쏟아져 말라 있던 땅이 다시 저수지가 됐다.
- 로케이션 헌팅부터 기후 위기를 체감했겠다.
구민정 단 한 회차도 기후 변화에 영향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1화의 남극도 들어가는 데 무려 9일이 걸렸다. 비행기만 나흘을 타고 칠레의 땅끝 마을에 갔는데, 남극도 하루에 기상 환경이 10번은 족히 바뀌기 때문에 전세기가 안 떴다. 철수하고 북극으로 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에 겨우 남극으로 들어가게 됐다. 전세기가 러시아 기지에 착륙하면, 그곳에서 고무보트를 타고 들어가야 비로소 남극이다. 그런데 정말 미친 파도를 만났다. (최)정훈씨를 포함해 너나 할 것 없이 짐을 이고 지고 배를 타며 이러다 죽는 것 아닌가 했다.
- 김윤아씨는 데뷔 이래 줄곧 환경에 관한 노래를 만들어왔다. 자우림의 노래로 예를 들면 <격주 코믹스>는 오존층 파괴 문제를, <Blue Marble>은 지구의 안녕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EV1>은 2003년 GM사의 전기차 전량 폐차 사건을 소재로 한 노래다. 솔로곡 <Cat Song>도 보호받지 못하는 동물권에 관한 노래다. 그중 <Going Home>을 골랐는데.
김윤아 환경과 여성과 아동. 언제나 내 음악의 시선이 가닿는 소재들이다. <Going Home>은 고스트 빌리지와 특히 어울리는 곡이었다. 저수율이 25%도 채 안되는 저수지 해자 위에서 노래하니 이 노래가 비단 인간에게만 불릴 노래가 아니었다.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있는데 그 절경이 파괴되는 현장까지 목도하니 슬펐다. 촬영지 주변에 포도 농가가 많았다. 농사는 기후가 받쳐주지 못하면 수확이 불가능한 일이지 않나. 지금과 같은 기후 위기가 지속된다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터전은 어떻게 될까 근심도 되었다.
- <세상의 끝>을 선곡한 것이 의외였다.
김윤아 <검은 강> 등의 후보도 있었다. <세상의 끝>은 산불 재해 지역에서 모니카, 립제이 두 댄서와 퍼포밍을 할 때 더없이 어울리는 곡이다. 그 곡을 쓸 당시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단 두 사람만 남은 상황을 가정하며 만들었다. 세계가 끝났다는 곡의 전제가 프로그램의 취지와 맞다고 생각했다. 또 극단적으로 높고 낮은 에너지를 오가는 곡이라 퍼포먼스와 결합하기도 수월했다.
구민정 야산 돌계단 위에서 선배님이 꼿꼿이 서서 그 노래를 12시간 완창하셨다.
김윤아 녹음해둔 버전이 있으니 립싱크를 해도 되지만, 입만 뻥긋하면 감정 전달이 잘 되지 않는다. 프로그램에 도움만 된다면 노래를 12시간쯤 부르는 건 일도 아니다.
- 모니카, 립제이와는 어떻게 합을 맞춰나갔나. 산불 현장에 꼿꼿이 서서 노래 부르는 김윤아씨는 나무를 형상화한 것인가.
김윤아 나는 지구다. (웃음) 모니카씨가 확고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고 모두가 그 방향에 적극 동의했다. 두 댄서의 퍼포먼스가 확실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면 내 음악은 배경으로 깔려도 아무래도 좋았다. 깨끗하고 순수한 자연을 인간이 좋다고 마음대로 향유하며 뜯어먹다 모든 것이 고장나버리는 파국을 표현했다.
- 흰옷에서 검붉은 옷으로 변하며 두 댄서에 의해 거듭 찢기던 옷은 제작한 것인가.
김윤아 여러 옷을 겹쳐 입었다. 12시간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 옷에 있다. 뜯긴 상태로 어디 앉기라도 하는 순간 앞 시퀀스와 연결이 되지 않아 마냥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노래 끝에 지구인 내가 무너져야 하는 동작이 있었다. 모니카씨가 “언니 이렇게 해주세요” 하고 쉽다는 듯이 동작의 시범을 보이는데… 모니카에겐 쉽겠지만 나에겐 너무 어려운 동작이었다!
