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이 왜 <괴인>인가.
= ‘괴인’은 글쓰는 동안 영화에 등장할 묘령의 인물들을 이미지화하면서 스스로 잡아본 느낌이었다. 어디까지나 가제라는 마음으로 촬영하는 동안에도 틈틈이 제목을 고민했는데, <괴인>보다 더 어울리는 제목을 찾을 수 없었다. 나 스스로도 정의 내릴 수 없는 영화라는 생각에, 어쩌면 이 제목 자체가 이 영화다운 해석이나 이해를 조금이나마 돕는 역할을 할 수 있겠다고 봤다.
- <괴인>은 8년 전 시작되어 시나리오가 끊임없이 바뀌어온 것으로 알고 있다. 목수 일로 생계를 이어가려고 하는 남자 기홍이 중심에 나선 지금의 서사는 어떻게 자리를 잡게 된 걸까.
= 기홍은 실제로 목수인 내 친구다. 그와 함께 공사장에서 목공 일을 할 기회가 있었다. 이창동 감독님이 단편 작업을 좋게 봐주셔서 <버닝> 이전의 작업을 한창 준비하실 때 연출팀에 합류하게 됐다. 그때 소집과 해제를 반복하는 동안 생계 활동이 필요했다. 영화에서처럼 작은 피아노 연습실 공사를 했었다. 공사 마지막날 피아노를 올리는 과정에서 영화 초반의 피아노 연주 장면이 떠올랐다. 공사의 흔적으로 너저분하고 열린 창밖으로 소음이 여과 없이 들려오는 공간에서 땀에 젖은 인부들이 연주를 가만히 듣고 있는 모습이었다. 동시다발적으로 기홍이 영화의 주인공을 해도 좋겠다는 마음이 섰다. 이 영화에서 찾자면 내 위치는 경준과 가까울 것이다. 현실이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 혹은 아직은 기홍의 상태를 바라보는 내 입장이 경준에게 투영된 것 같다. 기홍은 그 뒤로 계속 목공 일을 해서 지금은 안정적인 프로페셔널이 되었고, 사실은 그를 따라 최근에도 함께 작업을 한 적이 있다. 우리 두 사람 모두 과거와 비교해 한결 자신에게 편안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직관의 기록
- 이야기가 하나로 얽혀드는 태피스트리가 중요한 작품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작품을 태동시키고 견인한 최초의 힘이 어떤 이미지로부터 시작된 것인지 묻고 싶다. 캐릭터 이전에 <괴인>을 구체화하게 된 결정적 이미지가 있나.
= 이미지 하나를 떠올린 뒤 어떻게 거기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서 작업하는 방식인 것은 맞다. 직관적으로 떠오른 그림들을 영화의 목적지 또는 경유지로 세워두는 식이다. <괴인>은 작업을 시작한 초반부터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비밀스럽게 잠들어 있는 공간에 다른 한 사람이 몰래 찾아가는 그런 이미지를 생각했었다. 이미지가 아니라 의미가 먼저인 경우도 물론 있다. 이 경우는 대부분 나를 두렵게 하는 것, 혹은 내게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어떻게 녹일 수 있을지 생각하곤 한다.
- 당신이 추출해낸 의미나 이미지는 대단한 사건과는 거리가 멀다. 이 산발적인 재료들의 출처는 어디인가.
= 순간순간 나를 자극하는 경험을 어떻게 영화에 녹여낼 수 있을까 생각하고 계속해서 메모한다. 인생의 경험 중에 영화로 들일 수 있는 것을 만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 같다. 드물게 어떤 순간에 직관이 찾아올 때가 있는데, 이런 것을 의식하는 습관 때문에 삶이 자연스럽지 못하게 되기도 해서 한때는 힘들었다. 지금은 이런 나의 성질 자체를 받아들이고 편해졌다. 켜켜이 메모들이 쌓이면 책자로 옮긴다.
- 노트들을 하나로 엮는다는 말인가.
