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물 수정(水晶)은 어떤 변수가 투입돼도 고유의 진동 주파수를 일정하게 유지한다. 수정과 동음이의어의 이름을 지닌 배우 임수정 또한 지난 20년간 언제 어디서나 고유의 진동 주파수로 관객의 마음에 파문을 그려왔다. 하지만 <싱글 인 서울> 속 임수정이 분한 출판사 편집장 현진은 매번 주파수가 변하는 사람이다. 잔잔한 호수처럼 보이는 현진의 마음은 “그대 노 저어올” 낌새만 보이면 고유의 진동 주파수는 온데간데없이 쉴 새 없는 격랑이 인다. 배우 임수정은 특유의 섬세함을 발휘해 요동하는 현진의 주파수에 관객이 공명할 수 있도록 돕는다.
- 팬데믹 중에 찍은 <싱글 인 서울>이 드디어 개봉한다.
= <싱글 인 서울>은 의미가 남다르다. 코로나19 팬데믹 중 찍은 첫 작품이고, 이 영화를 기점으로 드라마 <멜랑꼴리아>와 영화 <거미집>을 이어서 찍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찍는 상업영화인 데다 오랜만에 받은 로맨스영화 시나리오라 반가웠다. 로맨스영화가 잘 만들어지지 않는 지금, 극장에 걸릴 로맨스영화가 제작된다는 점도 무척 반가웠다.
- 현진의 신조는 “책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다”이다. 이는 “혼자여서 좋다”는 영호(이동욱)의 가치관과 대비를 이룬다.
= 영화를 찍든 책을 엮든 함께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나. 기본적으로 예술은 다수와 대부분의 과정을 함께하는 수고를 전제하니 말이다. 현진은 혼자 보내는 시간을 외로워하고, 누군가와 함께하며 사랑받고 싶어 한다. 그러다 영호를 만나 혼자 보내는 시간의 즐거움을 깨닫는다. 미처 몰랐을 뿐 현진에게도 책을 편집하는 과정이 요하는 집요한 고독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현진도 영호만큼 내면의 성장을 겪었다고 생각한다. 현진은 어느 순간 독립된 공간에서 홀로 일을 마무리하고 뿌듯해한다. 자기 내면에 존재했지만 스스로 낯설어하던 모습을 영호를 통해 알아간 것이다.
- 답을 듣다 생각난 것이 있다. 한동안 에세이집을 내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 하지 않았나.
= 책 집필 의지가 높았던 때 운 좋게 한 출판사를 만났다. 서로 계약 조건을 검토하는 등 꽤 진전이 있었는데 작품 활동이 계속 이어지며 글 쓰는 일이 미뤄졌다. 글도 매일 성실하게 꾸준히 쓰지 않으면 누적이 안된다는 걸 에세이집을 준비하며 깨달았다. 그렇게 에세이집이 몇년간 답보 상태에 머물렀는데, 최근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더 늦기 전에 책을 내고 싶다. 연기를 계속하며 글도 계속 쓰고 싶은 것이 나의 꿈이다. 책을 내면 북 토크도 해야지. (웃음)
- 안경을 쓰고 부스스한 펌을 한 현진의 모습은 어떻게 만들어갔나.
= 캐릭터를 연구할 때 외형부터 잡아가는 편이다. 감독님, 분장팀, 의상팀과 회의하며 현진의 룩을 구체화했고, 각자가 그리던 현진의 스타일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매일 출퇴근해야 하는 현진은 매번 머리를 만지는 걸 귀찮아할 것 같았다. 그래서 언제든 편하게 질끈 머리를 묶을 수 있는 부스스한 파마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볼 때나 부스스하지, 현진이는 그 머리가 편하고 괜찮다고 생각할 거다. (웃음) 감독님이 내게 안경을 씌워주시며 현진이 완성됐다. 안경을 쓰고 연기하긴 처음인데 착용해보니 현진의 캐릭터가 절로 잡혔다. 흘러내린 안경을 올리는 손동작, 안경 너머로 상대를 응시하는 자세 등 현진이 할 법한 액션이 자연스럽게 나오더라.
