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가수 성시경과 나얼이 함께한 신곡 <잠시라도 우리>에 꽂혔다. 취향 저격한 노래는 물론이고 뮤직비디오의 애잔한 감성이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눈으로 듣는 것까지 즐거운 건 오랜만이기에 음원 사이트 대신 유튜브에서 무한 반복 감상 중이다. 흰옷을 입은 여성(천우희)이 손거울로 햇살을 반사시켜 눈가를 간지럽힌다. 밝은 꿈과 어두운 현실이 몇 차례 교차한 뒤 멀리서 들리는 헬기 소리, 흔들리는 물컵 그리고 잠에서 깨어 벌떡 일어나는 여성. 이윽고 나지막이 읊조리듯 노래가 시작된다. “가까스레 잠이 들다 애쓰던 잠은 떠났고…” 건조한 가을바람처럼 까슬거리는 단어를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감싸는 이 탁월한 도입부는 우리를 순식간에 다른 시공간으로 초대한 뒤 무장해제시킨다. (자매품으로 <너의 모든 순간>의 “이윽고…”가 있다.) 자주 쓰지 않아 살짝 녹슨 단어로 조탁한 가사와 친숙한 멜로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의 완벽한 조합.
짧은 영상이 대세 영상 콘텐츠로 자리 잡은 지는 한참 됐다. 짧을수록 매력적이라는 숏폼 콘텐츠에 대한 궁금증으로 시작된 회의에서 각자 체험에 근거한 많은 사례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나도 “최근에 이런 걸 보고 있는데…”라고 조심스레 운을 뗀 뒤 <잠시라도 우리> 이야기를 꺼냈다가 혼쭐이 났다. 일단 발매된 지 벌써 한달이 다 되어가니 최근이 아닐뿐더러 6분17초에 달하는 뮤직비디오는 숏폼과 거리가 멀다는 신랄한 지적이 이어졌다. 나의 ‘최근’이 모두의 ‘최근’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다시 SNS를 뒤적거려본다. 사람들은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각자 다른 시대를 산다. 때론 3시간이 넘는 영화가 순식간에 지나가는 반면 30초도 되지 않는 영상이 길게 느껴질 때도 있다. ‘짧다’는 건 매우 주관적인 감각이고, 시간의 길이는 종종 물리적인 척도보다는 마음이 쓰이는 양에 따라 결정된다.
영화는 숏폼 콘텐츠에 밀려나는 중인가. 둘은 애초에 다른 시간 축에 놓여 있다. (서사) 영화가 기본값인 나는 이미 완성된 영화를 구태여 조각내고 축약하는 방식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나는 서사가 있는 콘텐츠도 좋아한다”는 요즘 세대의 말을 전해 듣고 굳은 머리가 깼다. 짧은 영상이 기본값이고 그 하위 장르로서 서사 콘텐츠(그걸 더 좁히면 영화)가 존재한다는 인식의 전환. 뒤집어보니 보이지 않던, 아니 보려 하지 않았던 가능성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스토리텔링 영상 콘텐츠의 기본 작동 원리는 상상력이다. 장면과 장면 사이 정보의 공백을 메우는 상상의 힘으로 조각난 장면들을 연결해 환상을 창조한다. 어쩌면 영상으로 사고하는 지금 세대는 단편적으로 제시된 정보 너머 훨씬 많은 것을 상상하고 연결하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반면 올드 미디어로서 영화의 매력은 회상에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되돌아가 머무는 힘이다. 때론 장대한 영화는 찰나로 기억되기 위해 존재한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플라워 킬링 문>이 내 안에 각인된 장면은 몰리(릴리 글래드스턴)와 어니스트(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식탁에 나란히 앉아 폭풍우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순간이다.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말을 꺼내려는 어니스트의 불안을 몰리는 온화한 목소리로 다독인다. “그냥 가만히 있어봐.”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채워지는 시간이 아직은 내게 더 친숙하다. 6분여의 <잠시라도 우리> 뮤직비디오 또한 천우희, 안효섭의 클로즈업된 얼굴과 묵음 처리된 입 모양이 만들어낸 무성영화 같은 순간들로 내 안에서 반복 상영 중이다. 아직은 영상도, 글도 짧은 게 더 어렵고 낯설다. 하지만 지금은 영화만큼이나 숏폼이, 그걸 즐기는 친구들이 궁금하다. 마음이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