= 몇년치의 기록들을 다 모아서 직접 제본한다. 꽤나 버거운 작업인데 흐름을 보기 위해서 한다.
- 플롯이 명확하지 않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유연한 전개인데, 실제로 각본의 형태도 그러했나.
= 시나리오를 쓸 때는 모든 걸 통제하려는 듯이 하나부터 열까지 매우 집요하게 썼다.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두 세대가 구분되어 있지만 또 적당히 부대끼는 그런 공간을 떠올렸고, 부암동 산자락 아래 봐둔 집이 있었다. 그러나 그 집을 섭외하는 데 실패하면서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모든 것이 바뀌어야 했으니. 애초에 내 미숙함이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프리프로덕션, 촬영 과정에서 시나리오의 코어는 유지하되 많은 것을 바꿔갔다. 지금 영화에 등장하는 집은 울산에서 찾았다. 그런데 새집에는 내가 기존에 썼던 인물들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로케이션이 바뀌자 인물의 성격, 움직임이 다 어긋나기 시작했다. 공간에 맞춰서 시나리오를 다시 써야겠다고 결심한 게 크랭크인 세달 전이었다. 기존에 있던 것들이 싹 물러나고 이야기의 절반쯤은 다시 구성했다. 집의 영향뿐 아니라 박기홍 배우 특유의 기운도 영화를 바꿔놓았다. 처음엔 그를 이용해 내 속에 있는 무언가를 표출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배우와 공간을 만났을 때 연출자로서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더라. 그만의 에너지, 담백함, 빠른 속도에 가장 어울리는 것들을 찾아나갔다. 정해진 틀을 유지하면서 닥쳐오는 변화와 우연들을 받아들이는 과정, 새로운 환경을 가능한 선에서 통제해나가는 과정에 내가 닫혀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에 의미를 두려 한다. 잃은 것들을 통해 얻는 영화였다.
- 전개와 암시까지는 하되 그 결과는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내러티브 방식을 취했다.
= 관객이 능동적으로 영화를 봐주길 바랐다. 단순하게 말해서는 그렇다. 사후에 내가 취한 내러티브 스타일에 대해 좀더 되짚어보기로는, 기홍이란 인물에게서 기인한 성질이 아닐까 싶다. 기홍은 자신이 불편해지면 멀리 도망가고 상황을 피하려 한다. 스스로를 고립시키기 쉬운 인물을 따라가는 영화에 필연적인 공백이 아니었을까. 이것은 아마도 내가 철저히 인물을 먼저 생성하고 그를 뒤따라가듯이 이야기에 접근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대화의 말꼬투리 하나를 잡아서 다음 장면이 바뀔 수도 있다.
또 다른 변화의 가능성
- 골목길, 전원주택의 긴 창문 등 세로가 긴 틈새를 강조하는 프레이밍이 인상적이다. 비단 화면만 그런 것은 아니고 위아래로 이동하는 종단의 움직임이 강조된다.
= 좁은 골목을 활용하게 된 것 자체는 거의 대부분 우연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애초에 그 공간을 의도했다기보다, 촬영이 필요했던 메인 로케이션에 딸린 주변적 공간들에 무의식적으로 끌린 결과물이다. 기홍과 하나가 카센터에 갔을 때 굳이 건물 뒤편의 좁은 공간에서 담배를 피우게 한다거나 기홍이 건물의 틈새로 떨어진 핸드폰을 찾는 것처럼. 좁은 틈을 굳이 비집고 들어가는 사람에게 들 만한 자괴감이 좋았다. 남의 창문에 가까이 다가가야 하는 장소에서 응축된 에너지를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기홍을 정환과 현정이 사는 집으로 이사시키기 직전의 장면으로 그를 어떤 틈새에 몰아넣는 것만큼 우아한 설명은 없겠다고 판단했다.
