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특집] 불순한 영화를 향하여, 콘텐츠의 길이가 전부가 아니다… 영상과 수용자는 무엇을 상실하는가
2023-11-17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아네트>

1. <아네트>(2021)에서 레오스 카락스는 흥미롭게도 영화와 영화 바깥의 인접 매체를 불순하게 뒤섞는다. 뮤지컬과 스탠드업 코미디, 연극과 무성영화를 기반에 두고 시작한 영화는 텔레비전 뉴스와 소셜미디어, 스마트폰에서 재생되는 유튜브 영상과 스타디움 스크린에 떠오른 중계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영화에 무분별하게 개입하는 미디어의 풍경을 무람없이 받아들인다. 12년 만에 복귀한 전작 <홀리 모터스>에서 이미 거대한 필름카메라와 배우가 머무는 영화의 장소를 끊임없이 이동하는 리무진에 빗댄 바 있는 카락스는 영화를 영사기, 스크린, 극장과 불특정 다수의 관객이라는 전통적 결합으로 상상하는 대신 불규칙하게 모습을 변형하는 동사의 형태로 간주한다. 쇠락해가는 ‘시네마’의 전통을 지키려는 이들이 영화를 둘러싼 보편적 조건을 옹호하곤 하지만, 영화는 원칙적으로 그것들이 없더라도 성립할 수 있는 임의적 사건이다. 21세기에 내놓은 두편의 연출작에서 레오스 카락스는 순혈주의적 영화사의 계보 아래 단일한 영화의 본질을 수호하는 영화작가가 아니라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끌어들여 영화의 개념을 다각도로 재규정하는 이미지의 탐색자로 거듭난다. 두발로 걷지 못해 무대 위를 비행하는 아네트 인형의 몸짓처럼 위태롭고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아네트>의 형식은 영화가 다양한 동시대 미디어와 충돌하고 상호작용하는 현황을 제시한다. 카락스가 연극, 뮤지컬, 텔레비전, 소셜미디어, 실황 중계를 혼란스럽게 가져오는 것처럼 영화는 주변에 있는 미디어의 외형을 탐욕스럽게 훔치고 그것들의 조각난 단면을 자기 신체 일부로 삼는 프랑켄슈타인의 발명품이다. 영화의 본질은 카메라와 마이크로 수집한 시청각적 표현에 있다고 말하기 쉽지만, 그것은 언제나 다른 매체의 흔적과 불순하게 뒤얽혀 있다. 앙드레 바쟁이 ‘비순수 영화’라는 개념을 제기한 것처럼 영화의 역사는 영화가 독립적 매체로 존립하는 것을 방해하는 외부의 오염 요소와 결부된 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랫동안 영화 역사상 최고 영화로 평가된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이 탐정소설과 연극, 라디오 드라마와 뉴스 보도의 관습을 뒤섞은 불순한 영화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2. 틱톡, 인스타그램 릴스, 유튜브 쇼츠로 대표되는 숏폼 플랫폼과 콘텐츠(이 끔찍한 자본의 용어들…)는 오늘날 영화적 경험의 순수성을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대표적인 인접 매체다. 비좁은 스마트폰 화면 위에서 1분 이내의 짧은 영상이 끝없는 스크롤에 나열되며 즉각적 자극을 발사하는 숏폼은 말할 것도 없이 산만하고 분산적이고 무의미한 결과물의 연속이다. 이러한 콘텐츠 수용의 경험은 일정한 시간 동안 거대한 스크린을 집중해서 바라보는 영화 감상의 경험과 대립적이며 후자의 고유한 가치를 훼손하는 타락한 양식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하지만 앞서 <아네트>의 형식을 가리키며 말한 것처럼 영화는 그 산만하고 분산적이고 무의미한 영상과 불가피하게 결탁하고 있다. 영화는 그것이 우아하든 천박하든 근처에 존재하는 대상을 일단 집어삼킨다. 숏폼도 다르지 않다. 틱톡 단편영화 부문을 창설한 칸영화제를 비롯해 적지 않은 영화제와 영화 제작사는 숏폼 플랫폼의 자본과 공식적으로 협력하고 있으며, 이같은 맥락으로 세로 비율의 짧은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아바타>(2009)를 둘러싼 헛된 열광으로 한동안 영화의 미래로 주목받기도 했던 3D 효과는 사실 영사 시스템이 구현되기 이전인 19세기 중반부터 상용화된 기술이다. 이처럼 1분 내외 짧은 영상의 연쇄 역시 새로운 문화양식이 아니라 영화사의 오래된 기억 가운데 하나다. 서사에 단단히 묶여 있지 않고 특정한 음악과 몸짓을 결합해 제시하는 짧은 길이의 영상을 한명의 수용자가 감상하는 형식은 토머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에서부터 구현된 영화 경험의 모델이다. 무작위의 짧은 영상과 관람자가 일대일로 만나는 형식은 한 세기가 넘도록 영화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어두운 극장에 앉아 2시간 안팎의 영화를 집중해서 보는 행위가 영화의 본질에 속한다는 믿음에 필연적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프랜차이즈 시리즈물, OTT 관람에 대항해 극장의 가치를 고집하는 마틴 스코세이지의 순진한 믿음은 ‘시네마틱한 것’과 거리가 멀다(러닝타임이 3시간 넘는 장편영화를 연출하면서 틱톡과 레터박스 유저로 활동하는 스코세이지의 혼잡한 활동이야말로 시네마틱한 것의 본질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영화가 숏폼과 스트리밍, 미디어아트와 OTT 시리즈와는 다르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을 제외하고 남겨진 영화가 다른 영상적 실천과 어떻게 다른지 확신할 수 없다. 영상의 고정점도, 감상의 최종 목적지도 마련하지 않는 무한한 장소로서의 숏 플랫폼은 영화적 경험의 범주를 흩트리도록 부추기는 비천한 자극이다. 영화의 관습을 지키려는 이들이라면 틱톡, 릴스, 쇼츠 같은 숏폼 영상이 현대 관객의 집중력을 앗아가고 주의 산만과 충동성을 불러온다고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관람자의 집중력을 앗아가고 주의 산만과 충동성을 자아내는 것은 영화가 발명되면서 이뤄낸 경험의 충격이기도 했다.

