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잠들고 깨어나는 틈새의 영화, 이정홍 감독과 <괴인>의 희귀한 저력
2023-11-10
글 : 김소미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에서 처음 공개되어 뉴 커런츠상을 비롯한 4개 상을 수상하고 서울독립영화제 대상, 무주산골영화제 감독상과 영화평론상 등을 석권하는 동안 <괴인>은 소문과 호기심을 몰고 다녔다. 단편영화 <해운대 소녀> <반달곰>으로 주목받은 뒤 오랜 배회의 시간을 거쳐 첫 장편영화를 발표한 이정홍 감독의 장편 데뷔작은 매혹하는 이야기의 기술을 모두 해제함으로써 비로소 낯선 매혹을 획득한다.

<괴인>은 신통한 영화다. 주인공은 외부의 번잡한 일상사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주변 인물들은 불쑥 나타나거나 증발해버리면서 좀처럼 조직화되지 않는 서사임에도, 관객은 긴장과 안도 사이에서 자꾸만 허리를 곧추세우게 된다. 제목처럼 괴이한 리듬으로 인생의 막막한 한 국면에 몰린 남자를 지켜보는 이 영화는, 무의미해 보이는 작은 순간들로부터 나와 타인의 서늘한 이면을 비집고 들어간다. 그 틈은 아주 좁고 때로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나머지 누군가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영화일 수 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길고 희한한 여운을 남긴다.

퇴사 후 건축 현장에 뛰어든 목수 기홍(박기홍)은 친구 경준(최경준)을 데리고 피아노 학원 공사를 맡는다. 이들은 작업을 모두 마친 밤에 만취해 남의 건물에서 잠을 청하는 불한당이지만, 해가 뜨면 곧잘 절박하거나 무력해진다. 얼마 뒤 기홍은 그날 밤 학원 건물에서 뛰어내린 누군가로 인해 자동차 지붕이 찌그러진 것을 발견한다. 그는 전원주택을 마련한 젊은 부부, 정환(안주민)과 현정(전길)의 집에 세 들어 사는데, 낮에도 대체로 집에 머무는 백수인 정환의 부추김으로 범인 찾기에 나서게 된다. <괴인>은 곧이어 기홍 앞에 금발의 홈리스 여성 하나(이기쁨)를 응징의 대상으로 데려다놓고는 불길한 예후는 모두 비껴나가는 의외의 여정을 향한다.

얼핏 추적의 플롯을 취하는 것처럼 보여도 이정홍 감독의 말마따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차 지붕의 문제쯤이야 대충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다. 동기와 목표가 영화를 추진하는 결정적인 힘이 아니라는 사실은 곧 <괴인>을 사건에 머물지 않게 한다. 사건이 약하거나 희박하다는 것은 지루함의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괴인>은 산발적으로 모여든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동의 운명을 감지해냄으로써 관객(의 몰입) 역시 배제하지 않는다. 그 운명이란 당신이 누구든 모두 외로우며 결정적으로 잠잘 곳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피아노 학원, 두 세대가 묘하게 나뉜 집, 동네 목욕탕 등에서 인물들은 잠으로 매개된다. <괴인>의 모럴은 복잡미묘히 얽힌 이들이 서로의 악인이 아니라 괴인으로 남도록 한다. 괴인이란 모든 타인에 다름 아니다.

골목에 인물을 가두거나 직접적으로 틈새를 비추는 <괴인>의 카메라는 세로로 확장된 프레이밍에 그치지 않고 종단의 움직임을 통해 동요를 만든다. 피아노와 사람이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창밖으로 위험하게 뛰어내리는 동작이 프레임을 환기시킨다. 이 동요는 “우리가 누군가를 찾아갔을 때, 혹은 누군가가 우리를 찾아왔을 때마다 발생하는 예기치 않은 파장”이며 그래서 이정홍은 우연히 하나의 추락을 지켜보게 된 기홍에게 비록 그가 원치 않을지라도 어떤 책임이 발생했음을 짚는다. 미세하게 모두가 서로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는 연루자라는 감각은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를 연상케 하고, 부박한 일상의 태를 노출하면서 사뭇 우스꽝스러운 인간 교류를 이끌고 간다는 점은 홍상수의 스타일이 스친다. “최초의 구상은 훨씬 더 느리고 차분한 영화였고, 계획에 없던 로케이션과 아마추어 배우들 본연의 성격으로 말미암아 영화의 분위기를 수정해나갔다”는 이정홍 감독의 말에서 미루어볼 때 <괴인>의 또 다른 가능태는 보다 진지한 도덕의 드라마였을지도 모른다. 8년의 계획을 내려놓고 시시각각 이합집산하는 영화의 흐름에 올라탄 덕분에, <괴인>은 결과적으로 한결 몸집이 가볍고 경쾌한 영화로 완성됐다. 산발적이고 주변적인 것들에 그물망을 던지는 이 영화의 의미 체계는 카메라 바깥에서 우연이나 즉흥에 항복하는 감독의 방법론과 궤를 같이한다.

동료 경준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기홍을 비롯해 학원과 주택의 주인들이 전면에 나서는 이 드라마에서 공명의 진원지를 맡는 인물은 어떤 것의 주인도 아닌 방랑자 하나다. 여기서 만약 <괴인>을 다르덴 형제가 즐겨쓰는 윤리적 시험대 위에 올린다면, 인물들을 파국으로 내몰 만한 설정이 얼마든지 널려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하나가 잠든 피아노 학원의 현관문을 정환이 거세게 두드릴 때, 그로 인해 창문에서 다급히 뛰어내리는 하나를 기홍이 지켜볼 때, 길에서 우연히 붙잡힌 하나가 기홍에게 잘못을 고백할 때 관객은 불안해진다. 말하자면 우리는 얼마든지 더 불온해질 가능성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괴인>은 다분히 예상되는 픽션의 위악적 위기를 유유히 비껴가고 생략과 엇나감의 전략을 동원해 인물들을 한자리에 공존시킨다. 발생하는 것은 그저 순순한 대화이다. <괴인>의 말미에 카메라가 단둘이 외출하는 기홍과 현정을 따라가지 않고 정환에게 남는 이유는, 시나리오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하나-정환-기홍 순으로 중심이 옮겨간 까닭에 “꽤 오랫동안 정환을 주인공으로 썼던 이야기의 관성이 어느 정도 남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혼자 빈집을 헤매는 남자의 모습”을 바라본 뒤 이후 어쩌다 다시 모인 인물들이 한집에서 잠들게 된다는 사실을 병치하는 것이 감독이 내린 최선의 가능성인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괴인>은 의미보다 더 선명하게 스타일을 각인함으로써 질문을 완성하는 영화다. 독립영화가 확보할 수 있는 정서와 스타일, 내러티브, 방법론을 향한 우리의 기대를 회복시키는 <괴인>은 산만하나 느슨하지 않으며, 모호하지만 공허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으나 집요하다. 이만큼 제멋대로 가면서도 혼란 속에 관객을 내버려두지 않는 성취를 이정홍의 장악력이라 부를지 그저 매력적인 직관이라 부를지는 이어질 그의 행보가 결정할 일이다. 지금으로선 설혹 섣부르더라도, 그 둘 모두를 가졌다고 말하고 싶다.

사진제공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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