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타인은 지옥이다>(스릴러), <구미호뎐>과 <구미호뎐 1938>(판타지), <배드 앤 크레이지>(액션) 등 차기작마다 다른 장르를 거친 이동욱이 <싱글 인 서울>을 통해 주 전공인 로맨스로 돌아왔다. 이동욱이 연기하는 영호는 한때 작가를 꿈꾸던 국문학도다. 지금은 꿈을 접어둔 채 논술 강사로 이름을 날리는 영호는 누구보다 싱글의 삶을 즐기는 중이다. 어느 날 영호는 출판사로부터 서울의 싱글 라이프를 책으로 써보겠느냐는 제안을 받는다. 그리고 출판사에서 편집장 현진(임수정)을 만난다. 영화에 흐르는 김현철 노래의 가사처럼, 영호의 모든 순간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으로 가득하다.
- 그간 <해피 뉴 이어>나 <뷰티 인사이드> 등 앙상블 영화에 주로 출연했다. <싱글 인 서울>은 모처럼 분량이 상당한 주연작이라 감회가 다를 듯한데.
= 시사회 때 완성된 영화를 처음 봤다. 스크린에 오래 나오는 내 모습을 오랜만에 보니 반가웠다. 처음 영화를 보는 관객들 옆에서 계속 반응을 살피게 됐다. 예상보다 관객들이 영호를 보며 많이 웃더라. 영호에게 많이들 공감하는 것 같다.
- 기자 간담회 때 “영화를 찍으며 새로 보고 느낀 서울의 모습이 있다”고 밝혔다. 그동안 서울의 수많은 곳에서 촬영을 해왔고 심지어 서울 토박이인 배우가 건넨 답이라 흥미롭다.
= 서울에서 40년 넘게 살았지만 늘 다니던 곳만 다녔다. 이번 영화를 찍으며 평소 다니지 않았던 서울의 이곳저곳을 방문했다. 한밤중 한강 잠수교를 걷는 장면을 찍을 때가 기억난다. 항상 높은 철교에서 한강을 조망하다 동일한 눈높이로 한강을 보니 새로웠다. 광화문광장도 차를 타고 지나치기만 했지 그곳에 내릴 일은 잘 없었다. 그곳에서 밤 장면을 찍는데, 야심한 시각에도 많은 회사 건물에 불이 켜져 있었다. 새삼 야근하는 한국의 직장인들에게 경외감을 느꼈다.
- <강심장> <이동욱은 토크가 하고 싶어서> 등의 방송에서 MC로 활약했고, 여러 차례 청소년기에 국어 교사를 꿈꿨으며 수능 언어영역에서 고득점을 받았다고 밝혔다. 언어 감각을 평소에도 주지하고 지낼 거라 짐작한다. 작가 겸 논술 강사인 영호 역이 내심 반갑지 않았나.
= 영호는 확실히 나와 맞닿은 점이 있는 캐릭터였다. 언어 감각까진 아니더라도 활자 읽기의 중요성은 매번 느낀다. 그래서 자주 독서는 못해도 매일 신문을 읽으며 감각을 활성화하려 한다. 작가를 꿈꾸던 영호와 논술 강사로 성공한 영호 사이의 생략된 시간을 상상해봤다. 아마 영호는 작가가 되기 위해 등단의 기회를 여러 번 노렸지만 계속 실패했을 것이다. 영호의 재주는 글을 쓰고 그 글을 타인에게 이해시키는 데 있으니 논술 강사를 차선책으로 택했을 거라 설정했다.
- 시나리오의 어떤 점이 매력적이었나.= <싱글 인 서울> 전까진 주로 장르성이 대두되는 작품을 찍었다. 로맨스를 안 한 지도 꽤 됐고, 모처럼 인간적인 연기를 하고 싶기도 했다. 멜로는 배우의 분위기가 받쳐줘야 성립하는 장르 아닌가. 점점 나이는 들고, 내가 언제까지 로맨스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에 이때다 싶더라. 나이가 들어도 멜로를 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중장년 멜로가 우리나라에선 잘 안 만들어지지 않나. 더군다나 요즘은 멜로 자체보다 장르물에 멜로를 덧입히는 경우가 많으니 로맨스만 이야기하는 영화를 찍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어느 순간 사랑 이야기를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생긴 것 같다. 그런데 사랑 없는 삶이 과연 존재할까? 다들 사랑하며 살지 않나.