구민정 모니카씨가 의상 전공이라 그런지 의상에 관한 아이디어도 정말 많이 제시했다. 제작진과 출연진이 모두 소속된 단체 채팅방이 있는데 매일 상당한 양의 제안을 올렸다. <세상의 끝>을 촬영한 스페인 갈리시아의 사모스 지역은 반경 20km가 화재로 폐허가 된 곳이었다. 지평선 끝까지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생명도 말살된 그야말로 세상의 끝이었다.
- 스탭 크레딧에 소설가 천선란의 이름이 올라 있다.
김윤아 천선란 작가가 대본을 쓰신다길래 출연에 응한 것도 있다.
구민정 음악으로 시청자의 감정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것 이외에 기후 위기의 실상을 객관적 지표를 통해 설명하는 텍스트가 필요했다. 내레이션 이상으로 정제된 언어로 서술하는 대사가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소설가를 물색하던 중 천선란 작가가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천선란 작가가 처음으로 드라마 파트에 관한 아이디어를 주셨다. 드라마의 세계관에서 거주가 불가능해진 지구를 바라볼 때 안타까움이 배가 되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사실 드라마의 첫 초고는 캐릭터간의 갈등과 반목이 있는 내러티브였다. 그런데 음악 영상이 붙는 와중에 복잡한 드라마까지 더해지니 작품의 핵심이 살지 않았다. 우리의 목적은 기후 위기를 목격하고 이를 전달하는 데 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한명의 관찰자가 블랙박스 센터 안에서 뮤지션의 영상을 꺼내 보는 방식의 이야기가 탄생했다. 천선란 작가와 20고는 족히 넘게 드라마 대본을 수정했을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행동으로 보인대도
- 몇년 전 김윤아씨는 MC로 활약한 <월간 커넥트2>에서 해수면 상승으로 수몰 위기에 처한 팔라우의 수랑겔 휩스 주니어 대통령과 대담하기도 했다.
김윤아 <월간 커넥트>팀과 함께 일하며 항상 감독님에게 환경 테마는 언제 다루냐고 묻곤 했다. 대학생 시절 환경과 인간이라는 강좌를 수강했다. 세상에 벌어지고 있는 일을 알게 된 이후부터 후퇴할 수 없었다. 한번 알게 된 이상 비겁하게 내뺄 수 없었다. 심지어 내가 대학생이던 때와 지금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기가 닥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지난해 나사 소속 과학자 반란(Scientists Rebellion) 운동가 피터 칼머스가 “나는 매일의 삶이 <돈 룩 업>이다. 이대로 가면 모든 걸 잃을 것”이라며 오열하는 시위 영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한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환경에 해를 끼치는지 학부에서 배운 내용은 지금 적용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구민정 환경 콘텐츠를 하나 추천하면 <노 임팩트 맨>이라는 책과 다큐멘터리가 있다. 생존한 이상 탄소를 배출할 수밖에 없는 인류를 경각하기 위해 배출하지 않는 삶을 선택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쓰레기를 최소화하는 삶에 관해 고민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 구민정 PD는 전작을 만들 당시 식판을 들고 다니는 등 친환경적 촬영 현장을 조성하려 애를 쓴 것으로 안다. 김윤아씨 또한 올해 <씨네21>과 만났을 때 지속 가능한 형태의 음반 제작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친환경적인 삶의 방식을 습관화하기 위해 의식하는 부분이 있는지 궁금하다.
구민정 사실 방송산업 자체가 탄소 배출의 연속이다. 방송을 위해선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비행기가 남기는 탄소 발자국도 어마어마하지 않나. 불가피하게 오염되는 지구의 문제를 상쇄할 만큼 가치가 있는 영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우선 스탭을 최소화해 촬영을 다녔다.