3. 물론 차이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숏 플랫폼에는 영화가 발산한 충격이 소실되어 있다. 이것이 숏폼 컨텐츠의 중핵을 이루는 밈과 챌린지의 속성이다. 2016년에 출시된 틱톡은 이듬해 리믹스 음악과 립싱크 비디오를 공유하는 애플리케이션 뮤지컬리(Musical.ly)를 인수하면서 세계적 현상으로 확장됐다. 무한히 루프되는 음악을 기반으로 누구나 흉내내기 쉬운 노래와 춤과 놀이는 전세계 이용자들에게 영상에 참여하고 제작할 수 있는 서식을 제공했다. 숏폼은 사용자들에게 경험을 안기기보다 경험의 불확정성이 지워진 경험의 모방을 제공한다. 이는 언젠가 영화를 만드는 권리를 점유하던 이들이 낭만적으로 상상한 영상 제작의 민주주의와 무관하다. 숏폼의 무대에서 세계는 공식과 절차에 따라 배열된다. 숏폼 콘텐츠를 장악한 밈과 챌린지는 개개인의 표현과 자율성을 드러내는 매개라기보다는 알고리즘의 명령어처럼 아카이브 영상과 수용자의 반응을 예측 가능한 함숫값으로 접합하는 장치다. 무엇을 봐야 할지 헷갈리고, 무엇을 경험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에게 밈과 챌린지는 속삭인다. 이것만 보면 된다, 이것만 경험하면 충분하다. 스쳐 지나가듯 웃은 뒤 스크롤을 넘기면 문제될 것이 없다. 이 절차를 통과하며 세계는 행동과 반응이 정해진 템플릿이 되었다.

영상이 아카이브로 축적되고, 경험은 레디메이드로 정립되는 플랫폼에서 영상과 수용자는 감정을 나누는 방식을 잃어버린다. 스탠리 카벨이 고전기 할리우드 영화의 기능으로 관객의 감정을 교육하는 역할을 강조하고, <미치광이 삐에로>에 출연한 새뮤얼 풀러가 “영화는 감정의 전장”이라 말했던 것과 반대로 숏폼 영상은 관람자와 감정을 나누지 않는다. 거기 담긴 것은 밈의 몸짓이고, 챌린지의 제스처이기 때문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연쇄적 유희는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웃음거리로 소화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끔찍한 (비)웃음으로 돌아온다. 최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일어난 이후로 틱톡엔 물과 전기 공급이 끊긴 가자지구의 현황을 조롱하는 이스라엘 크리에이터들의 챌린지 영상들이 업로드되고 적극적으로 퍼져나갔다. 이스라엘 정부는 수많은 팔로워를 확보한 인플루언서들에게 선전용 영상과 포스팅 제작을 요청했으며 가자지구 내부의 참상과 구조 요청 영상을 삭제하는 데 비해 해당 플랫폼은 이를 제재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픽션 소재가 됐고, 팔레스타인은 다큐멘터리의 피사체가 되었다는 고다르의 표현을 변형한다면 이스라엘은 밈과 챌린지의 참여자가 됐고, 팔레스타인은 해시태그의 대상이 되었다. 익숙한 웃음의 형식을 모방하는 숏폼 콘텐츠 전략이 물과 전기가 끊긴 팔레스타인 난민의 생활을 모방하는 이스라엘 틱토커들의 웃음으로 되돌아오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의 ‘영향력’은 해맑고 명랑한 웃음의 유희적 프로세스를 타고 소리 없이 번져 학살 현장에 남겨진 생존자들의 비명을 지운다. 20세기의 영화가 수용소와 학살을 외면했다면, 21세기의 영상은 수용소와 학살마저도 비웃는다. 팔레스타인의 표상이 주어지지 않는 지형에서 이미지의 평등과 민주주의는 여전히 우리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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