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인터뷰] 백지 같은 일인자, ‘만분의 일초’ 문진승
2023-11-07
글 : 정재현

<만분의 일초>의 황태수는 영화 시작 후 4분의 1이 지나서야 처음 얼굴을 비춘다. 그전까지 황태수는 명성만으로 김재우(주종혁)를 과민하게 만드는 대상이다. 마침내 둘이 붙은 첫 대련, 태수는 돌진하며 맹공을 펼치는 재우의 수를 간파했다는 듯이 함묵하며 버티다 단 한번의 치명타로 상대를 압살한다. 태수를 연기한 배우 문진승은 줄곧 ‘고수’의 풍모를 내뿜으며 영화 속에 서 있다. 문진승은 행여 각본과 연출, 촬영과 편집이 세공해 만들어준 일인자의 포스가 자신으로 인해 흩어질세라 끊임없이 전문가의 자문을 구하며 겨눔세가 요구하는 미묘한 선, 고수처럼 보이는 손짓과 발짓을 치열하게 갖추어갔다. 어느새 문진승은 최고 기량을 갖춘 검도 선수 태수가 되어 있었다.

- 작품에 합류하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 오디션에 가까운 미팅을 했다. 처음엔 정해진 배역 없이 시나리오를 읽었고, 다음날 작품을 쓰고 연출한 김성환 감독님을 만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화에 관한 감상 정도만 나누고 헤어졌는데 그다음주에 황태수 역할을 제안받았다. 내 목소리 톤과 이미지가 황태수 역에 제격이었다고 말씀해주셨다.

- 김성환 감독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나.

= 감독님이 황태수 역할에 어울리는 배우를 찾기 위해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소속사의 신인배우들과 미팅을 가졌다고 하셨다. 미팅 당시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어떻게 읽었는지 물어보셨다. 소년 만화 같은 요소가 장점이라 생각돼 말씀드렸더니, 감독님도 평소 일본 만화를 포함한 성장물을 좋아해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하셨다. 그 점이 감독님과 통했던 게 아닐까 싶다.

- 지금껏 연기한 배역은 대부분 조직 내 수하 중 하나였다. <모범가족>에선 조직원이었고, <달이 뜨는 강>의 마태모는 천주방의 이인자였고, <악인전기>의 허양호는 유성파 넘버3였다. 일인자 역은 처음이다.

= 시기적으로는 <악인전기>보다 <만분의 일초>를 먼저 찍었다. 일인자가 된 것은 좋았으나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일인자를 표현하는 일이 무척 힘들었다. 말없이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작업이 외롭고 어려웠다. 게다가 감정 표현도 쉽게 하는 캐릭터가 아니다 보니 자칫 황태수가 로봇처럼 보이진 않을까 걱정하며 연기했다. (살면서 1등을 해본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 고등학생 때 특정 과목 내신 석차에서 1등해본 적 은 있다. (웃음)

- 일인자만이 지니는 여유나 위압감을 표현하기 위해 연구한 게 있나.

= 우선 검도를 잘하는 것처럼 보여야 했다. 그래서 함께 훈련하는 용인대학교 친구들에게도 자문을 많이 구했다.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자세 연구였다. 대련할 때의 폼을 포함해 앉아 있는 자세, 서 있는 자세, 호면 착용 자세 등을 세심히 구현하려 노력했다. 대련 시작 전 외치는 기합마저도 고수의 것은 소리의 질이 다르다. 선수별로 자기의 평소 성격과 어울리는 기합을 낸다. 황태수라면 정제된 기합 소리를 낼 것 같아 묵직한 소리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

- 영화는 줄곧 재우의 시점을 견지한다. 다시 말해 영화에 등장하는 태수는 ‘재우 눈에 비친 태수’이기도 하다.

= 태수가 백지처럼 모든 걸 다 흡수하는 성격이었으면 했다. 태수는 재우의 트집에 맞대응하기보단 먹어버리길 택한다. 그리고 재우는 태수의 안중에 없다. 선수촌의 모든 선수는 그저 지금 겨루어야 할 대상 정도일 뿐이다. 그러니 재우 입장에선 태수가 얼마나 짜증났겠나.

-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태수를 연기하는 과정을 ‘비워내는 과정’이라 요약했다.

= 언급했던 것처럼 태수는 백지 같은 사람이다. 스스로 백지가 되기 위해 이것저것 채우기보다는 묵직한 감정 하나만 가져가려 했다. 대사 톤도 변주를 다양하게 주기보단 일정한 톤을 유지한 채 어투의 굴곡을 없애는 등 최대한 나를 비워냈다.

- 재우와 태수가 등을 맞댄 채 진행하는 스트레칭 신은 영화에서 가장 큰 서스펜스를 부른다. 상대의 허리가 꺾이고 발이 들릴 때의 공포가 대단하다.

= 몸으로 나누는 신경전이라 생각했다. “물러서지 않을 거야”라는 태수의 대사처럼, 태수는 그 순간 결단했을 것이다. 태수가 스트레칭을 하며 속으로 품었던 뒤섞인 생각들이 대사로 설명되진 않지만 몸짓으로 표현되길 바랐다.

- 재우와 태수가 공통으로 공유하는 기억인 검도 스승 김철원, 그리고 김철원과 얽힌 태수의 사연이 재우를 내내 괴롭힌다. 하지만 사연의 진위 여부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관객에게 의문으로 남은 사건을 배우는 어떻게 접근해갔나.

= 김철원 사범에 관해선 명확한 서사가 있었다. 영화엔 편집됐지만 영화의 제목인 ‘만분의 일초’는 태수 인생의 캐치프레이즈다. 편집된 장면 속 과거의 태수는 자책감으로 인해 삶을 포기하려던 캐릭터다. 하지만 그때 김철원 사범이 태수에게 다음과 같은 대사를 건넨다. “검도는 만분의 일초라는 찰나에 승부가 결정되는 종목이다. 그 만분의 일초라도 네가 힘든 걸 잊을 수 있다면 도전해보지 않겠니.” 그 대사가 태수를 살게 했다.

- 촬영하며 알게 된 검도의 매력이 있다면.

= 검도는 나를 압도하는 운동이다. 살면서 ‘기’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검도를 통해 처음 알았다. 아마추어 검도인들도 검을 잡을 때면 기세가 절로 부여된다. 검도는 기검체일치(氣劍體一致)의 운동이다. 기세와 검 그리고 피지컬의 3박자를 갖춰야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운동이다. 검도가 만분의 일초로 승패가 갈리는 운동이라 하지 않았나. 그 만분의 일초에서 득점을 판가름하는 요소가 ‘기’다. 검도를 통해 배운 기를 다른 현장에서도 카리스마의 일환으로 활용했다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3개월 배운 것으론 어림없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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