김윤아 나 또한 스탭을 최소화해서 움직이는 것이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사람의 도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키 스탭으로 매니저 한명만 동행했다. 인간은 살아 있는 한 지구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나. 내가 이만큼 탄소 발자국을 남기는 만큼 정말 열심히 찍고 돌아와야 한다며 의지를 다졌다. 지구를 고려하는 삶의 방식은 이미 생활의 일부로 체화됐다. 언제나 다회용 용기에 물을 담아다니고, 음식물 쓰레기 국물도 하수도에 버리지 않는다. 가정 내에서도 일회용 비닐을 대체할 수 있는 생분해 제품을 사용한다. 최근엔 개인 차량도 탄소 배출을 최소화하는 자동차로 바꿨고, 집 내부 전등도 고효율 조명으로 교체했다.
- 환경 파괴가 코로나19의 주요 원인으로 거론되며 팬데믹 이후 많은 산업 분야에서도 ESG 경영 등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노력을 보이고 있다.
구민정 최근 KBS 방송의 시청자 반응을 살피면 “왜 이렇게 플라스틱 물병 사용을 자주 노출하냐”와 같은 피드백이 들어온다. 그래서 방송국 내부에서도 이같은 부분을 자제하자는 움직임이 눈에 띈다. 해외 방송의 경우 제작 시 탄소 배출을 최소화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이 명확하다. 방송 촬영에 투입된 인력과 전력 등을 산술값으로 변환해 친환경 지수를 측정할 수 있는 공식도 마련돼 있는 것으로 안다. 한국도 조금씩 바뀌어나가리라 기대한다.
- 생태 위기 문제는 소수자 인권과도 직결된다. 환경 파괴로 인한 피해를 직접적으로 입는 계층이 여성, 아동, 장애인, 난민, 블루칼라 노동자 등 사회의 약한 고리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경각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김윤아 대한민국의 경우 사과재배한계선이 강원도 북단까지 상승했고 내륙에서도 열대과일을 재배한다. 농업 종사자들의 경우 그들이 입지를 고른 것이 아닐 텐데 생태 파괴로 인한 식생의 변화가 이들의 산업에도 직격타를 날린다. 북극곰만 살 곳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사람도 살 곳이 없어지는 때다. 얼마 전 최근 30년의 사계절 분기점과 이전 30년의 분기점을 비교한 도표를 읽었다. 생각보다 봄과 가을의 지속 기간은 비슷한데 확실히 여름이 늘고 겨울이 줄었다. 지구 가열의 증거다.
구민정 한국의 동해에서만 지난 5년간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축구장 70개 크기의 모래사장이 사라졌다고 한다.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너울성 파도가 빈발하면 연안이 침식하는데, 그 불안정한 지면 위에 도로를 짓고 집을 지으면 무너지기 십상이라 몇년 새 주거 공간을 잃은 분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기후 위기로 인한 재난은 평등하게 오지 않는다. 국가별 환경 데이터를 비교해보면 탄소 배출량은 부유국이 압도적인 반면 이로 인한 피해율은 수몰 위기에 처한 빈곤한 나라들이 훨씬 크다. 지구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친환경적 삶의 태도를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쉽게 단념하는 이유 중 하나가 무력감 때문이다. “너 하나 노력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어차피 땅덩이 큰 나라에선 분리수거도 안 한다”와 같은 반응도 이들을 지치게 한다. 주변의 힐난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신념을 고수하려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나.
김윤아 내가 알고 있으니까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 더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어떤 방식으로 자연이 순환하고 우리의 소비가 어떻게 위해를 가하는지 알면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의 방식을 실천할 사람은 많아질 거라 믿는다. 나의 실천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행동으로 보인대도 나쁠 건 없다.
구민정 환경을 이야기하는 일이 유난스럽게 비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의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일을 행하면 된다. 텀블러를 들고 다니다 잊었다면 그날은 커피를 안 마실 게 아니라 하루쯤 일회용 용기에 커피를 마시면 된다. 다만 그럴 때마다 주변에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일거수일투족을 재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친구끼리 연애 고민을 나누듯이 환경과 지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 김윤아씨의 표현을 인용하며 오늘의 대화를 마치면 될 것 같다. 김윤아씨는 지난해 연말 콘서트에서 새해 소원으로 지구의 평균 기온이 1도 낮아지길 소망하고 인류의 발전을 위해 무기력해지지 말자며 ‘진보된 인류 재단’으로 살자고 관객을 고무했다.
김윤아 내가 재단장이다. (웃음) 재단장으로서 환경을 생각하는 곡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