- 기홍이 창문 너머를 관음하게 되는 상황을 쌓아간 이유는. 옥탑에서 이웃집 커플을 훔쳐보다가 계단에서 미끄러지는 누추한 슬랩스틱이 절묘했다. (웃음)
= 우선 내게 그런 성질이 있다고 본다. 기홍은 누군가와 깊이 관계 맺지 않으려는 성질의 소유자이고 자기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데, 관음하는 장면에서만큼은 그 사람의 안쪽이 비쳐나오는 것 같다. 가볍고 무심해 보이는 사람에게서도 어떤 욕망이나 깊이가 읽힐 때가 있지 않나. 기홍이 처음 창 너머를 보는 옥탑 장면은 창문 안쪽에서 어떤 일이 어느 정도 수위로 보여지면 좋을지 조감독에게 아이디어를 부탁했다. 모니터를 보는데, 남자가 여자 앞에서 양말을 벗는 상황이 딱 내가 원하는 수준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에로틱한 상황도 아닌. 못 본 척 지켜보는 것도 일종의 관음이라면 현정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다. 남편 정환이 기홍을 부추겨 피아노 학원에 가보자고 하면서 2층에서 신나게 내려올 때, 현정은 미동 없이 눈동자만 살짝 움직여 상황을 지켜본다. 이 인물이 종종 고요한 식물처럼 움직인다는 점을 보여주는, 현정에 관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 프레이밍에 면밀히 접근하되 카메라를 쉽게 움직이지는 않는다.
= <괴인>의 카메라가 비추는 시야의 범위 자체는 좁다. 그렇지만 나는 프레임의 밖의 것들이 어떻게든 절묘한 순간에 화면 안에 개입되기를 계속해서 바라는 편이기도 하다. 김종선 촬영감독님이 촬영 중에 내가 프레임 바깥의 환경에 대해서 대단히 중시하는 감독이라고 이야기한 것이 떠오른다. 당장 보이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프레임이라는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어떻게든 거기에 갇히지 않는 것이 세계를 만들 때 결국 중요한 것이란 생각을 어렴풋이 해봤다.
- 기홍과 정환의 늦은 밤 급습에 놀란 하나가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이후 길에서 기홍과 하나가 마주치게 되면서 하나가 기홍의 차를 망가뜨렸다는 사실이 발각된다. 불길한 파국을 유추해볼 수도 있는 순간에 영화는 언제나 가능한 가장 나쁜 결말을 비껴간다. 가령 그들이 정환의 집에서 다같이 고기를 구워먹게 된다거나, 하나가 정환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 나는 이 영화가 기홍이 자기답지 않게 궁지에 몰린 한 시절의 상태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자기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노동자라 조바심을 갖게 되고, 공사판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사람이 거칠어진다. 친구 경준이 걱정하는 게 바로 그런 모습들일 것이다. 어쩌면 <괴인>은 그런 기홍이 꽤 선한 내면의 소유자일 수 있다는 것을 비추는 과정의 영화가 아닐까. 삶이 개선된다거나 소통이 이루어질 거라는 약속의 지점까지 나는 나아가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러한 가능성을 담았다. 하나가 낯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그들에게서 안정감을 느끼자 그런 기운이 다른 이들에게도 전염된다. 현정이 맥주 두병을 들고 2층을 건너가 기홍의 방문을 두드리는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다. 나는 모두가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설령 자각하지 못할지언정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믿어보려 했다. 사건의 해결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괴인>의 엔딩은 모호하다. 그런데 이 밤만큼은 잠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한 집에서 함께 잠든다고 생각해주면 어떨까. 오늘이 흐지부지 끝나고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수상과 함께 주목받은 뒤 감독으로서 미래를 구상하는 데 달라진 점이 있나.
= 작품 제안 등은 아직 받지 못했다. 상업영화에 아예 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장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려 한다. <괴인>은 8년 준비해서 3억원가량의 예산으로 약 60회차를 찍었다. 다음 작업은 나 자신의 시행착오를 줄여서 좀더 수월하게 프로덕션을 운용해보고 싶다. <괴인>을 통해 좋은 동료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됐고 현실적인 영화 제작의 과정에 대해서도 값진 경험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