- 현진에게 영화의 제목 <싱글 인 서울>은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1인 가구 임수정에게 도시 서울은 어떤 의미인가.
= 우선 <싱글 인 서울>은 현진이 영호를 만나 만드는 책의 제목이지 않나. (잠시 고민하더니) 지금 막 떠오른 생각이 있다. <거미집>도 영화 속 영화가 ‘거미집’이었다. 그런데 <싱글 인 서울> 속 책 제목도 ‘싱글 인 서울’이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다. 어쩌면 <싱글 인 서울>의 편집장, <거미집>의 배우 이민자까지 창작을 하는 캐릭터에게 무의식적 끌림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서울은 나의 일터이고 일상을 사는 곳이다. 또 애증을 느껴 홀연히 떠났다가도 언제든 돌아오면 애착을 느끼게 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싱글 인 서울>을 찍으며 새로운 도시를 여행하듯 일상을 살아가는 마음을 배웠다. 서울 시내를 차로 이동하다가도 잠시 멈춰 낯선 골목을 걷는 등 익숙한 공간에서 생경한 것을 발견하는 삶의 방식을 알아가는 중이다.
-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에선 IT 기업 팀장을, <거미집>에선 베테랑 배우를, 이번 영화에선 출판사 편집장을 맡았다. 근래 필모그래피에서 줄곧 팀의 리더나 전문가를 연기 중이다.
= 점점 내 배역에 직급이 생기고, 자리가 주어진다. 지금 내 경력에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20년 넘는 연기 생활을 어떻게든 잘해냈다는 방증이라는 생각도 든다. 요즘 내게 주어지는 배역들은 배우라는 직업의 특별함과도 상통한다. 누구든 일을 하다보면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고민할 때가 있지 않나. 배우를 하다 보면 제안이 오는 캐릭터를 통해 지금의 내 모습을 가늠하게 된다. 그런데 스펙트럼을 넓히기 위해 이젠 직급이 없는 캐릭터도 연기해보고 싶기도 하고. (웃음)
- 최근 독립영화 진영의 여성감독들과 스크립트를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이 화제를 모았다.
= <거미집>의 주제처럼, 좋은 영화는 계속 만들어져야 한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 영화계 안팎으로 닥쳐도 영화가 계속되려면 나의 롤을 확장해야겠다는 고민에서 출발한 일이다. 그래서 예산 규모는 작지만 작품성이 돋보이는 영화들의 ‘프리프리’프로덕션 단계부터 합류했다. 내게 먼저 제안해온 작품도 있고, 논의 중에 함께 기획하게 된 작품도 있다. 아직 내가 작가나 배우를 맡는 것도 확정되지 않은, 아이데이션 정도의 단계다. 지금까지는 영화계와 배우로서 함께했다. 이젠 영화인으로서 연기 이외의 다른 일로도 한국영화계에 기여하고 싶다.
- 20여년 전 <씨네21>에서 봉준호 감독과 대담을 진행한 적이 있다. 당시 봉준호 감독이 작품 선택의 기준을 물었을 때 어떤 답을 건넸는지 기억하나.
= 연민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 정확하다. 당시 기준이 여전히 유효한지 궁금하다.
= 연민이라는 답은 필모그래피를 막 쌓아가던 20대 신인배우가 내놓을 수 있는 최상의 답변이었다. 당시엔 인간 임수정에게서 캐낼 수 있는,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아 연기할수록 나와 캐릭터를 분리하기 어려운 지경에 달하는 캐릭터에 마음이 가다보니 작품 선택의 기준에 연민이 자리했다. 여전히 공명할 수 있는 캐릭터에 끌리지만 지금은 동일한 질문에 욕망이라 답하고 싶다. 내 안에 도사린, 배우 임수정이 아직 꺼내지 못한 욕망을 표적 삼는 캐릭터를 만난다면 덥석 물 것이다. 꺼낼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던 시기를 지나, 이젠 꺼낼 수 없었던 것들을 선뜻 드러내는 작품들에 눈길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