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제 49회 서울독립영화제 추천작 ①
2023-12-01
글 : 씨네21 취재팀

신생대의 삶

임정환/한국/2023년/99분/개막작 이우빈

민주(김새벽)가 리투아니아를 떠돈다. 목적은 실종된 남편을 찾는 것이다. 남편은 비트코인 비슷한 것에 손을 대더니 홀연 자취를 감췄다. 남편의 편지를 단서 삼아 헤매던 민주는 여러 곤경을 겪는다. 숙소엔 가전 기기와 난방이 말썽이고, 남편의 발자취는 오리무중이다. 민주는 도움을 얻고자 대학 후배 오영(심달기)을 만난다. 오영은 준화(박종환)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셋은 술판을 벌인다. 그리고 민주가 잠에서 깬 즈음부터, 영화는 아예 다른 세계(들)로 바뀐다. 오영과 준화가 민주를 모른다고 한다거나, 민주와 준화가 커플인 상황이라거나, 준화가 인터폴이라며 민주를 찾아오는 등 여러 에피소드가 나열된다. 감독의 전작 <국경의 왕>처럼 변화무쌍한 서사와 인물이 특정한 공간을 매개 삼아 갖가지로 흐트러진다.

특별한 고정축 없이 산개하는 것만 같은 영화의 순간들을 하나로 꿰는 것은 유머다. 전작보다 가볍고 재기 넘치는 콩트와 어처구니없는 개그들이 영화의 정체성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중요한 점은 이 웃음들이 해학이나 풍자, 블랙코미디 따위의 뼈 있는 웃음들은 아니란 사실이다. 인물들은 그저 술 먹고 장난치며 깔깔 웃는다. 때론 한없이 단순한 슬랩스틱이 기나긴 롱숏에서 펼쳐질 뿐이다. 배우들의 뻔뻔한 데드팬 코미디(당황스러운 상황을 엄격하게 연기하면서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도 탁월하다. 이처럼 무기력할 정도로 무의미하고 웃긴 장면들의 집합은 영화 전체를 가볍게 만든다. 이 가벼움이 임정환 감독이 의도한 ‘신생대의 삶’인 듯하다. 연출의 변에 따라 신생대란 “공룡이 멸종한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의미하는 지질시대의 구분 용어”이며 “오늘도, 지금도 신생대의 어느 순간”임을 지시한다. 즉 우리네 삶은 6600만년이란 신생대의 아득한 시간 선상 어딘가에 찍혀 있는 아주 미약한 점들이다. 리투아니아라는 공간은 신생대 내내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대지 위의 시간은 수많은 이의 수많은 일상과 죽음으로 뒤섞이고 있다. <신생대의 삶>은 그 무수한 시간의 가능성, 수많은 삶의 행태를 최대한 가볍게 오려내고 유머로 경쾌히 풀칠하여 이어 붙이는 것이다. 겨우 하나의 삶(서사)으로 온 세계(영화)를 지탱하지 않는다. 대신 무수한 삶이 각자의 세계를 구성하게 놔둔다. 그 덕분에 모든 순간이 더 소중하고 깨끗해진 영화다.

뿌리이야기

김광인/한국/2023/130분/본선 장편경쟁 박정원 영화평론가

호주 이민을 앞둔 청년 승태(백승태)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가족들, 그리고 지난 6년여간 함께 육체노동을 했던 동료들을 만나며 시간을 보낸다. 승태와 승태의 가족, 친구, 동료들이 공유하는 시간은 사실 특별할 것은 없다. 같이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며, 어떤 과거 혹은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이야기하고, 때로는 함께 씻거나 아픈 곳에 침을 놔주기도 한다. 승태의 출국일이 다가오며 이 보드랍고도 온기 어린 시간이 점차 끝나간다.

김광인 감독의 자전적 경험을 반영한 듯한 영화 <뿌리이야기>는 한 청년이 이민을 앞두고 가족, 동료들과 보내는 며칠간을 다룬다. 육체노동자와 동료의 죽음, 청년 세대의 이민이라는 소재에서 쉬이 예상될 법한 사회·정치적 메시지를 부박하게 내세우지 않고 주인공의 일상을 고요히 따라가는 카메라의 거리감이 영화를 한결 견고하고 미덥게 만든다. 적나라할 정도로 날것 같은 먹고 씻고 자는 장면들의 반복을 수미상관처럼 앞뒤로 감싼 노동 장면과 그 배경에 흐르는 리스트의 피아노곡이 인상적인데, 특히 후반부 이중 노출 장면이 제목을 상기시키며 여운을 남긴다.

최초의 기억

안선경, 장건재/한국/2023/120분/본선 장편경쟁 이우빈

3개의 단락으로 이야기가 나뉜다. 다만 이 구분은 서사적 서스펜스나 반전을 위한 단순 장치가 아니다. 영화 속 인물과 관객의 관계 맺기를 위해 영화와 현실의 단층을 차분히 없애는 작업에 가깝다. 첫 번째 단락은 ‘무풍 프로젝트’다. 민주(강민주)의 고향인 무주군 무풍면에 놀러온 금주(이금주), 동근(서동근)의 이야기와 비밀 연애를 이어가는 요선(백요선), 은경(조은경)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사소한 사랑 싸움을 만드는 질투와 이해의 과정이 느슨하게 교차한다. 두 번째는 ‘연기 워크숍’이다, ‘무풍 프로젝트’가 워크숍 과정의 일환임이 드러나고, 이것에 참여했던 배우들이 모방 독백이라는 연습 과정에 새로이 돌입한다. 짝을 이룬 상대배우를 캐릭터 삼아 연기하는 방식이다. 상대가 지닌 최초의 기억을 파헤치고 이해하여 표현해야 한다. 서로를 알기 위해 애쓰는 대화들은 연기를 위한 사전 준비임과 동시에 진정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표백의 시간이 된다. 세 번째 ‘모방 독백’에선 모방 독백의 결과가 드러난다. <파스카> <이 영화의 끝에서>의 안선경 감독,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한국이 싫어서>의 장건재 감독이 공동으로 연출했다.

레슨

김경래/한국/2023/94분/본선 장편경쟁 박정원 영화평론가

영어 강사 경민(정승민)은 여자 친구 선희(전한나)와 권태롭고도 위태로운 연애 중이다. 결혼을 원하는 선희와 달리 경민은 결혼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한편, 경민은 과외 학생의 소개로 피아노 강사 영원(이유하)에게 영어를 가르치게 된다. 자막 없이 영화를 보고 싶다는 이유로 영어를 공부하게 됐다는 영원은 피아노를 배워본 적이 있다는 경민에게 ‘교환 과외’를 제안하고, 그렇게 경민은 영원의 집에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다. 서로에게 영어와 피아노를 가르치던 두 사람은 강사와 학생 사이라고 부르기만은 적절치 않은 관계로 발전해 나간다.

김경래 감독의 <레슨>의 인물들은 한국어라는 언어로 소통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나고 빗겨나는 듯 보인다. 오랜 연인 경민과 선희의 대화가 특히 그렇다. 결혼이라는 단계로 건너가지도, 그렇다고 헤어짐을 선택하지도 못하는 미적지근한 연인의 틈새로 영원이라는 존재가 끼어들고, 영어와 피아노라는 색다른 소통 도구는 경민과 영원 사이의 낯선 자극과 육체적 감응이라는 속성을 부각한다. 녹아들지도 탈피하지도 못한 채 맴도는 자의 새벽꿈과도 같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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