- 영화는 첫사랑의 양면을 모두 보여준다. 첫사랑의 지질한 면까지 연기하는 게 꺼려지진 않았나.
= 공감이 많이 됐다. 영호와 그의 첫사랑의 기억이 다르듯 나도 내 첫 여자 친구도 서로 다른 모습으로, 각자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첫사랑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돌아보면 옛 연애 상대들에게 나름의 논리로 던졌던 말과 행동을 당시엔 멋지다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유치하지. 아마 많은 남성 관객들이 우리 영화를 보고 집에 가서 이불킥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웃음)
- 30대의 영호와 20대의 영호를 모두 연기했다. 플래시백 장면에서 마냥 어려 보이는 연기가 아닌, 20대의 ‘정서’를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 플래시백 장면에선 아역을 쓸 걸 싶더라. 이제 대학생 연기는 무리다. (웃음) 대학생 영호를 연기하며 20대의 이동욱도 돌아봤다. 그때의 나는 뭘 몰랐다. 내 말이 다 맞다며 코앞만 봤달까. 내가 30대가 지나서야 배우로서 관리의 중요성과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깨우친 사람이라 영호도 그렇지 않았을까 추측했다. 다들 그맘때는 첫사랑이 끝사랑일 거란 허황된 생각을 하지 않나. 그런 모습이 영호에게서 보이길 바랐다.
- 한동안 영화 연출의 꿈을 밝혔다. 실제로 뮤직비디오나 예능 프로그램의 트레일러를 연출한 경력도 있다.
= 이제는 그 꿈을 내려놨다. 수많은 연출자를 만나며 감독은 내가 꿈꿀 영역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배우로서 촬영에 들어가기 전 대본을 읽으며 장면이 어떻게 구현될지 머릿속으로 그려봐도 감독님들은 늘 내가 생각지 못한 기발한 숏을 만들어내신다. 가끔 배우로서 감독님이나 촬영감독님께 콘티와 다른 숏을 제안하기도 하는데, 내 아이디어가 최종 상영본에 반영될 때 무척 기쁘다.
- 최근 <핑계고> <살롱드립> 등 출연하는 유튜브마다 이슈가 됐다. 뿐만 아니라 ‘버블’과 같은 팬덤 플랫폼도 누구보다 잘 활용 중이다. 트렌드에 발맞춰 끊임없이 공부해간다는 인상을 받는다.
= 연기 이외의 분야에 꾸준히 도전하고 싶다. 대중과 연기자 이동욱으로 만나는 것도, 자연인 이동욱으로 만나는 것도 내겐 큰 도움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5, 6년 전부터 ‘현재를 살자’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래서 유튜브 채널에도 자주나가고, 버블도 개설하게 됐다. 버블은 소속사 홍보팀의 권유로 시작했다. 평소 친구들과 채팅할 때의 말투 그대로 했더니 많이들 좋아해주신다. 대중이 나를 찾기 이전에 내가 먼저 다가가는 것도 의미가 있다.
- 좌우명을 설정한 계기가 있다면.= 그렇게 살지 않으면 도태되니까. 급변하는 세상에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곳에 불시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끊임없이 대중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직업에 종사한다. 그런 내가 트렌드를 읽지 못한 채 과거의 영광에만 갇혀 지낸다면 대중에게 사랑받긴 어려울 것이다. 가끔 팬들이 “<쓸쓸하고 찬란하神-도깨비> 좋아해요!”라고 하면 농담으로 “언제적 도깨비예요~”라고 응수한다. 과거의 영광스러운 히트작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겠지만, 거기에 안주하는 순간 그대로 멈추는 거다. 그래서 끊임없이 새로운 캐릭터와 장르를 찾고, 쉬지 않고 작품을 찍게 된다. 아직 체력도 좋고 선택에 주저함이 적을 때라 더 많은 필모그래피를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