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송중기는 데뷔 15년차 배우가 됐다. “평소엔 15년이라는 숫자에 무감각한 편이지만, 요새는 감독이나 촬영감독이 나보다 어린 경우도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15년간 다져온 톱배우이자 스타로서의 영향력을 흥미롭게 발휘하는 배우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화란>의 강렬한 시나리오에 매료되어 노 개런티로 출연을 감행한 송중기는 제작자 크레딧에도 이름을 올리며 상대적으로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신인감독의 영화에 힘을 보탰다. 송중기가 연기한 명안시의 범죄 조직 중간 보스 치건은 자신처럼 아버지로부터 오랜 가정 폭력을 당해온 소년 연규(홍사빈)에게 마음을 쓰지만, 그의 행동은 오히려 연규를 수렁에 빠뜨리고 만다.
- 송중기가 적극적으로 뛰어들면서 급물살을 타게 된 프로젝트로 알고 있다. <화란>의 시나리오가 그토록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 뒷부분이 궁금해서 후루룩 30~40분 만에 시나리오를 다 봤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다음날 한번 더 시간을 오래 들여서 읽었다. 무척 강렬하고 센 이야기였고, 독립영화 같다고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한재덕 사나이픽처스 대표를 잘 모를 때였는데 아는 분을 통해 치건 역을 맡고 싶다고 전달했다. 사나이픽처스에서 제작한 영화 중 오승욱 감독님의 <무뢰한>을 특히 좋아한다. 때문에 대표님에 대한 믿음도 컸다.
- <무뢰한>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나.= 형사가 살인자를 잡기 위해 그의 애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는데, 같이 지내면서 호감인지 비즈니스인지 모를 모호한 감정이 묘사되는 게 매력 있었다. 그 오묘한 감성을 오승욱 감독님이 정말 잘 포착해서 영화를 묵직하게 끌고 간다. <화란>의 연규와 치건의 관계에서도 비슷한 면모가 보였다. 치건이 연규를 도와주는 것인지 아니면 더 수렁에 빠뜨리는 것인지, 멀리서 보면 구해주는 것인데 미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모호함이 닮았다. 그래서 더 반가웠다.
- 그래서인지 <화란>을 연규와 치건의 독한 멜로로 받아들이는 관객도 적지 않다. (웃음)
= 실제로 현장에서 “이건 사랑이라고 봐도 되지 않나?”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승무(정재광)의 캐릭터까지 곁들이면 이건 삼각관계다. (웃음)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열어두고 생각하며 찍었다.
- 멜로라고 해도 무방할 감정이 녹아 있지만 겉포장만 본 사람들은 “송중기가 과거의 서울우유 같은 말랑말랑한 이미지를 버리고 남자다운 영화를 찍고 싶어서” <화란>을 찍었다고 쉽게 말하기도 한다.
= 그렇게 봐도 상관없다. 나는 아니긴 한데, 그렇게 봐도 무방하다. 내가 서울우유 같은 이미지라면, 굳이 흰색을 억지로 빨간색으로 바꾸려고 하면 그건 자기만족에서 끝날 때가 많아서 위험하다. 빨간색이 되기 위해서는 흰색에서 회색으로, 연두색에서 초록색으로 가듯 자연스럽게 달라져야 한다. <화란>은 그저 지금 내 나이에 맞는, 공감할 수 있는 타이밍에 만난 시나리오였다.
- 치건이 주는 위협성은 극 중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간극을 표현해내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 연규가 오토바이를 훔쳤다는 사실을 승무가 일러바쳤다고 생각한 치건이 승무를 반 죽을 때까지 패는 장면이 있다. 촬영은 했지만 최종 편집에서 빠졌다. 치건의 무서움을 억지로 보여주지 말고 영화의 기저에 스며 있는 미스터리함으로 남겨서 여운을 느끼게 하는 방향으로 갔다. 또 <화란>은 연규 중심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치건 캐릭터가 튀면 안된다는 판단도 있었다. 사빈이가 아직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친구인 데다 홍보 활동도 내가 적극적으로 하게 될 상황에서 치건 캐릭터가 도드라지면 영화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연규의 감정대로 극이 흘러가도록 치건은 최대한 리액션만 하기로 했다.
-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치건이 좀더 거친 인물이었고, 감독이 썼던 3가지 결말 중에는 치건이 하얀을 실수로 죽이는 장면도 있다고.
= 초고에선 연규의 아버지가 친부였다. 그리고 연규가 아버지를 죽이는 게 엔딩이었는데 논의 끝에 지금 버전으로 바뀌었다. 연규와 치건의 분노에 좀더 집중하는 과정에서 치건이 하얀을 죽이는 신이 수정됐다. 무엇보다 연규와 하얀에게 희망을 주는 방향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고 감독님의 생각이 바뀌게 된 것 같다.
- <화란>은 좋은 보호자, 즉 하얀을 만난 연규와 만나지 못한 치건의 대비를 통해 어른의 의미를 묻는 작품이기도 하다. 연규와 거울처럼 닮은 치건을 연기하기 위해서 연규와 홍사빈 배우를 세심히 관찰하며 유사한 점이 드러나도록 접근한 지점도 있나.
= 굳이 그렇게 노력하진 않았다. 감사하게도 홍사빈이라는 친구가 워낙 착하고 성실하고 인간적으로 참 괜찮다. 긴장은 되지만 잘해보려고 열심히 하는 모습이 내가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 같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송중기라는 사람의 마음에 들었다. 이 친구를 너무 예뻐하게 되면서 실제 내가 홍사빈을 보는 감정을 치건이 연규를 보는 감정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사빈이를 보듯 연규를 보면서 연기했다.
- 최근 필모그래피의 밸런스가 무척 좋다. 드라마 <빈센조> <재벌집 막내아들>로 대중성을 잡는다면, <화란>처럼 꼭 도전해보고 싶은 장르가 있다면 과감하게 출연한다.
= 꽂히지 않으면 억지로 하지 못한다. TV든 영화든 안전한 길을 택한 적은 없다. 그래서 어떤 영화 제작사 대표님들은 나에게 “성격 참 특이하다. 대본 보는 기준을 도통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웃음) 아직 해보지 못한 장르가 너무 많아서 도장 깨기 하듯 도전해나가고 싶다.
- 아직 도전하지 않은 미개척 장르는 무엇인가.= 얼마 전에도 공포영화 시나리오를 엄청 찾고 있다고 말했다. 정통 호러영화가 시장에서 많이 사라져서 아쉽다. 내가 한국 호러영화 중 무조건 1등으로 꼽는 영화가 윤종찬 감독의 <소름>이다. 요즘 만나는 가까운 관계자 분들에게 “책상에 숨겨둔 공포영화 시나리오가 있으면 좀 달라”고 말하고 다닌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